
미륵산과 통영 내항
삼도수군통제영을 줄인 말이 통영으로 선조37년(1604) 통제사 이경준이 두룡포(지금의 통영시)로 통제영을 옮기면서 통영의 명칭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또한 충무시의 본 지명은 통영군이고, 통영군에서 시로 승격되면서 충무공의 시호를 따서 충무시라 하였으며, 통영이나 충무시의 탄생은 삼도수군통제영과 충무공에 연유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1995년 1월 1일 충무시 통영군을 통합, 도농복합형태의 통영시가 되었다.

개발과 보존 그 틈에서 살아남아 통영 관광의 필수 코스가 된 동피랑. '동피랑'은 동쪽에 있는 비랑, 즉 비탈의 지역 사투리라고 한다. 통영시 정량동, 태평동 일대의 산비탈 마을로 서민들의 오랜 삶터이자 저소득층 주민들이 살고 있으며 언덕마을에서 바라보는 해안도시 특유의 아름다운 정경을 가지고 있는 곳으로 소개되어 있다.

아들놈.
계속해서 동피랑 보존 과정을 살펴보자. 이 지역은 재개발 계획이 수차례 진행, 변경 및 수정되어 왔는데 지방의제 추진기구인 '푸른통영21'(시민단체) 위원들은 현지를 답사, 이 지역을 일괄 철거하기 보다는 지역의 역사와 서민들의 삶이 녹아있는 독특한 골목 문화로 재조해보자는데 의견을 모으게 된다. 이에 푸른통영21, 행정(통영시, 행안부), 교육계(충무중학교, 인평초등학교, 통영교육청), 경상대학교 해양과학대학, 지역내 자생문화지킴이인 '드러머팀' 마을주민자치위원회가 한자리에 모여 머리를 맞대고 함께 만들어낸 협력과 소통의 장으로 동피랑 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문화와 삶이 어우러지는 마을 만들기를 통해 예향 통영을 체감할 수 있는 장소로 가꾸어 공공미술을 통한 통영의 명물로 만들고자 그림이 있는 골목, 역사와 문화가 살아있는 골목으로 커뮤니티 디자인(Community Design) 개념을 추가하여 벽화 뿐 아니라 천천히 걸어다니면서 느끼는 볼거리와 휴식을 추구하는 슬로우 시티(Slow City), 슬로우 라이프(Slow Life)를 지향하는 통영의 또 하나의 명물로 재구성된 곳이다.

무서븐 마눌의 협박으로 한 컷

청마.김춘수.윤이상. 박경리.김상옥. 전혁림 그들도 동피랑을 바라보며 꿈을 가꾸었으리.

"미르"는 용어 고어로 알고 있다.

윤이상
한국의 나폴리라 불리우는 통영에서 우리 문화계에 거목들이 많이 배출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청마는 "나의 시성(詩性)을 일깨워 준 건 고향의 맑고 고운 자연"이라 했고, 김춘추 시인도 “통영이 내 시의 뉘앙스가 돼주었다”고 술회했다. 음악가 윤이상은 차원을 높여 “미륵도에서 우주의 소리를 들었다”고 회고했다."고 한다.
통영의 든든한 배경 미륵산. 다도해의 아름다운 풍광. 풍부한 해산물로 인한 자본력 축적. 그 경제력을 바탕으로 유학생이 배출되고, 선진 문물을 눈뜬 지식인들이 상호 교류를 갖고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면서 다른 도시 보다 먼저 문화 예술이 발달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 역시 옳다고만 볼 수 없을 것이다. 통영 출신 인사들의 이야기를 가져 온다.

