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구례군

구례...지리산 천은사

임병기(선과) 2011. 9. 13.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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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은사는 신라 때 창건된 고찰이다. 신라 중기인 828년(흥덕왕3)에 인도의 덕운(德雲) 스님이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와 명산을 두루 살피던 중 지리산에 들어와 천은사를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천은사 중건 당시 지어진 극락보전 상량문에 의하면 창건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당 희종 건부2년(875년)에 연기(도선국사)가 가람을 창건하였고 후에 덕운이 증수하였다(唐 僖宗 乾符二載 緣起相形而建設 德雲因勢而增修.....)."

 

천은사는 덕운(德雲)이 창건했는데 앞뜰에 있는 샘물을 마시면 정신이 맑아진다고 하여 감로사(甘露寺)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 뒤 875년(헌강왕 1) 도선이 중건했으며, 고려 충렬왕 때에는 남방제일선찰로 승격되었다. 정유재란으로 말미암아 사찰이 불에 타버리자 1610년(광해군 2) 혜정선사(惠淨禪師)가 중창하였다. 1679년(숙종 4) 조유선사(祖裕先師)가 중건하였다. 1715년(숙종 41) 혜암선사가 사찰을 중건하였는데, 현존하는 건물은 대부분 이때의 것이라고 한다.

 

천은사 일주문

 

천은사는 서너차례 답사했지만 관음전 앞에 삼층탑이 있다는 자료를 접하고 이번 동선에 포함시켰다. 하지만 석탑은 도난당했는지 자리에 없었으며 동종도 볼 수 없었다.

 

부도전

 

일주문 현판. 원교 이광사의 필체로 특이하게 세로 글씨로 재미나는 설화가 전해오는 이른바 비보책이다. 지금도 고요한 새벽 일주문 기둥에 귀를 기우리면 글씨에서 물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믿지못할 사람은 직접 체험해보길 바란다 ㅎㅎ

 

절이름이 바뀐 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단유선사가 절을 중수할 무렵 절의 샘가에 큰 구렁이가 자주 나타나 사람들을 무서움에 떨게 하였으므로 이에 한 스님이 용기를 내어 잡아 죽였으나 그 이후로는 샘에서 물이 솟지 않았다. 그래서‘샘이 숨었다’는 뜻으로 천은사라는 이름이 붙였다고 한다. 그런데 절 이름을 바꾸고 가람을 크게 중창은 했지만 절에는 여러 차례 화재가 발생하는 등의 불상사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마을사람들은 입을 모아 절의 수기(水氣)를 지켜주던 이무기가 죽은 탓이라 하였다.

 

얼마 뒤 조선의 4대 명필가의 한 사람인 원교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절에 들렀다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자 이광사는 마치 물이 흘러 떨어질 듯 한 필체로‘지리산 천은사’라는 글씨를 써 주면서 이 글씨를 현판으로 일주문에 걸면 다시는 화재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사람들은 의아해 하면서도 그대로 따랐더니 신기하게도 이후로는 화재가 일지 않았다고 한다.

 

 

일주문 담장. 절집 일주문에 담장이 있는 경우는 거의 유일무이한 사례다. 이는 화기에 약한 천은사의 비보책으로 수기水氣가 빠져 나가는 것을 예방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보여진다.

 

 

수홍이란 무지개가 드리워져 있다는 의미로 수홍루는 다리위에 지어진 누각으로 편액은 염재 송태회의 글이다. 정면 1칸, 측면 한칸인 2층 누각으로 조선후기에 만들어졌다. 선암사 강선루처럼 계곡과 어우러진 누각은 마치 저쪽은 피안의 세계인듯한 착각에 젖게한다.

 

수홍루를 지나면 위로 오르는 계단 위의 정면 3칸, 옆면 2칸의 천왕문

 

 

천은사 홈페이지 전각안내에는 비파를 든 북방다문 천왕, 칼을 든 서방 광목 천왕으로 설명되어 있으나 서방은 동방지국천왕의 오기로 보인다.

 

 

용을 잡고 있는 동방 지국천왕. 탑을 든 남방 증장천왕으로 홈페이지에는 설명되어 있지만 각각 남방과 서방의 오기로 생각된다.

