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안성시

안성...칠현산 칠장사

임병기(선과) 2011. 6. 19.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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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2005.01.01. 수정...2011.06.05. 사진...2011.04.25. 참고자료...문화재청.전통사찰관광정보. 안성시청.안성시문화유적분포지도. Daum

 

2005년 아들놈과 다녀온 칠장사. 벌서부터 빨리 오라는 전화가 빗발치는 안성문화유산해설사 진영숙님의 독촉에 급히 달려온 절집 아래는 오늘도 그날 처럼 절집 아래까지 초롱으로 꽃단장한 부도가 마중나와 있었다. 

 

칠장사 부도전은 칠장리 동구 오른쪽 산기슭에 14기의가나란히 서 있다. 부도는 모두 조선시대에 조성된 석종형 부도로 방형, 8각, 원형  지대석 위에 괴임을 조출하고 탑신을 조성했다. 탑신에는 표면에 별다른 시문이 없고 상단부에는 보주를 장식했다. 보주의 처리는 석종형부도의 전형적인 형식 으로서 탑신의 배흘림을 상단부에서 일단 끝맺고 보주를 조각했다. 부도에 따라서는 보륜을 모각하여 보주 그 자체를 장식한 것도 보이며, 또는 보주 하단 주연에 연주를 돌린 부도도 있다.

 

 

 

 철당간지주는 고려시대 작품인데 청주 용두사지와 갑사에도 있다.

 

 

칠장사 입구에 서 있는데, 남아있는 당간 가운데 드물게 완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총 높이 11.5m로 15마디의 원통형 철통이 연결되어 있으며, 아래부분은 화강암으로 된 좌 ·우 기둥이 버티고 있다. 흙으로 덮여 잘 드러나지 않는 바닥은 네모난 구멍을 마련하여 당간을 꽂았다. 양쪽 기둥은 조각이 없는 소박한 형태로 끝을 둥글게 처리하였다.

 

철당간은 위로 오를수록 크기가 줄어들고  이음새부분은 마치 대나무 마디처럼 형성되어 있다. 원래는 원통모양의 철통이 30마디를 이루었다고 하며, 칠장사의 지형이 배(舟)모양과 같아 돛대의 역할을 하도록  당간지주를 세웠다고 전한다.

 

 

 

당초에는 원통 모양의 철제당간이 30마디였으나 현재는 15마디만이 남아 전해 내려오는데, 당간의 직경은 43cm에, 높이는 9.9m이며, 총 높이가 11.5m에 이른다. 이 당간을 받치고 있는 지주의 높이는 3m에 달한다. 고려초 혜소국사가 주석하면서 세운 것으로 추정한다.

 

칠장사 입구 당간지주 옆에 위치한 사적비. 자연 암반을 비좌로 삼아 비신을 세웠다. 사적비는 이수도 없이 윗부분을 부드럽게 호형으로 처리하였고 비문은 노출되어 있다. 전면에는 중수기록이 후면에는 시주자와 화주자의 이름이 음각되어 있다. 비석측면의 명문으로 현종12(1671)년에 비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비문은 안명노가 짓고 이석징이 글을 썼으며 이구가 전액하였다.

 

칠장사(七長寺)는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칠현산(七賢山)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절을 처음 지은 것은 636년 신라 자장(慈藏)로 전하고 있으나 사적이 불분명하다. 본격적인 역사는 고려 초 혜소(慧炤) 국사가 머물면서 시작되었다.

 

그때 혜소국사는 지금 비각 자리에 있던 백련암(白蓮庵)에서 수도할 때 7명의 악인이 찾아왔는데 이들을 교화하여 7인 칠현(七賢)이 되었고 한다. 이로 인해 산 이름도 칠현산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혜소국사는 1014년에 왕명으로 절을 크게 중창하였다. 고려말 왜구의 피해가 극심한 시절 충주 개천사 절집 책을 칠장사로 옮겨 소실을 면한 적이 있다.

