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통영시

통영...벽방산 안정사

임병기(선과) 2011. 9. 28.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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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방산(碧芳山)을 바라보고 원효스님은 “의발(衣鉢)을 간직한 채 내세불(來世佛) 미륵을 기다리는 벽발산(碧鉢山)은 참으로 마땅한 절 터였으리라”라며 안정사를 창건하였다. 사람들은 벽방산의 바위들을 보고 석가모니부처님 십대 제자 중 한 사람인 가섭존자가 벽발(碧鉢·스님들의 밥그릇)을 받쳐 들고 있는 모습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또 용화사가 있는 미륵산과 마주한 벽발산은 석가모니부처님이 가섭존자를 통해 미륵불에게 의발을 전하는 모양이라고 한다.. 산내암자인 가섭암이 창건된 것도  모든 이야기를 담기 위해서다.

 

654년 원효 대사가 창건할 당시 14방(坊)의 규모를 갖춘 커다란 사찰이었다고 한다. 방(坊)이란 아마도 전각을 말하는 듯

하므로, 14동의 건물이 들어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뒤의 연혁은 자세하지 않은데, 고려시대에 와서 회월(會月) 스님이 중건하였다. 조선시대에서는 1592년(선조 25)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모든 전각이 불타 없어졌다가 1626년(인조 4)에 원민 대사가 중창하였다. 또 1736년(영조 12)에도 중창이 있었다. 특히 영조 임금 시대의 중창에는 왕실과 연관이 있었던 듯한데, 이것은 안정사에 전해 내려오는 금송패(禁松牌)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리고 18세기와 19세기 사이에 시왕전과 나한전을 중수하였고, 명등계(明燈稧)를 구성하였다. 또 불량계(佛粮稧)를 조직해서 사찰 경제를 활성화했고, 1908년(융희 2) 동종을 수리하고 괘불을 수리했다. 1930년대 초반에는 만해 한용운(韓龍雲) 스님의 주도로 비밀리에 조직된 만당(卍黨)의 핵심멤버 가운데 한 분인 정맹일(鄭孟逸) 스님이 안정사 주지로 있었다. 근래에는 1950년의 6.25전쟁으로 폐허가 되었으나 설호(雪虎) 스님이 중창하여 오늘에 이른다.

 

 

기운 종각. 보이는 범종은 최근에 조성하였다. 안쪽에 조선시대 동종이 보관되어 있다고 했지만 들어 갈 수도 없었다.

 


출처...문화재청

 

 

안정사 종각에 봉안된 이 작품은 원래 1580년(선조 13년)에 全羅道潭陽秋月山龍泉寺에 대종으로 제작된 것이다. 현재 만세루에 걸려있는『鎭南郡碧鉢山安靜寺大鐘緣記』현판에 따르면 이 동종은 총 1,000여 金을 주고 1908년 龍湫寺에서 구입하여 이안하였다고 한다. 동종에는 용천사라는 寺名이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근대에 기록된「太古寺法」에 따르면 용추사는 예전의 용천사로 담양군 용면 추월산에 있다고 기록하였으며, 1905년에는 崔益鉉이 용추사에서 의병을 궐기하였다는 기록도 남아 있어, 늦어도 1905년부터는 용천사에서 용추사로 사명이 변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동종은 전체높이가 115cm이고, 입지름이 68cm로 조선전기에 제작된 동종 가운데 대형에 속하는 예이다.

전체적으로 짙은 검은 빛이 감도는 동종은 둥글고 높게 솟은 天板위에 單龍과 音筒을 갖춘 鍾?가 있으며, 천판 아래에는 如意頭形의 입상화문대가 낮게 표현되었다. 鍾形은 外線이 천판 아래를 시작으로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종신 중단까지 내려오다가 종구로 가까워질수록 반대로 오므라지는 형태를 보이고 있어 시각적으로 항아리를 엎어 놓은 모습이다.