보제루.범종각

 

천왕문을 지나 마당으로 나가면 정면으로 2층으로 지어진 누각이 당당하게 서 있는 보제루의 모습이 보인다. 보제루란 대중의 법요식 집회소로 사용하는 건물이다. 이 건물은 후면만 중이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래부터 누하 진입을 염두에 두지 않은 건물인지 중수하면서 누하 공간을 활용하기 위해 우회동선을 두었는지 궁금하다.

 

 

보제루의 구조는 막돌초석위에 원통형(일부는 배흘림) 두리기둥을 세운 5량가 이며, 공포는 행공첨차를 두어 외목도리를 받게 한 2익공식이다. 공포 역시 연봉조각이 올려져 있는 등 화려하다. 강당형식으로 내부는 우물마루를 깐 대청형식으로 꾸몄다. 대웅전 앞 한단 낮은 터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웅전 쪽 창문은 7칸 모두 큰 두짝의 빗살문을 달고 그 반대쪽 5칸은 널판지문을 달았으며 좌우 양칸은 문을 생략하였다.

 

 

보제루. 창암 이삼만의 글이다.스스로 학문,교육, 저술 세가지가 늦어 이름을 삼만三晩이라고 개명했다고 한다

창암 이삼만(1770년 -1847년)은 호남 제일의 대서예가로 충청도 추사. 평안도 눌인 조광진과 더불어 조선후기 3대 명필로 곱힌다. 정읍시 부전면 부무골에서 태어나고 학예에 정진하다 중국에까지 명필임이 알려지자 50세를 전후해서 전주 교동으로 옮겨 후학양성과 학문, 서예로 조선 팔도의 명필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친다. 만년에는 완주군 상관면 죽림리 공기골에 이거하여 평생 청빈하게 살다 78세를 일기로 서거하여 현 완주군 구이면 평촌리 하척마을 선산 유택에 그의 무덤이 있다.

 

 

요사채의 승회당 편액 역시 창암의 글이다.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창암보다 16년후에 태어나 , 추사가 유배가는 길에 일부러 창암을 찾아 뵙고,당시 추사는 55세, 창암은 71세로 전주의 한벽당에서 운필로써 서로 화답하는 가운데 "과연 소문대로 명필이시군요.(名不虛傳)"라고 감탄했으며, 추사가 제주도 유배가 끝나고 서울로 돌아가는 도중에 다시 한 번 창암을 뵙고자 했으나 이미 고인이 되었기에 큰 슬픔을 참고 창암의 묘비와 비문을 지어주어 현재 묘비 앞면의 '명필창암완산이공삼만지묘'만 남아 있고 뒷면의음기는 새겨져 있지 않다.

 

 

염재念齋 송태회의 글씨이다.

자 평숙(). 호 염재().  화순() 출생. 1888년 진사, 1900년 박사시()를 거쳐 성균관에서 수업하였다. 1901∼1907년 중국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귀국, 1908∼1910년 대한매일신보 기자로 활약하였으며, 국권피탈 이후는 육영에 뜻을 품고 낙향하여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1918년 고창군에에 오산고보()를 설립, 학생들에게 민족사상을 고취하였는데, 이 학교는 고창고보로 개칭된 후에도 민족교육적 학풍 때문에 타지방의 뜻있는 학도들이 많이 전입해와 학생운동 본거지가 되었다. 서예와 그림에도 뛰어났는데, 순천 송광사 등 곳곳에 글씨 및 그림이 남아 있다. 

 

 

극락보전은 1774년 혜암선사가 중수하면서 세운 전각으로서 조선 중기 이후의 전통적 다포계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현재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50호로 지정되어있다. 높직한 방형의 장대석으로 기단을 마련하고 그 위에 민흘림의 둥근 기둥을 올렸다. 전체적으로 아담하면서도 장엄한 느낌을 준다.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며 민흘림이 있는 두리기둥을 세우고 그 위로는 창방과 평방을 걸고 공포를 구성하였는데 포작은 외 3출목, 내 4출목의 다포양식으로 상부에는 계두와 연봉이 붙어 있고 중앙칸 기둥 위로는 봉두장식이 있는 등 전반적으로 화려하다. 주간포(柱間包)는 각 간 모두에 2구씩 배치하였다. 가구는 5양구조로서 종량 위로는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다. 창호는 정면 3간 모두 3분합문으로 중앙칸은 소슬빗꽃살, 양 협간은 정자살과 빗살(중앙부)양식으로 되어 있다.