 

 

지금은 루대 불사가 진행되어 진입동선이 바끨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하지만, 칠장사는 여느 화암사찰처럼 진입동선에서 꺽어져 금당 중정으로 진입하는 구조이다. 멀리 보이는 전각이 천왕문이다.

 

 

높은 석축위에 자리한 칠장사는 산지 중정형의 가람이며 정면을 벗어난 천왕문에서 직각으로 꺽여져서 중정으로 진입할 수 있는 배치다. 천왕문은 정,측면 3*3칸의 맞배지붕으로 1725년 영조원년에 건립되었다.

 

 

서방 광목, 북방 다문 천왕이다. 사천왕상은 진흙으로 만든 뒤 채색한 것으로, 악귀 위에 걸터 앉아 있다. 머리에는 화려한 관을 쓰고 있고 얼굴에는 짙은 눈썹, 부릅뜬 눈, 오똑한 코, 수염이 있는 입이 묘사되어 있다. 조선 후기 대부분의 사천왕상이 그러하듯 험상굿거나 무섭기보다는 해학적이고 친근함을 준다.  영조 2년(1726)에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각 부분의 조각수법에서 조선 후기 사천왕상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동방 지국천왕과, 남방 증장천왕이다. 지물은 일반적인 내용과 동일하지만 절을 등지고 좌측 앞쪽이 동방인데 비해 칠장사 지국천왕은 우측 뒷쪽에 배치되어 있다. 그래서 이런 나홀로의 추측도 재미있다.  - 현재의 대웅전 건물이 다른 곳에서 이건하였다고 한다. 만약에 본래 대웅전 자리가 천왕문 밖에 위치했었다면 비파를 든 동방지국천왕의 자리배치가 정확하지 않은가?- 하긴 사천왕의 배치는 주지스님도 모른다는 말이 있다.

 

 

대웅전 좌측 원통전. 정,측면 2칸*2칸 익공계 맞배지붕 전각이다.

 

원통전 소맷돌

 

원통전 앞 석탑. 여러기 석탑부재의 조합이다. 초층 탑신도 누워 있으며 나머지 부재도 파손, 마모가 심해 원형 추측이 어려우나 고려 석탑으로 생각된다.

 

 

대웅전 중정으로 들어서자 버선발로 마중나올 줄 알았던 우리카페 회원이며 안성문화유산해설사로 인기몰이중인 진영숙님은 서울시 역사 선생님을 대상으로 해설에 여념이 없어 비켜 슬쩍 대웅전으로 향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에 다포계 맞배지붕이다.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수 없으나, 다른 곳에 세워져 있던 건물을 1828년 옮겨다 세운 건물이라고 한다. 공포는 내·외3출목며 각 주간에 2구의 공간포를 짰다. 내부에 고주를 세우지 않고 대들보가 앞뒤의 기둥 위에 바로 걸리게 하였다. 천정은 빗반자와 우물천정으로 하고 불화, 연화문 등으로 채색하였다. 중앙에는 불단이 있어 그 위에 석가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현재의 대웅전은 고종 년간에 중수된 것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꼭 안내문이 아니라도 사찰 건물에 5단의 장대석을 쌓은 것으로도 유교의 질서가 무너진 조선 말엽으로 추론이 가능한 대웅전은 고색창연한 단청, 힘이 있어보이는 맞배지붕이지만 민가에 많이 채택되는 같은 크기의 4분합 띠살문 때문인지 무겁다는 느낌보다는 편안한 느낌을 준다.

 

측면

 

대웅전 삼존불 석가 문수 보현보살,본존은 나발에 방형 상호에 귀는 길게 늘어지고 눈은 작고 엄숙한 표정이다. 어깨는 좁고 삼도는 보이지 않는다.한자락의 대의를 오른쪽 어깨위에 다시 걸친 변형된 착의는 조선후기에 통견과 우견편단에 공통적으로 보인다. 18세기 후반에 조성된 불상들이다.

 

 

후불탱. 19세기에 그려진 영산회상도이다. 1886년(고종 23) 서해(瑞海)·금문(錦文) 두 스님이 만들었다는 화기가 있다. 아래의 지장탱, 칠성탱,신장탱도 삼존불과 동시기에 봉안된 탱으로 판단된다. 