유치환 (柳致環 1908∼1967) : 시인. 호는 청마(靑馬). 경상남도 통영(統《營) 출신. 유치진(柳致眞)의 동생이다.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했다. 한때 사진관 경영을 했으며 만주 등지로 다녔으나 해방 후는 교육계에 투신, 경남여고·대구여고 등의 교장을 역임했다. 서울시 문화상, 예술원상 등 수상. 1931년 《문예 월 간》에 <정적>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그 뒤 여러 직업을 전전하던 중 부산에서 문예동인지 《생리(生理)》를 주재·간 행했고, 39년 첫번째 시집 《청마시초》을 발간했다.
여기에는 36 년 <<조선문단>>에 발표한 <깃발> 등을 비릇해 53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동양적 관념의 세계를 노래한 것이 많다. 40년 만주로 이주했다. <절도(絶島)> <수(首)> <절명지(絶命地)> 등은 이 무렵 만주생활에서 느낀 고독감을 읊은 것으로, <생명의 서(書)> <일월> 등과 함께 두번째 시집 《생명의 서》에 실려 있다. 광복 뒤 청년문학가협회장 등을 지내면서 민족문학 운동을 전개했으며, 6·25때에는 종군문인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이때 쓴 시들을 모아 시집 《보병과 더불어》를 발간했다. 이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교직생활과 시작(詩作)을 병행했다. 생명파 시인으로서 그의 생명에 대한 애정은 자연 속에 존재하는 온갖 사물의 미세한 부분까지 관찰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런 생명에 대한 애정이 그의 시의 바탕을 이루고, 그 바탕 위에서 동양적인 허정(虛靜)·무위(無爲)의 세계를 추구하며, 또한 이러한 허무의 세계를 극복하려는 원시적인 의지가 살아 있다. 자유문학상·예술원상 등을 받았다. 부산 에덴공원, 경주 불국사, 충무남망공원(南望公園) 등에 시비가 있다. 시집 《울릉도》 《청마시집》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청마시초》, 《생명의 서》, 《청령일기》, 《보병과 더불어》, 《제9시집》,《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등이 있음. 그의 시는 허무의 경향을 띤 의지의 시, 생명의 시라는 특성으로 웅장한 남성적인 톤을 가지고 있다. 자작시 해설집으로 《구름에 그린다》 등이 있고, 유고집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가 있다
고교와 대학시절 우리는 이영도와 러브스토리 때문에 한 번쯤 그의 시를 애송한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경남일보에 조현길 시인이 기고한 글을 가져온다.
그리움 |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청마 유치환은 1908년 통영에서 태어나 1931년 문예월간에 ‘정적’이라는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등장한다. ‘깃발’의 시인으로, 정운(丁芸) 이영도 시인과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아름다운 서정을 안겨준 청마 유치환. 위의 ‘그리움’이라는 시도 정운 이영도에게 사랑을 두드렸지만 열리지 않는 애틋함을 노래한 내용을 담고 있다.
청마 유치환과 정운 이영도의 운명적 만남은 1945년 통영여자중학교 교사로 함께 근무하면서 시작된다. 정운 이영도는 경북 청도가 고향으로 남편과 사별한 뒤 딸 하나를 가진 청상과부이다. 청마 유치환의 나이 서른 여덟, 정운 이영도의 나이 스물 아홉. 정운 이영도는 재색(才色)을 겸비한 여인으로서 많은 남자들의 로망이었다. 청마 유치환은 아내를 둔 유부남으로서 정운 이영도를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다.
그러나 청마 유치환은 열리지 않는 이영도의 마음을 편지를 통해 수없이 다가간다. 삼년이란 시간이 지나 이영도의 마음은 청마 유치환의 사랑의 마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1947년부터 1967년 20년 동안 청마 유치환은 부산에서 교통사고로 돌아가기 전까지 정운 이영도에게 사랑의 편지를 쓴다. 그가 쓴 편지는 다 시다.
행복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진정 나는 행복하였네라
삼년 전 진주문협에서는 통영으로 문학기행을 갔다. 청마문학관을 들러 청마거리를 지나며 우체국에 매일 편지를 부치는 청마 유치환을 생각한다. 그리고 건너편 담쟁이넝쿨 사이로 열려진 창문 너머 정운 이영도의 단아한 얼굴을 기억한다.
탑 너는 저만치 가고
나는 여기 섰는데
손 한번 흔들지 못하고
돌아선 하늘과 땅
애모(愛慕)는 사리(舍利)로 맺혀
푸른 돌로 굳어라. 이영도 시조시인이 갑자기 교통사고로 돌아간 청마를 생각하며 지은 ‘탑’이라는 시조에 사랑의 마음이 애절하게 담겨 있다. 청마 유치환은 사랑을 통해 자기가 갖고 있는 시의 미성(美性)을 문학적으로 승화시켰으며, 정운 이영도는 그 청마의 지치지 않는 사랑의 감성을 먹으며 그 외로움을 이겨 내었으리라. 시도 사랑도 지독한 외로움이 아닐까.
유치진(柳致眞: 1905-1974) 극작가. 호 동랑(東朗). 경남 통영 출생. 향리에서 중학을 마치고 도일, 도쿄 릿쿄[立敎]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31년 홍해성(洪海星)·서항석(徐恒錫) 등과 극영동호회(劇映同好會)를 창립하고, 이어 이 단체를 발전시켜 이헌구(李軒求)·이하윤(異河潤) 등의 참여를 얻어 극예술연구회로 발족시켰다. 31년 희곡 《토막(土幕)》을 《문예월간》지에 발표하고, 계속해서 《버드나무 선 동리의 풍경》, 장막희곡 《소》 등을 발표하였다.
그 후 사회성을 배제하고 인간의 애정문제를 다룬 《제사》 《자매》 《부부》 등을 발표하고, 중일전쟁(中日戰爭)이 발발한 이후에는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국민연극운동을 벌여 자신이 친일작품으로 인정하는 《흑룡강》, 친일의 선봉 이용구(李容九)를 찬양한 《북진대(北進隊)》 등의 희곡을 쓰고 공연하기도 했다. 8·15광복 후에는 《자명고(自鳴鼓)》 《원술랑(元述郞)》 등의 역사극과 반공을 주제로 한 《나도 인간이 되련다》 등의 역작을 발표하였다. 국립극장장, 반공통일연맹 이사, 동국대학교 교수 등을 역임하였고, 드라마센터 소장으로 후진양성에 힘썼다.