 

눈에 익은 서체 아닌가?  해남 대흥사 강진 백련사 고창 선운사 부안 내소사 답사시에도 보았을  원교 이광사의 동국진체 필체이다.    "이광사(李匡師1705~1777)의 자는 도보(道甫), 호는 원교(圓嶠) 수북(壽北)이다. 실증 적 역사서인 <연려실기술>의 저자 이긍익은 원교 의 큰아들이다. 그의 집안은 왕실의 후손으로 대 대로 고관을 배출한 벌족이었으나 소론의 핵심 집 안인 탓에 영조 때 노론정권에 밀려 부친과 백부 가 유배되는 등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원교 23 세 되던 해, 유배지에서 돌아온 부친이 병사하고 26세 되던 해에는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연루된 백부가 옥사하자 원교는 관계로의 진출을 포기하 고 학문과 서화에 침잠한다. 원교는 51세에 나주괘서사건에 연루되어 국문 (鞫問)을 받게 되자, 부인 유씨는 남편이 참형을 받을 것이라는 소문에 목을 매 자결을 했다.

그러나 원교는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되었고, 유배된 지 8년째인 영조 38년(1762)에 전라도 진도로 이배된다. 이후 다시 완도 신지도로 이배되어 15 년을 살다가 1777년 8월, 총 23년의 길고 긴 유배생활 끝에 일생을 마친다. 원교란 호는 1737년에 그가 서울 동그재(원교)근처에서 살았 을 때 지명을 따서 붙인 호이고, 신지도에서는 수북이란 호를 사용하면서 둘째아들 영익과 함경도 유배살이 때 낳은 주애(珠愛)란 이름의 서녀(庶女) 와 같이 살았다고 한다."...박덕준의 서예이야기 

 

동국진체

조선후기 동국진풍(東國眞風)이라고 할 수 있는 시대사조는 서예에도 영향을 미쳐 제일 먼저 양송체(兩宋體)와 미수체(眉·體)를 출현시켰다. 양송(兩宋)은 율곡학파의 적통을 이은 우암 송시열(1607~1689)와 동춘당 송준길(1606~1672)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들은 웅대하고 힘차며 장엄하고 정중한 무게를 더하고 있다. 한편, 탈주자학파인 미수 허목(1595~1682)은 주자 이전의 유학을 지향한 것처럼 서법(書法) 또한 삼대(三代) 문자로의 복고를 신념으로 하여 진위를 가리지 않고 고전체(古篆體)의 특징을 취하여 기이하고 옛스러운 서체를 이룩하였다.

 

허목의 서체는 그에게 배운 옥동 이서(1662~1723)에게 영향을 미친 듯한데, 이서는 「필결」을 지어 조선서예사상 최초로 서론(書論)을 남긴 서예이론가로서 그의 서예이론은 서(書)의 본질을 철저하게 『주역(周易)』의 이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서의 서체를 세상에서는 동국진체라 불렀는데 이 동국진체는 공재 윤두서(1668~1715)에게 전해졌고 다시 백하 윤순(1680~1741)에게 전해졌는데, 윤순은 이론적으로는 이서의 왕희지 유일주의의 논리를 벗어나 보다 높은 차원에서 이를 정비하고 서체 자체도 김생(711~791) 이래 우리나라의 대가들의 서체를 소화하여 왕희지체로 절충·흡수함으로써 큰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동국진체는 백하 윤순의 제자인 원교 이광사(1705~1777)에 의하여 집대성되었는데, 위부인(衛夫人)과 왕희지의 글로 되어있는 「필진도(筆陣圖)」를 기본으로 삼고 옥동 이서의 「필결」을 본받아 훨씬 더 방대한 체제를 갖춘 「원교필결」전후 양편을 지어 동국진체의 이론적 체계를 발전적으로 정비하였다.

창살

 

극락전 삼존불. 본존 아미타여래, 좌협시 관세음보살, 우협시 대세지보살 삼존불은  목재이며 조성연대는 혜암(惠庵)선사가 6창(六創)을 한 1774년(영조 50) 전후, 즉 18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다만 의심스러운 것은 본존불이 양협시불 보다 좌상의 높이가 낮은 것이며 또 극락전 규모에 비해 3존불의 규모가 너무 왜소한 느낌이 든다. 그렇다면 당초 극락전 6창 복원 시에 봉안한 것이 아니고 다른 곳에서 옮겨온 불상으로 추정된단고 한다.