 

지장탱

칠성탱

신장탱


칠장사 동종...문화재청

 

동종의 상단 용 모양은 쌍용으로 옆에 지름 2cm의 원공이 있으며, 용은 여의주를 물고 있다. 상대 대신 원좌내에 범자를 8군데 조각하고 범자 밑에는 4유곽과 원형두광의 보살입상을 서로 바꾸어 조각했다. 중앙에는 일조의 원대가 있고 그밑에 명문이 있으며, 하대에는 별다른 조식이 없다.

유곽은 주연에 사선문양이 있으며 단엽의 9연좌 중심에 9유두가 있다. 명문은 「건륭사십칠년임인십일월일시(乾隆四十七年壬寅十一月日時) 죽산도호부사이언충(竹山都護府李彦忠)」이라 했는데, 건륭47년은 조선조 제22대 정조6년(1782)이다.

 

봉업사 석불입상. 장원리 석조보살좌상

 

봉업사지 남쪽 장원리에 있었던 불상이다. 광배와 불상이 하나의 돌에 새겼다. 머리에는 삼산관을 썻으며 장식물이 양귀를 덮고 있다. 얼굴은 풍만하며, 코와눈은 중생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입은 다물었다.삼도가보의며 법의는 통견, 오른손에는 연꽃을 들고 있다. 하반신은 간락하게 음각하였고 광배는 주형거신광이다.

 

 

원래 죽산산성 아래 관음당이라는 마을에 있던것을 훼손이 심하여 이곳으로 옮겨온 것입니다. 아마도 고려시대에 크게 번창하였던 봉업사지에 모셔졌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화강암 1매로 대좌없이 광배와 함께 조성되었습니다. 불상 높이는 157cm, 어깨 너비가 50cm, 광배의 높이는 195cm입니다. 민머리 위에 큼직한 육계가 있고 이목구비는 마멸이 심해 전체적인 인상은 잘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둥그랗고 도톰한 얼굴은 양 볼이나 턱에 부피감이 보이는 등 대체로 원만한 상호(相好)입니다. 양쪽 귀는 길게 표현되어 어깨에 닿을 듯한데 목의 삼도(三道)와 잘 어울려 위엄이 보입니다. 불의(佛衣)는 통견으로 배 부근까지 여러 겹의 둥근 선을 그리면서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또 그 아래 무릎 밑에는 군의도 보입니다. 이 군의는 두 다리 사이에서 지그재그 모양의 옷주름이 조식되어 있습니다. 왼 손은 자연스럽게 옷자락을 잡고 오른손은 가슴부근까지 들어서 가슴에 대고 있습니다. 광배는 거신광(擧身光)으로 그 둘레를 불꽃무늬로 두르고 두광과 신광의 바탕에는 아무런 조식이 없습니다. 원형 두광에는 여러가지 수인을 취한 화불(化佛) 3구가 돋을새김 되어 있습니다. 전체적인 조각수법이 통일신라 시대의 분위기를 풍기지만, 고려시대 초기에 유행하던 지방 양식의 특징도 보이기도 합니다.

 

대웅전 옆에는 고향 봉업사지를 떠나 기나긴 만행길을 접고 이 곳에 터를 잡은 잘생긴 석불 입상이 한분의 협시불과 나란히 서 계신다. 불상과 거신광이 한 개의 돌로 되어 있고,두광에는 3기의 화불, 작은 바람에 금방이라도 나풀거릴 듯한 법의, 특이한 수인의 불상은 통일신라의 석불로 알려져 있으며, 제짝이 아닌 대좌위에 서 있지만, 얼굴의 마모에도 불구하고 코을 갈아먹고 아들을 낳은 보살들을 이해하시겠다는 표정으로 고운 모습이다.

 

 

예전 답사기에 아래와 같이 묘사했던 그 탑은 사라지고 없었다.