박경리
1926. 10. 28 경남 충무~ 2008. 5. 5 강원 원주.
주로 인간의 내면세계를 깊이있게 그려낸 문제작을 발표했다. 1945년 진주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 결혼했으나, 6·25전쟁 때 남편이 납북된 후 딸과 함께 생활했다. 시인 김지하는 그녀의 사위이다. 1970년대 후반에 강원도 원주시로 거처를 옮기고 창작활동에 전념하여 1994년 8월 대표작 대하소설 〈토지〉를 완결지었다. 1955년 김동리의 추천을 받아 단편 〈계산 計算〉과 1956년 단편 〈흑흑백백 黑黑白白〉이 〈현대문학〉에 발표되어 문단에 나왔다. 이어 〈현대문학〉에 단편 〈군식구〉·〈전도 剪刀〉·〈불신시대〉·〈영주와 고양이〉·〈반딧불〉·〈벽지 僻地〉·〈암흑시대〉 등의 문제작을 계속 발표했다. 1950년대 중반까지는 주로 단편을 쓰다가 1959년 〈표류도〉(현대문학, 1959. 2~10)를 발표한 뒤로는 주로 장편을 썼으며, 1963년 단편 14편을 모아 소설집 〈불신시대〉를 펴내면서 작가로서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이 책의 후기에서 〈암흑시대〉가 〈불신시대〉를 잇는 작품임을 암시했는데, 두 작품은 여주인공의 형편이나 아들의 죽음이라는 극적 체험과 심적 변화 등의 면에서 비슷하다. 그러나 〈불신시대〉가 종교와 병원을 중점적으로 비판한 반면에 〈암흑시대〉는 무책임하고 경박한 의사와 간호원들의 횡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어 6·25전쟁을 소재로 한 장편 〈시장과 전장〉(1964)을 발표했다.
그녀의 소설에서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는 여성의 비극적인 운명이다. 대표작 〈토지〉에서 최씨 집안의 중심인물이 두 여성인 것과 마찬가지로 장편 〈김약국의 딸들〉·〈시장과 전장〉·〈파시 波市〉의 주요인물도 여성이다. 〈김약국의 딸들〉에는 한 가정에서 운명과 성격이 다른 딸들이 나오는 반면에 〈파시〉에는 6·25전쟁 직후에 부산과 통영을 무대로 살아가는 여성들의 다양한 모습이 드러나 있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주로 전쟁 미망인을 등장시켜 악몽과 같은 전쟁으로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모습을 그린 초기의 작품들을 작가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소설 또는 사소설(私小說)이 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토지〉는 1969년부터 1994년까지 25년간 집필된 대하소설로서 1890년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를 배경으로 했으나 역사소설로 굳어진 것은 아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은 과거에 실존했던 인물이 아니라 작가의 상상력이 빚어낸 인물들이다. 유방암 선고와 사위 김지하의 투옥 등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토지〉의 집필을 계속하여 그녀는 윤씨부인-별당아씨-서희, 그리고 그 자식들의 세대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친 인물들을 통해 민중의 삶과 한(恨)을 새로이 부각시켰고, 이로써 한국문학사에 큰 획을 그었다.
박경리는 1996년 토지문화재단을 설립했으며 1999년 강원도 원주에 토지문화관을 세웠다. 박경리는 문학뿐만 아니라 환경 문제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 2003년 문학과 환경문제를 다루는 계간지 〈숨소리〉를 창간했고, 2004년 자신이 신문과 잡지 등에 기고했던 글올 모아 환경 에세이집 〈생명의 아픔〉을 출간했다. 2008년 그녀가 생을 마감하기 전 마지막까지 썼던,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담은 유작 시 39편이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로 발표되었다. 소설집으로 〈표류도〉(1959)·〈김약국의 딸들〉(1962)·〈가을에 온 여인〉(1963)·〈파시〉(1965)·〈박경리단편선〉(1976)·〈박경리문학전집〉(1979)·〈토지〉(1989)·〈가설을 위한 망상〉(2007) 등이 있다. 그밖에 시집 〈우리들의 시간〉(2000), 에세이 〈원주통신〉(1985)과 〈가설을 위한 망상〉(2007) 등이 있다. 1957년 현대문학상, 1959년 내성문학상, 1965년 한국여류문학상, 1972년 월탄문학상, 1991년 인촌상, 칠레정부 선정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기념메달(1996), 금관문화훈장(2008) 등을 받았으며,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선정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1999)으로 선정되었다.