 

 

아마타여래. 정상에 작은 육계와 나발의 머리, 이마위로는 계주가 보인다. 얼굴은 계란형의 원만상이나 약간 경직되어 있으며 백호 밑으로 내려오는 콧날이 우뚝 솟아있다. 목에는 삼도가 보이고 법의는 통견인데 U자형으로 내려온 의문의 중아에 일자형의 속내의가 드러나 보인다. 수인은 중지와 엄지를 모은 중품하생인을 결했으며 무릎은 오른발이 왼발 위로 올라오는 길상좌를 취했다.

 

좌협시불인 관세음보살은 머리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상호나 U자형의 천의자락 등, 그 기법이 유사하다. 우협시불인 대세지보살도 그 양식이나 조각기법은 좌협시와 비슷하다.

 

불단 아미타 탱. 보물 제 924호로 지정된 이 탱화는 삼베바탕에 진한 채색을 사용하여 제작한 것으로 1776년에 제작되었다. 화면은 중앙의 사각대좌 위에 앉은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8대보살과 사천왕·8대 제자·두화불 등이 둥글게 배열되어 있다. 각각의 불보살들에는 광배의 한쪽에 붉은색의 사각형 칸을 만들어 흰 글씨로 그 명칭을 적고 있어서 아미타불화의 연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중앙의 본존은 화려한 금색 꽃무늬 단이 대진 붉은색 가사를 입고 있는데 가사에는 금색무늬가 일정하게 그려져 있다. 얼굴은 넓고 눈은 가늘며 입은 작고 입 주변과 턱에 수염이 표현되어 있다. 머리는 나발로 육계가 적고 중간에 초승달 같은 중간계주가 표시되어 있다. 이러한 얼굴의 묘사는 다른 보살상 들에서도 거의 흡사하게 나타나고 있다. 부처는 여러 색선의 원형 두광과 신광을 지니고 있는데 두광은 진한 녹색으로 처리하고 신광은 밝은 녹색을 사용하고 있다.

 

화기 내용을 보면 1776년 8월 남원 천은사 대법당에 미타회(彌陀會)를 조성하여 봉안한다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이 불화는 분명한 아미타불탱화임을 알 수 있다. 그 다음에는 주상전하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고 아울러 대시주질(大施主秩)을 만들어 36명에 이르는 4명의 비구와 일반 신도들의 시주를 받고 있다. 이어서 연화질(緣化秩)에는 이 불화를 그릴 때 염불을 한 4명의 비구와 완성후 이 불화를 증명한 3명의 승려들의 이름을 열기하고 있는데, 이 연화질에서 주목되는 점은 이 불화를 그린 화사들을 명기한 곳이다. 화사를 보통 금어(金魚)라고 하는데 금어로서 신암(信庵) 등 40명이 참가하고 있는데 고려불화와 달리 많은 화사들일 공동제작하였다는 점이다. 향좌의 불기란을 보면 50명 가량의 또 다른 시주자들과 승려 명단이 나열되고 맨 끝부분에는“이 공덕이 누구에게나 두루 미쳐 모든 중생이 다 함께 불도(佛道)를 이루기를 기원합니다.”라고 끝맺음을 하고 있다.  

 

극락전 향우측 벽에 봉안된 삼장탱(三藏幀畵)는 극락전 아미타후불탱화와 제작년대가 같은 1776년의 작품이다. 천장회상(天藏會上), 지지회상(持地會上), 지장회상(地藏會上)의 장면이 한 화면에 그려져 있는데, 각 보살들은 중앙에 위치하고 각각의 권속들이 보살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하단에는 불화기와 각 회상의 성중명호(成衆名號)가 적혀져 있다.

 

 

극락보전의 왼쪽에 신중탱화의 일종인 제석천룡도가 봉안되어 있으며 크기는 세로 165㎝, 가로119㎝이다. 그림의 내용은 화엄신중(華嚴神衆)과 천룡(天龍)을 비단 바탕에 그렸는데, 화기에 따르면 1833년(순조33) 5월에 지리산 칠불사(七佛寺)에서 천여(天如), 정상(定相), 우찬(禹贊), 익찬(益贊) 금어스님등이 조성하여 천은사 대법당에 봉안한 것이다.

 

우물천정

우물천정

 

극락보전 불단 양쪽 기둥. 기둥을 타고 내려오는 동물??? 역시 화기에 약한 천은사의 비보책으로 조성한 수달이다. 물에 사는 수달을 조각하여 물을 상징하고 있다.