종신에는 다양한 圖案을 장엄하였는데, 종신 중간에 횡선을 기준으로 상ㆍ하로 구분할 수 있다. 상단에는 천판 아래로 넓고 긴 蓮瓣文을 부조하였으며, 그 아래로 4개의 연곽을 장식하였다. 蓮廓의 전체 형태는 사다리꼴이고, 蓮廓帶의 唐草文양옆으로는 聯珠文을 주회하여 장식적인 효과를 주었다. 그리고 그 내부에 만개된 9개의 蓮?를 표현하였다. 하단에는 4개의 撞座와 蓮花唐草文을 장엄하였는데, 이 가운데 당좌는 그 문양이 매우 아름다워 주목된다. 당좌는 ‘卍’자를 감싼 六字大明王 眞言이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그러나 제작자에 실수로 인해 ‘卍’자와 진언이 뒤집혀 주조되었다.

이 작품은 종신 상단 연곽 사이와 연곽 밑에 陽刻으로 제작연대와 봉안사찰을 기록하였다. 銘文을 통해 동종의 제작 장인이 戒堂, 眞玉, 文軒임을 알 수 있으며, 畵員이라는 직책과 俗姓을 기재하지 않은 점에서 이들의 신분을 僧匠으로 파악할 수 있다. 

 

대웅전과 마주한 자리에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에 맞배지붕인 만세루(萬歲樓)가 있다. 만세루는 1686년(숙종 12)에 처음 지어졌고 1841년(헌종 7) 중수되었는데, 조선시대 후기의 사찰 누각 양식을 잘 갖추고 있어 현재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145호로 지정되어 있다. 창건 당시에는 앞면이 5칸이었는데 중수하면서 지금의 규모로 고쳐졌다. 2층으로 되어 있으며, 1층에는 별다른 시설 없이 빈 공간으로 남아 있다. 건축 양식을 보면 익공식이다.

 

 

 

만세루 전면. 현재는 누하진입도 금지되었으며 다른 전각처럼 금당 중정에서 보면 단층 건물로 진입동선에서 벗어나 있다.

 

 

무슨 인연을 지었을까?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가 1751년(영조 27)에 중건되었다. 그 뒤 몇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조선시대 후기의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어서 현재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80호로 지정되어 있다. 건물 앞면 지붕 아래에 걸려 있는 '大雄殿'편액 역시 조선시대 후기에 쓴 글씨다.

 

 

석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가 협시한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안정사 대웅전은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로, 지붕은 팔작지붕집이다.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 건물이며, 기둥 사이에는 각각 2구의 포를 배치하였다.

 


괘불...출처/문화재청

 

안정사 영산회괘불도는 1702년 廣欽이 수화승을 맡아 弘特, 覺還과 함께 제작하였고, 1934년 戒弘이 중수하였다. 높이 943.3cm, 너비 732cm 크기의 총화면은 폭 60여cm의 삼베 13포를 이어 제작하였다. 중앙에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취한 석가모니를 묘사하였으며, 화기에 ‘靈山會掛佛幀’임을 명시하였다.

화면의 구성은 중앙에 석가모니불과 문수, 보현보살의 삼존입상을 가득차게 배치하고, 석가모니불의 두광 좌우에 다보불과 아미타불을 그리고 불제자 아난과 가섭을 작게 그려 넣었다. 이러한 구성은 1661년 간행된 『五種梵音集』의 靈山作法에 봉청되는 불보살을 표현한 것으로 조선후기 괘불도에 주로 표현된 형식 가운데 하나이다. 1700년 제작한 내소사 영산회괘불도(보물 제1268호)이 형식을 표현한 시대가 가장 이른 괘불이며, 동일 도상으로 1722년 청곡사 영산회괘불도(국보 제302호), 1730년 운흥사 괘불도(보물 제1317호), 1745년 다보사 괘불도(보물 제1343호), 1749년 개암사 영산회괘불도(보물 제1269호), 1764년 대흥사 영산회괘불도(보물 제1552호) 등이 있다. 이 중 대흥사 영산회괘불탱을 제외한 4폭의 괘불은 義謙이 수화승을 맡아 제작하였다. 안정사 영산회괘불도를 제작한 廣欽은 義謙이 운흥사에서 1719년 불화를 조성할 때 화원으로 동참하였고, 운흥사에서 1730년 불화를 조성할 때에는 ‘時住持’ 즉 운흥사의 주지를 역임하였다. 이를 통해 볼 때 廣欽 과 義謙은 동일 화승군에 속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안정사 괘불도는 현재 화면 꺾임 현상과 부분적인 채색의 박락, 습기로 인한 오염이 확인되나, 전체적인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괘불도를 보관한 괘불함은 괘불도의 제작과 동시기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연...출처/문화재청