 

중정을 들어서는 순간 올라온 길을 되돌아 가고 싶은 충동이 전신을 휘감는 것은 정체불명의 석탑 한 기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저 고풍스런 대웅전 단청,공포,두벌의 괘불대,봉업사에서 옮겨왔다는 석불입상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국적불명의 석탑이 추운 날씨에 얼어붙은 나의 맘을 설상가상 더욱 슬프게 했다. 


 

 탑은 전체 높이가 363cm이고, 지대석은 가로 171cm, 세로 140cm이다. 석탑은 단층 기단 위에 세워진 방형의 석탑으로, 중대석은 각 면을 1식으로 마감하고, 갑석은 1판석에 옥신괴임을 2단으로 둥글게 처리하였다. 1층 탑신은 2매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다

 

한 면에 문비를 몸돌에는 양쪽에 모서리기둥을 조각하였다. 1층 이상의 탑신은 1층에 비해 체감률이 급격히 줄어 심한 체감비례를 보이고 있다. 2층과 3층 탑신석은 1층과 같이 각 면에 모서리기둥을 모각하였다. 옥개석은 모두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옥개석 받침은 각 층 4단을 이룬다. 상륜부는 방형 노반만이 남아 있다.

 

 

이 석탑은 원래 죽산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몇 개의 부재를 모아서 일죽면 죽림리 460번지 성원목장에 복원한 것이다.  탑신부의 체감비율이나 옥개받침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고려 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명부전. 1726년 초창. 일반적으로 명부전 외벽에는 지옥도가 그여져 있는데 칠장사 명부전 벽화는 칠장사와 관련 있는 사람들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명부전 벽화

 

중앙벽화. 혜소국사가 7명 도적을 교화시키는 모습이다. 우측 벽화는 신라말 헌왕왕의 서자로 태어나 권력암투에 밀려 칠장사에 13살 까지 은든한 궁예가 활을 쏘는 모습이다. 좌측 벽화는 어사 박문수가 과거 시험을 보러 가는 도중에 칠장사에서 하루를 유했다. 박문수는 모친이 준비해준 조청과 유과를 올리고 간절히 기도후 잠에 들었다. 꿈에 문제가 나오고 박문수는 장원급제하여 귀향길에 다시 과자를 올려 감사를 표했다고 하는 전설의 벽화로 요즘도 입시철이면 칠장사 나한전 나한에게 과자 공양 올리는 학부모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고 한다.

 

 

칠장사는 도둑 떼와 인연이 깊은 도량이다. 장길산, 홍길동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의적으로 일컬어지는 임꺽정의 활동무대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1920년대 현장 답사를 토대로 씌어진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은 칠장사에서 임꺽정과 여섯 명의 부하들이 의형제를 맺은 곳으로 묘사하고 있다.

 

 홍명희. 호는 가인(假人, 可人)‧벽초(碧初), 자는 순유(舜兪). 일제강점기에 육당, 춘원과 더불어 조선삼재라 불리었다.1888년 7월 3일 충북 괴산 출생. 혜경궁 홍씨가 출생한 풍산 홍씨 추만공파의 명문 사대부가 출신으로, 아버지는 경술국치 때 비분을 견디지 못하고 자결한 홍범식이다. 향리에서 한학을 수학한 후 서울 중교의숙(中橋義塾)을 거쳐 도쿄에 유학, 타이세이중학(大成中學)을 졸업했다.


1910년 귀국 후 『소년』에 A 니에모예프스키의 산문시 「사랑」을 번역 소개하는 등, 최남선‧이광수와 함께 신문학건설에 공헌했다. 1912년 출국하여 상해에서 독립운동단체 동제사(同濟社)에 참여하였으며, 싱가포르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18년 귀국했다. 3‧1운동 당시 괴산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여 옥고를 치른 후, 1924년 『동아일보』 취체역 주필 겸 편집국장, 1925년 『시대일보』 사장, 1926년 오산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는 한편, 신사상연구회, 화요회, 정우회, 조선사정조사연구회 등 사상운동단체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1927년 창립된 신간회(新幹會)의 실질적인 지도자로서 조직부 총무간사 등을 역임했으며, 1929년 신간회 민중대회 사건으로 재차 투옥되었다.