 

 

반대편 기둥의 동물. 해태상으로 수달과 같은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극락전 후불벽 뒷면에 그려진 백의관음도는 벽의 양 기둥 사이와 불단 하단부에서부터 천정밑에 이르는 전면을 차지하고 있는데 토벽 위에 채색으로 그려져 있다. 백의를 입고 넓은 바위 위에 앉아 오른쪽으로 솟아오른 바위에 몸을 비틀어 기대고 있는 관음은 높은 보관을 지니고 있으며, 그 위에 화불이 그려져 있다. 자애로운 눈빛으로 앞쪽 선재동자를 바라보고 있는 관음은 검정색 단이 대진 천의가 보관 위에서부터 걸쳐져 내리고, 붉은색 단이 대진 내의는 가스에서 띠 매듭으로 묶여 있다. 천의도 안쪽 면이 비치는 곳은 붉은색이 진한색과 연한색의 요철을 이루고 있다. 신광은 없고 두광은 거의 바탕색과 유사한 초록색의 원형이다.

 

 

관음보살이 기대앉은 바위의 반반한 끝에는 버들가지가 꽂힌 정병이 놓여 있고 그 정병 아래쪽 바위 위에 두팔을 앞으로 벌리고 옷자락을 휘날리며 서있는 선재동자가 그려져 있으며 선재동자의 머리위에는 붉은 머리의 흰색 새가 날아가고 있다. 화면의 왼쪽 상단에는 5개의 산이 구름상이에 떠있고 그 아래쪽으로는 바위계곡을 따라 흐르는 폭포가 두 줄기 내려오고 있으며, 폭포에서 내려온 물과 넘실거리는 바닷 물결이 부딪쳐 커다란 파도를 이루고 있다. 왼쪽 하단에 난 넓은 언덕에 손을 앞으로 모은 인물상이 백의관음을 올려보고 있다. 오른쪽 상단에는 겹겹이 쌓인 바위 언덕 위에 다섯 그루의 대나무가 천정 밑까지 뻗어 올라 구름 속에 이르고 있다.

 


천은사 괘불...문화재청

 

천은사에 있는 이 괘불의 크기는 길이 894㎝, 폭 567㎝로, 거대한 화면에 꽉 차게 정면을 향하여 서 있는 석가의 모습을 그렸다. 조선 현종 14년(1673)에 경심·지감·능성 등의 화원이 그린 이 괘불은 단독상으로 괴체적인 형태, 항토색이 강한 독특한 채색, 필선, 문양 등에서 17세기 후반의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천은사 불감...문화재청

 

불상을 모시기 위해 나무나 돌, 쇠 등을 깎아 일반적인 건축물보다 작은 규모로 만든 공간을 불감(佛龕)이라 한다. 불감은 그 안에 모셔진 불상의 양식뿐만 아니라, 당시의 건축 양식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43.3㎝ 높이의 금동불감으로 정면 전체를 여닫이식 문으로 구성하여 예배나 의식 때만 열어서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좌우 문 안쪽면에 칼을 든 인왕상이 1구씩 돋을새김되어 있는데 정교하고 생동감 있게 표현되었다. 정면 벽에는 중앙에 비로자나삼존상과 주위에 10대 제자상을 돋을새김하였다.

비로자나불상은 전형적인 8각의 연꽃무늬 대좌 위에 앉아 있다. 손은 양 손을 가슴에 올리고 왼손 검지손가락을 오른손이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당시의 비로자나불이 일반적으로 취하는 손모양이다. 얼굴이나 신체는 단아하며 대좌는 비교적 정교한 편이어서 격조 높은 조각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좌우 벽에는 꽃무늬들이 화려하게 새겨져 있고, 천장에도 여러 무늬가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어 화려하고 장엄한 부처님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입구 문을 열면 좌우에 금동불 2구가 모셔져 있는데, 위로 향한 연꽃무늬와 엎어놓은 연꽃무늬로만 구성된 고려말 조선초의 전형적인 대좌 위에 앉은 같은 수법의 불상이다. 얼굴이나 신체는 단아하지만 다소 경직된 표현이 나타나고 있다. 벽면에 돋을새김한 불상들은 비교적 얼굴의 형태나 옷주름의 묘사가 유연하고, 꽃무늬 같은 무늬가 화려할 뿐만 아니라, 인왕상의 힘차고 발랄한 표현 등은 이 불감이 뛰어난 작품임을 보여준다.