 

 연이란 왕이 거동할 때 타고 다니던 가마로서 불교의식에 사용되기도 하였다. 가마에는 연과 여(輿)가 있는데 연은 임금이 타는 것으로, 수레를 달아 말이 끌게 하거나 사람이 메기도 한다. 여는 보통사람이 타는 것으로, 사람이 어깨에 매는 것을 말한다. 절에 있는 가마는 사람이 타는 것이 아니라, 큰 불교행사 때 불상을 옮기거나 절 도구, 불경 등 소중한 물품을 운반할 때 사용한 것이다.

안정사 가마는 길이 300㎝, 높이 130㎝로 조선 영조 28년(1752)에 영조의 후궁인 영빈 이씨가 안정사 주지에게 절 주변 숲을 관리하라는 명을 내린 문서와 금송패를 함께 보내었다.

 

금송패...출처/문화재청
 
금송패는 왕실이 보낸 산림 감시원의 신분증으로, 안정사에는 지름이 11㎝인 <안정사국내금송패 (安靜寺局內禁松牌)>와 지름이 10㎝, 8㎝인 <안정사금송패 (安靜寺禁松牌)>라 새긴 3개의 금송패가 전해진다.

 

 

칠성각. 규모가 크다.

 

명부전 지장보살

나한전

 

안정사 나한전에는 석가삼존상을 중심으로 16나한상, 천부상, 사자상이 양측으로 1구씩 봉안되어 있다. 석가삼존상은 불신 전체에 호분이 칠해져 있으며, 16나한상과 권속들은 흰색, 군청, 녹색, 자주 등 다양한 섹으로 법의를 채색했다. 특히 좌측 5,6번째 나한상은 다른 상들과 달리 목조로 제작되었는데 얼굴이나 법의 표현 등이 석조 나한상과 닮아 보이나 양식적으로 차이를 보여 후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나한전 불상은 외형적으로는 파손이나 결손이 없어 보였으나 불상 바닥을 조사한 결과 우측 2번째 나한상을 제외하고는 복장공이 훼손되어 모두 열려 있었고, 복장물도 도난당한 상태였다. 다행스럽게도 좌측 3번째 나한상에서는 일부 빼내지 못한 복장발원문 일부와 후령통, 경전인쇄물 일부가 남아 있어 이를 통해 불상의 조성연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외 양측 협시상이 앉은 이중대좌의 하좌대도 도난당해 상대좌만 남아 있었으며, 삼존상 모두 연화좌 상면에 묵서로 적은 중수의 기록이 남아 있었다.

 

 

양측으로 각각 8구씩 나누어 봉안된 나한상은 모두 민머리형이며, 녹색, 자주색, 백색 등으로 채색된 장삼과 가사를 입었다. 조금씩 규모나 자세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지만 전체적인 수법은 유사한데, 결가부좌하여 앉은 나한들도 있지만 불자라든지 경전, 거북이나 경책 등의 지물을 들어 다양한 모습으로 그들의 개성을 드러내었다. 다만 좌측 5번째와 6번째 나한상은 목조로 석조 나한상들과 외형이 닮아 있으나 어깨가 좁고 무릎이 높은 신체의 비례, 다소 경직된 얼굴 등 양식적으로 차이가 있어 이 2구의 상들은 이후에 후보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좌측 3번째 나한상에서 발견된 복장발원문을 보면, 봉안처나 시주자 등의 내용을 생략하고 간략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康熙二十年(1681)에 조성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삼존상이 앉아 있는 연화대좌 상면에는 묵서로 乾隆二十四年 己卯(1759)에 나한전과 명부전 불상을 중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2011.08.02

한국전통사찰관광정보.문화재청 자료를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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