김춘수(金春洙, 1922년 ~ 2004년)는 1922년 통영에서 태어났다.21세기 한국 시인들을 이끈 인물 중 하나이다. 일본 니혼대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이 때에 그는 일본 제국에게 대항해야 한다는 주장 때문에 퇴학당하고 교도소에 7달동안 수감되었다. 석방된 후 귀국한 김춘수는 고등학교와 중학교 교사로 일했다. 1948년에 시 <애가>를 발표하면서 공식적으로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광복 후 종래의 서정적인 바탕 위에 주지적인 시풍을 이루는 데 힘썼다. 1948년 대구에서 발행되던 동인지 <죽순(竹筍)>에 <온실(溫室)> 외 1편을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했다. 이어 첫번째 시집 <구름과 장미>를 발간하고 <산악(山嶽)> <사(蛇)> <기(旗)> <모나리자에게> <꽃> 등을 발표하여 시인으로서의 기반을 굳혔다. 그의 작품세계는 한마디로 사물(事物)의 사물성(事物性)을 집요하게 탐구하였다. 시에서의 언어의 특성을 다른 어떤 시인보다 날카롭게 응시하며 존재론적 세계를 이미지로 노래하였다. 시집으로 <구름과 장미> <늪> <기(旗)>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타령조 기타> <처용(處容)> <남천> <비에 젖은 달> 등이 있으며 시론집도 다수 있다. 1958년 한국시인협회상, 1959년 아시아자유문학상을 수상했다.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상옥
생명감을 영롱하고 섬세한 언어로 표현했다. 호는 초정(草汀·艸汀·草丁). 독학으로 문학을 공부하여 1938년 김용호·함윤수 등과 동인지 〈맥〉을 펴내면서 시 〈모래알〉 등을 발표했다. 1939년 시조 〈봉선화〉가 〈문장〉에 추천받아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항일운동에 관계하여 몇 차례 투옥된 적이 있으며, 해방된 후 부산·마산·삼천포 등에서 교원생활을 했다.
1947년 펴낸 첫 시조집 〈초적〉에는 시 〈청자부〉·〈백자부〉·〈십일면관음〉 등 문화유산에 관심을 갖고 민족 정서를 노래한 시들을 실었다. 1949년 시집 〈고원(故園)의 곡〉·〈이단의 시〉를 펴냈는데 대부분 인생에 대한 관조적 명상을 노래했다. <의상〉(1953)·〈목석의 노래〉(1956) 등의 시집과 동시집 〈꽃 속에 묻힌 집〉(1958)을 펴냈고 1972년까지 골동품 가게인 아자방을 경영했다. 〈목석의 노래〉는 현실에 대한 반성과 영혼의 순수성, 영원한 생명에 대한 탐구가 중심 주제를 이루고 있다. 1973년 시조집 〈삼행시〉를 펴냈는데 3행시란 시조의 3장 형식을 현대식으로 풀어 쓴 말이다. 그의 시조는 어구에 얽매이지 않고 사설시조의 리듬을 살리면서 자유로운 시형을 찾은 것이 특색이다. 현대시에서도 시조가 갖는 리듬·균형·감각을 지키면서, 산문식 장시와 극시 등을 실험했다. 산문집 〈시와 도자〉(1976), 시집 〈묵을 갈면서〉(1979)를 펴냈다.