1926년 『문예운동』에 프로문학의 역사적 필연성을 역설하고 문예운동과 사회주의운동과의 결합을 촉구한 평론 「신흥문예의 운동」을 발표하는 등 초기 카프와 관련을 맺었다. 『동아일보』에 동서고금의 이색적인 지식을 소개하는 칼럼을 연재한 후 이를 모아 1926년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학창산화(學窓散話)』를 간행했다. 1928년부터 1940년까지 『조선일보』와 『조광』에 대하장편역사소설 「임꺽정[林巨正]」을 연재하여 작가로서 확고한 명성을 얻었다. 광복 후인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1947년 민족독립당 당수, 민족자주연맹 부의장으로서 좌우합작을 추진하던 중, 1948년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 참가차 평양에 갔다가 북한에 남았다. 북한에서 내각 부수상, 과학원 원장,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냈으며, 1968년 3월 5일 사망했다.

그의 대표작인 림꺽정은 단행본으로만 10권에 달하는 거작으로서, 봉건제도에 저항하는 백정출신의 도적 임꺽정의 활약을 통해 조선시대 민중들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재현한 점에서 식민지시대의 대표적 역사소설이자 한국근대소설사상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출처...문화재청

 

 

원통전(圓通殿)과 영각(影閣)을 지나 서북쪽으로 50m가량 약간 가파른 언덕 위 전각 안에 모셔져 있습니다. 글은 김현(金顯)이 짓고 글씨는 민상제(閔賞濟)가 썼습니다. 비신(碑身)은 흑대리석이고 그것을 받치고 있는 귀부(龜趺)와 비신 위에 놓이는 이수는 화강암입니다. 전체높이가 496cm, 비신 높이는 348cm, 너비는 128cm입니다.

 

혜소국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혜소국사는 고려 광종 23년(972)에 안성에서 출생하여, 10세에 출가하였으며 17세에 융천사(融天寺)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국사는 말년을 칠장사에서 보내면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한다.

현재 비는 비받침인 귀부(龜趺)와 비몸돌·머릿돌이 각각 따로 놓여 있는 상태이다. 흑대리석으로 만든 비몸돌의 양쪽 옆면에는 상하로 길게 두 마리의 용을 새겨 놓았는데 그 솜씨가 뛰어나다. 비문에는 대사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며, 글씨에서는 고려인다운 뛰어난 풍모가 느껴진다.

문종 14년(1060)에 세워진 이 비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왜의 장수인 가토가 이 절에 왔을 때, 어떤 노승이 홀연히 나타나 그의 잘못을 꾸짖자 화가 난 가토가 칼을 빼어 베었다. 노승은 사라지고 비석이 갈라지면서 피를 흘리니 가토는 겁이 나서 도망을 쳤다 한다. 현재 이 비의 몸돌이 가운데가 갈라져 있어 이러한 이야기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진영숙님의 관심과 배려로 쉽게 접할 수 없는 몇점의 귀한 옛님을 만났다. 홍제관. 혜소국사가 세운 수행처 홍제관에서 유래된 건물로 보인다. 학술대회등 각종 행사가 열리고, 칠장사의 보물도 전시되어 있었다.

 

 

임꺽정은 황해도 청석골을 근거지로 서울과 양주 안성 등 경기도와 평안도 강원도 등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탐관오리와 악독한 토호들을 응징하는 활동을 벌였다. 그러던 중 길막봉을 구하기 위해 안성에 왔다가 평소 스승으로 모시던 갖바치 병해대사를 뵙기 위해 칠장사에 들른다.

 

그러나 스님은 얼마 전에 세상을 뜬 뒤였고 슬픔에 잠겨 있던 임꺽정은 스님을 기리기 위해 목불(木佛)을 조성하고 그 앞에서 부하들과 결의형제를 맺는다. 그 후로 이 목불은 백정부처라 불렸고 영험하다는 소문이 나 불공을 드리는 사람들이 밤낮으로 줄을 이었다고 한다.