흔히 나옹화상의 원불(願佛)로 알려져 있으며, 불감 뒷면에 불상은 신승, 불감은 김치, 박어산 등이 만들었고, 박씨 부부가 시주하였으며, 신음 등 네 승려가 참여하였다는 내용의 기록이 있어 흥미를 높여 주고 있다. 이 불감은 삼신불과 삼세불의 도상이 융합되어 도상적으로 매우 의미 있을 뿐만 아니라 여말선초의 조각, 회화, 금속공예, 건축양식, 문양 등을 알려주는 매우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되어 전라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9호에서 2008년 3월 보물로 승격지정되었다.

 

천은사 보리수 나무. 천은사 주변에는 오래된 보리수 나무가 분포하였으나 현재 고사하고 극락보전 옆의 수령 200여년된 이나무가 가장 고목이라고 한다. 천은사 보리수 열매는 다른 보리수 나무 열매와 달리 둥글고 색이 고우며 가벼워 스님들과 불자들에게 인기가 있다고 한다.

 

보리수나무...자연박물관

키는 3m 정도이고, 어린가지는 은백색을 띠며 가시가 달려 있다. 잎은 타원형으로 어긋나고 잎에 은백색의 비늘처럼 생긴 털이 있으며 잎가장자리는 밋밋하다. 5~6월에 흰색 또는 연한 노란색의 꽃이 잎겨드랑이에 1~7송이씩 무리져 핀다. 꽃잎은 없고 꽃받침이 종(鍾) 모양으로 자라 꽃부리를 이루는데 꽃부리 끝은 4갈래로 나누어져 있다. 수술 4개는 꽃부리에 달라붙어 있으며 암술은 1개이다. 열매는 10월에 붉은색의 장과(漿果)로 익으며 날것으로 먹는다.

 

이밖에 한국에서 보리수나무라고 부르는 식물로는 불교에서 말하는 보리수, 슈베르트의 가곡에도 나오며 열매로 염주를 만드는 보리자나무(Tillia miqueliana)가 있다. 그러나 이 가곡에 나오는 보리수는 '린덴바움'(Lindenbaum)으로 보리수나무 종류가 아니라 피나무류 식물이다. 피나무 종류에는염주나무와 중국에서 불교와 함께 들어온 나무로 알려진 보리자나무가 있다. 그런데 가곡의 린덴바움을 우리말로 옮기면서 불교의 보리수와 혼동하여 잘못 옮긴 것이라 여겨진다. 한국에서 자라는 보리수나무는 키가 작은 관목으로 노래 가사에서처럼 나무 그늘 밑에서 단꿈을 꾸기에는 적당하지 않다.

 

보리자나무가 절에서는 흔히 보리수나무로 불린다. 이는 피나무과(Tiliaceae)에 속하는 낙엽교목으로 키는 10m 정도이다. 잎은 심장형으로 잎끝이 뾰족하며 잎의 기부는 조금 파여 있다. 잎에는 회백색의 별 모양의 잔털이 있고, 연한 노란색의 꽃은 이른 여름에 취산(聚繖)꽃차례를 이루며 핀다. 꽃자루에 커다란 포(苞)가 달려 열매가 익을 때까지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다. 열매는 구형의 핵과(核果)로 익는다. 중국 원산으로 한국에는 불교와 함께 들어온 것으로 알려질 뿐, 언제부터 심기 시작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석가가 그 밑에서 해탈한 나무라 해 절에서 주로 많이 심고 있으나, 불교에서 말하는 보리수와는 다른 나무이다. 석가와 관련된 보리수는 보오나무이다. 이 나무는 인도의 가야산(伽倻山)에서 자라는 나무로 사유수(思惟樹) 또는 인도보리수라고도 부른다. 보오나무는 상록교목으로 키가 30m에 이르며 잎 기부가 꼬리처럼 길게 자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명부전 목조지장보살. 천의는 통견으로 두어깨를 덥고 있다. 의문은 가슴앞에서 U자형으로 내려오다 무릎 위에서 멎어 있고 군의자락은 결가부좌를 한 무릎밑을 감고돌아 파상문을 이루고 있다. 수인은 구품수인을 결하고 있다. 조성시기는 조선시대 후기로 알려져 있다.

 

 

첨성각瞻星閣(?). 선방인 듯한데 왜 첨성일가?