전혁림
1916 경남 통영~ 2010. 5. 25 통영. 서양화가.
1933년 통영수산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1938년 재야전인 부산미술전에 처음 출품했으며 2년 뒤 일본화단을 둘러보고 귀국했다. 1950년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했다. 1952년 피난지 부산에서 첫 개인전을 여는 등 1950년대에는 부산과 마산 지역에서 주로 활동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회화 이외의 매체에도 관심을 보여 도예전·목조전을 열었다. 그는 반세기에 걸친 화력을 통해 추상과 구상의 경계영역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표현영역을 확대해왔다. 자유로운 구성과 형태, 향토성 짙은 색채의 초기 구상회화는 후기에 들어오면서 점차 추상화되었는데 단순화와 응집화를 통해 한국적 미감을 밀도 있게 표출해내고 있다. 1962년 부산시 문화상, 1984년 충무시 문화상을 받았으며, 1984년 국전 심사위원을 지냈다.
윤이상
1917. 9. 17 경남 통영~ 1995. 11. 3 독일 베를린.
재독 작곡가.
윤이상은 동양의 정신이 충만한 독특한 색채의 선율로 현대음악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생전에 '현존하는 현대음악의 5대 거장'으로 꼽혔다.시인 윤기현의 3대 독자로 태어나 어린시절을 통영에서 보냈다. 음악공부를 반대하는 아버지를 피해 17세에 일본으로 유학, 오사카[大阪] 음악원에서 첼로·음악이론·작곡 등을 배웠다. 1943년 무장독립운동을 하려다가 체포되었고 8·15해방 후 고아들을 보살피기도 했다. 1948년 통영여자고등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있었고 1953년 서울에 있는 여러 대학에서 강사로 있었다. 이즈음 가곡과 실내악을 발표하기 시작했는데, 1956년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 프랑스국립고등음악원에서 P. 르벨과 T. 오벵에게서 음악이론과 작곡을 배웠다.
1957년 8월 서베를린음악대학에서 R. 슈바르츠 쉴링, J. 루퍼에게서 음악이론을 배우고 B. 블라허에게서 작곡을 배웠다. 1959년 네덜란드 빌토벤에서 〈피아노를 위한 5개의 소품〉이, 다름슈타트 음악제에서 〈7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이 초연되어 열광적인 호응을 얻음으로써 그의 이름이 세계 음악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60년 서독 프라이부르크에서 중국·한국의 궁중음악에 대한 라디오 방송을 했고 1962년에는 관현악곡 〈바라 婆羅〉가 베를린 라디오 방송관현악단에 의해 초연되었다. 1963년 북한을 방문했고 1965년 서독 하노버에서 〈오 연꽃 속의 진주여!〉를 초연했다.
1967년 동베를린 간첩단사건으로 한국 중앙정보부는 그를 임의동행형식으로 귀국시켰으며 재판결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68, 1969년의 2번에 걸쳐 10년이 감형되었다가 동료음악가·교수들의 국제적 항의와 독일정부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감옥에서도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1967)을 작곡하고 그밖에 〈율〉·〈영상〉 등을 작곡했다. 1971년 서독 킬 문화상을 수상했고 독일국적도 취득했다. 1971년 8월 뮌헨 올림픽의 문화행사로 오페라 〈심청〉을 초연했고 1973에는 미국 애스펜 음악제에 작품을 발표했다. 1977년 서베를린예술대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1981년에는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광주여 영원히〉를 작곡했고, 1988년에는 일본 도쿄[東京]에서 민족합동음악축전을 제의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1990년 10월 북한을 방문해 분단 이후 최초로 범민족통일음악회를 주도해 남북한 문화교류의 첫장을 열었다. 늘 고국을 그리워했던 그는 복권이 이루어진 1994년 9월 서울·광주·부산에서 개최된 '윤이상음악제'와 '한국창작오페라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고국을 방문하려 했으나 정부와의 갈등으로 끝내 귀국하지 못했다. 그의 음악세계는 동양적 직관과 서양적 분석, 한국의 전통음악과 서양음악의 기법이 변증법적 긴장관계로 만나고 있다고 평가받았다.
그밖의 작품으로 〈낙양 洛暘〉(1961)·〈예악 禮樂〉·〈무악〉·〈무궁동 無窮動〉(1986)·〈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1987), 오페라 〈요정의 사랑〉(1969) 등이 있다. 1995년 5월에는 민주화를 위해 분신한 사람들을 추모하는 그의 마지막 교향시 〈화염에 휩싸인 천사와 에필로그〉가 일본에서 초연된 바 있다. 1955년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으며, 독일연방공화국 대공로훈장과 쿠세비츠키 음악재단상, 괴테메달, 튀빙겐대학교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지병인 당뇨병, 기관지천식, 신부전증이 악화되어 결국 그리던 고향땅을 밟지 못한 채 베를린에서 숨을 거두었다.