 

 

구름을 이용하여 화면을 상·중·하 3단으로 구분지은 다음 오불회(五佛會)와 도솔천궁(兜率天宮)을 적절하게 배치한 이 괘불도는 길이가 6.56m로 비록 중간 크기이긴 하지만, 세련된 인물의 형태와 유려한 필선, 화사하면서도 은은한 색채를 사용함으로써 예배자들을 압도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의 불교그림은 단일구도를 이루고 있는데 반하여 이 괘불도에서는 삼신불(三身佛)을 묘사한 상단과 삼세불(三世佛)의 세계인 중단, 수미산 정상의 도솔천궁을 표현한 하단 등 3단구성법을 구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십대제자와 용왕과 용녀, 팔부신중, 시방제불(十方諸佛)들이 에워싸듯 그려져 있는 상단에는 지권인(智拳印)에 거신형 광배를 갖춘 비로사나불(毘盧舍那佛)을 중심으로 노사나불과 석가불이 배치된 법(法)·보(報)·화(化) 삼신불(三身佛)이 표현되어 있으며, 중단에는 일광(日光)·월광보살(月光菩薩)과 관음(觀音)·세지보살(勢至菩薩)을 협시로 하고 제석(帝釋)·범천(梵天), 사천왕(四天王), 금강역사(金剛力士) 등 여러 성중들을 거느리고 있는 약사불(藥師佛)과 아미타불(阿彌陀佛)을 그려 상단의 석가불과 함께 과거·현재·미래계의 상징인 삼계불(三界佛) 세계가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구름속에 솟아있는 수미산 꼭대기의 도솔천궁과 우바이·우바새 등의 대중들이 예배하고 있는 장면을 나타낸 하단부에는 관음보살이 기암괴석에 앉아서 선재동자(善財童子)의 청법(請法)을 받고있는 모습이 좌측(향우(向右))에 묘사되어 있고, 우측(향좌(向左))에는 지옥계의 구세주인 지장보살(地藏菩薩)이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明尊者), 판관(判官), 선악동자(善惡童子)를 거느리고 있는 장면이 표현되어 있다.

이처럼 화면을 삼단으로 나누어 각 단의 성격에 맞게끔 인물을 배치하고 있는 것은 예배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 즉 삼신불과 삼세불의 세계를 통하여 깨우침의 진리를 터득하고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의 구원으로 마침내 최상의 세상인 도솔천궁에 이를 수 있다는 의미를 보다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이 괘불화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하겠다.

화폭 전면에 걸쳐 펼쳐져 있는 밝은 색조의 구름과 불의(佛衣)의 선명한 홍색으로 경쾌함을 보여주는 이 괘불도는 녹색의 주조색에 황색과 황토색의 대비로 인하여 다소 무거운 느낌이 들긴 하지만, 단아하고 세련된 인물의 형태와 짜임새 있는 구도, 섬세하고 치밀한 필치 등에 있어서 당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조선시대 17세기 전반기의 불화연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칠장사 삼불회괘불탱...문화재청

 

영축산에서 석가가 설법하는 모습을 묘사한 영산회상도 이다.  화면 구성은 석가불을 중심으로 한 하단과 노사나불과 아미타불이 있는 상단으로 구성된다. 사각형의 광배를 한 석가불의 주위를 팔대 보살과 십대제자, 사천왕 등이 에워싸고 있는 형상이다. 대좌 아래에는 사리불이 석가의 설법을 듣고 있다. 상단에는 아미타불과 보살처럼 화려한 보관을 쓴 노사나불이 사래보살에 의해 둘려 쌓여 있다. 아미타불과 노사나불 사이에는 보탑을 두어 화면을 구분하고 있다. 보탑 위로 반원형의 큰 광배 안에 9구의 보살을 중심으로 천상세계의 모습을 표현하였다.