 

 

첨성이란 별을 살핀다는 뜻으로 시자(侍者)가 이곳에서 절의 대중들에게 시간을 알려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불가에서 별을 본다는 것은 곧 깨달음을 이룬다는 말과 상통하므로 이를 상징하기도 한다.

 

 

극락보전 뒷쪽 전각. 삼성전 관음전 팔상전 응진전. 저 바위에 삼층석탑은 어디로 갔을까?

 

팔상전

 

* 도솔래의상(도솔에서 내려오는 장면) : 석가모니부처님이 호명보살로 도솔천에 머물다가 마침내 사바세계로 출현하게 되자, 카필라국의 정반왕과 마야왕비의 태자로 탄생하여 도솔에서 내려오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여기에는 흰코끼리를 탄 호명보살이 오른쪽 옆구리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있는 마야부인의 모습, 상(相)을 잘 보는 바라문에게서 꿈의 해몽을 듣는 왕과 왕비의 모습 등이 주 내용으로 묘사된다. 이 때 바라문이 이르기를 “반드시 태자를 잉태할 것이며 훗날 출가를 하면 정각을 이루어 삼계중생을 제도할 것”이라 하였다 한다.

 

 

* 비람강생상(룸비니 동산에서 탄생하는 장면) : 여기에서는 부처님의 탄생과 관련된 장면들이 묘사되고 있다. 따뜻한 봄날에 마야부인이 궁중을 떠나 궁녀들과 룸비니 동산에 올라 무우수(無憂樹) 꽃가지를 붙들고 서서 오른쪽 옆구리로 태자를 낳는 장면, 하늘에서 제석천왕이 비단을 가지고 내려와 태자를 받으며 모든 천왕들이 온갖 보물을 공양하는 장면, 태자가 땅에서 솟아오른 연꽃을 밟고 일곱 걸음을 움직이며 한손은 하늘을 또 한 손은 땅을 가리키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외치는 장면, 아홉마리의 용이 깨끗한 물을 토하여 태자를 목욕시키는 장면, 태자를 가마에 태워 궁궐로 돌아오는 장면, 아지타 선인을 불러 관상을 보이는 장면 등이 묘사된다.

 

 

* 사문유관상(四門밖에 나가 관찰하는 장면) : 태자가 사방의 문으로 나가서 중생들의 고통을 관찰하고 인생무상을 느끼는 장면이 네 가지로 묘사된다. 동문으로 나가서는 노인을 보고 사색하는 장면, 남문 밖에서는 병자를 보고 인생무상을 느끼는 장면, 서문으로 나가서는 장례행상을 보고 죽음을 절감하는 장면, 북문 밖에서는 사문을 보고 깨달아 출가를 결심하는 장면 등이 표현되고 있다.

 

 

* 유성출가상(성을 넘어 출가하는 장면) : 태자가 정반왕의 반대를 무릅쓰고 성을 넘어 출가하는 장면들이 묘사되고 있다. 태자를 감시하던 야수부인과 시녀 그리고 오백 장사들이 잠에 취해 있는 장면, 태자가 마부 차익에게 궁성을 뛰어 넘을 것을 지시하는 장면, 말을 탄 태자가 성을 뛰어 넘으니 제석천이 호위를 하며 하늘에 오색광명이 환하게 비치는 장면, 머리카락을 자른 태자가 사냥꾼의 옷과 자신의 비단도포를 바꾸어 입는 장면, 마부 차익이 태자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눈물을 흘리며 태자의 금관과 용포를 가지고 궁궐로 돌아가는 장면, 정반왕과 마야부인 그리고 태자비가 태자의 의관을 받고 슬피우는 장면 등이 주로 묘사된다.

 

 

* 설산수도상(설산에서 수도하는 장면) : 설산에 들어간 태자가 대신들을 보내어 환궁을 종용하는 정반왕의 권청을 물리치고 신선들과 함께 수도에 정진하는 장면들이 묘사되고 있다. 정반왕이 교진여(橋陣如) 등 5인의 신하를 보내어 태자를 환궁하게 하는 장면, 이들이 태자에게 돌아가기를 간청하는 장면, 환궁을 거절한 태자에게 궁중에서 양식을 실어 보내는 장면, 6년 고행의 무상함을 깨우친 태자에게 목녀(牧女)가 유미죽을 바치는 장면, 제석천왕이 못을 만들어 목욕을 하게 하고 천인이 가사를 공양하는 장면, 태자가 수도하면서 모든 스승을 찾는 장면, 풀베는 천인에게서 길상초를 보시받는 장면 등의 많은 내용이 그려지고 있다.