統營詩抄...이형권
가난한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소라처럼 휘감고 오르는 골목길과 먼 바다로 떠나는 낡은 배 한 척 그대 나를 부끄러이 생각하지 않으신다면 항구의 물구비 너머 붉은 동백꽃이 피는 겨울 통영에 한번 다녀가시지요.
첫사랑을 찾아 남쪽 바다를 찾아온 시인처럼 애끓는 그리움을 간직한 마음이어도 좋고 사는 일이 다 그렇지요 라고 생각하는 쓸쓸한 발길이어도 좋아요. 그대가 좋아하는 그윽한 로즈와인향처럼 우아한 시간을 준비할 수는 없지만 미농지 봉투 속에 담긴 오랜된 연서같은 나의 마음을 드릴 수 있으니 그대 정녕 나의 사랑을 미쁘이 생각하신다면 바람 불어 쓸쓸한 날 겨울 통영에 한번 다녀 가시지요
가난한 내가 그대에게 보여 드릴 수 있는 것은 미역줄기처럼 야윈 노래 한 곡조와 지난 시절의 남망산 기슭에 울려퍼지던 통영 오광대의 문둥이 춤처럼 서러운 몸짓뿐 그리웠던 물새 한 마리 노을빛 물든 미륵도 지나 한려수도로 날아가고 동피랑 골목길에 애처로운 가로등이 불을 밝힐 때 가난한 내가 그대에게 드릴 수 있는 것은 눈썹 같은 골목길 안쪽 서늘한 창가에서 한없이 기다리고 있는 그림자뿐 여황산 배꼽아래 명정샘이 마르기 전에 충렬사 돌담너머 떨어진 동백꽃이 시들어가기 전에 그대 올 겨울 통영에 한번 다녀가시지요.
2011.08.01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