숙종 36년(1710)에 그려진 이 괘불은 석가불이 그려진 하단 단독으로도 영산회상도를 묘사할 수 있는 독특한 구성을 보여주며, 상단과 합쳐서는 삼신불을 간략하게 표현한 구성을 하고 있다. 이러한 간략화한 구성 방식은 조선 후기에 유행하는 방법으로 이 괘불은 이런 구성을 잘 보여주는 훌륭한 작품이다.

 

 

선조(宣祖)의 계비(繼妃)인 인목왕후(仁穆王后, 1584~1632)가 큰 글자로 쓴 칠언절구의 시이다. 종이바탕에 4행으로(각행 7자) 썼으며 근대에 족자로 장황되었다. 어필 아래에는 서예가 배길기(裵吉基)의 1966년 발문이 있다. 바탕은 보존이 양호한 편이며 다만 줄[行] 사이가 좀 더 밝다. 한편 어필 칠언시 28자의 점획 안에는 제월당(濟月堂)이란 스님의 발원문 29자가 작은 글자로 진하게 쓰여 있다.

 

칠장사는 인조가 반정으로 등극한 1623년에 인목왕후가 친정아버지와 아들(영창대군)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원당(願堂)으로 삼아 중창한 사찰로 이곳에는 인목대비가 썼다는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 사경>이 전래되었는데(현 동국대박물관 소장), ‘인목왕후 칠언시’와 서풍이 같다. 인목왕후의 글씨는 선조어필과 비슷하며 그의 딸 정명공주(貞明公主)가 따라 썼다.

이 어필을 나무판에 모각한 것(명안공주관련유물(明安公主關聯遺物, 보물 제1220호))과 검은비단에 금니로 모사한 것이 전하는데(국립중앙박물관, 德 2053) 모두 이 어필과 자형이 같다. 다만 모본에서는 칠언절구 28자를 3행으로 배열하고(각행 10자) 글자 사이를 조절하였다. 조선시대 열성(列聖)의 어필이 많이 모각되었는데, 이처럼 모각된 어필의 원적(原蹟)이 남아 있는 예는 매우 드물다. 특히 왕후의 글씨는 간찰체제로 자필 또는 서사상궁의 필치로는 전하고 있지만 한자 대자(大字)는 명성왕후의 예필을 빼면 현재로서는 ‘인목왕후 칠언시’외에 사례가 발견 되지 않고 있다.

 

의미심장한 을 풀이해보자.

"늙은 소 힘쓴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목덜미 쭈그러 들고 가죽은 헤져서 졸립기만 하고,, 쟁기질 다끝나고 봄비 또한 넉넉한데 ,주인은 어찌하여 또 채찍을 든다 말인가?" 이 시는 늙은 소의 고달픔과 그것을 바라보는 주인의 애처로운 마음을 자신의 처지에 비유 한 시이다.

 

천수관음

 

근래에도 칠장사에서는 철불이 무더기로 발굴되었으나 문화재에 대한 안목이 일천하여 반출,유실, 도난되었다고 한다.

 

독성탱.현왕탱

 

오래전 나의 답사기에는 아래와 같이 마무리를 하였다. 이제와 돌아보니 건방이 심했던 것 같다. 탑은 사라지고 도난 위험에 처해 있던 석탑이 그자리를 대신하였다. 칠장사에서는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어사 박문수 백일장을 개최하고 있으며, 각종 학술대회도 열리고 있다고 한다. 또한 템플스테이, 문화해설사가 상주하여 지역민들과 순례객에게 칠장사의 사적을 널리 홍보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일반인들과 하나가 되려는 따뜻한 배려가 고마웁다. 마지막으로 안성문화유산해설사인 유란자방(진영숙)님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아래 지난 답사기의 마무리 문장은 내마음의 경구로 삼고져 삭제하지 않겠다.

 

벽초 홍명희도 해금된지 오래이고 산사에서 문학의 자취를 찾아보는 문학기행이 이제 보편화된 추세라면 국적불명의 요상괴상TIC한 탑을 걷어 치우고,임꺽정에 등장하는 두령들이 기거하는 산채 하나 장만 하심이 어떨지....

 

2011.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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