 

 

* 수하항마상(보리수 아래서 마구니를 항복시키는 장면) : 태자가 마군들의 온갖 유혹과 위협을 물리치고 그들로부터 항복을 받아내는 장면들이 묘사되어 진다. 마왕 파순이 마녀로 하여금 부처님을 유혹하게 하는 장면, 마왕의 무리들이 코끼리를 타고 부처님을 위협하는 장면, 마왕이 80억 마군을 몰고와 부처님을 몰아내려고 하나 창칼이 모두 연꽃으로 변하는 장면, 지신(地神)이 태자의 전생공덕과 계행을 마왕에게 증명하는 장면, 마군들이 작은 물병을 사력을 다해 끌어내려고 하나 조금도 요동하지 않고 오히려 돌비(石 雨)와 바람이 쏟아져 80억 마군들을 물리치는 장면, 드디어 마왕의 무리들이 항복되고 부처님과 모든 천신·천녀·군중들의 수희 찬탄하는 장면들이 묘사되고 있다.

 

 

* 녹원전법상(녹야원에서 처음으로 포교하는 장면) : 무상전각을 이루신 부처님이 녹야원에서 최초로 불법을 설하시는 장면들이 상·하단으로 묘사되고 있다. 상단에는 노사나불의 모습을 보이신 석가삼존이 처음으로 화엄경을 설하는 장면이 묘사되고, 하단에는 세존께서 녹야원에 이르러 교진여 등 5인의 비구에게 고·집·멸·도의 사제법문을 설교하는 장면, 수달다 장자가 아사세 태자의 동산을 사서 기원정사를 건립하고자 하는 장면, 흙장난을 하고 놀던 어린이들이 부처님께 흙을 쌀로 생각하고 보시하자 부처님이 이것을 탑으로 바꾸는 장면 등이 그려지는 것이 보통이다.

 

 

* 쌍림열반상(사라쌍수 아래서 열반에 드시는 장면) : 80세가 되신 부처님이 이월 보름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 아래에서 마지막 설법을 마치시고 열반에 드시는 장면들이 묘사되고 있다. 사라쌍수 아래서 길게 누워 열반에 드신 부처님과 그 주위로 비탄에 잠겨 있는 사부대중과 천룡 팔부중의 모습들, 노가섭이 크게 슬퍼하자 부처님이 관 밖으로 두 발을 내 보이시는 장면, 아나율 존자가 하늘에 올라가 부처님의 열반소식을 전하자 마야부인이 천녀들과 허공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꽃을 뿌려 공양하는 장면, 관이 성 밖으로 저절로 들려 나가는 장면, 다비를 하니 사리가 비오 듯 쏟아지는데 이 사리를 차지하려는 여덟 나라의 왕들에게 바라문이 골고루 나누어주는 장면 등이 상세하게 묘사되고 있다.

 

관음전

신왕각. 삼성전. 칠성전

 

전각현판 안에 모셔진 산신. 칠성. 그렇다면 삼성전 현판보다는 칠성전 현판을 가운데로 두어야 앞뒤가 맞다.

 

 

 칠성전 현판 안에는 나반존자를 모셔 서로 부합되지 않는다. 삼성전 현판만 걸든지 아니면 독성전 편액도 걸면 좋을텐데

 

 

천은사(泉隱寺)에서...권오표

다 두고 오게
그저 빈손으로만 오게

천왕봉 골짜기를 타고 와
겨드랑 밑 잠든 상채기를 할퀴는 바람도
섬진강 물줄기를 오르는 은어떼
그 투명한 몸뚱이에 머무는
저리 눈부신 한 움쿰 햇살마저도

다 두고 가게
그저 빈손으로만 가게

경인년인던가 시린 하는 아래
미처 눕지 못한 넋들
떡갈나무에 걸린 낮달 하나
풀섶 아래 묻으면
추녀 끝에 흔들려 우는 풍경
비로소 저 혼자 저무는 대웅전을
비질하는 독경 소리

다 두고 오게
다 두고 오게

 

2011.07.26

 

***천은사.한국전통사찰정보.문화재청.구례군청 홈페이지 자료를 참조하였습니다.

 

Emesto Cortazar - At the End of the Horiz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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