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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정선군

정선...정암사 수마노탑

by 임병기(선과) 2010.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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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허스님 글씨

 

정암사(淨岩寺)는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고한리 태백산 기슭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의 말사이다. 
 
정암사는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의 하나로서 갈래사(葛來寺)라고도 한다. 636년(선덕여왕 5)에 자장율사가 당나라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석가모니불의 진신사리와 가사를 전수받아 643년에 귀국한 뒤 금탑·은탑·수마노탑 3기를 세우며 창건했다고 전한다.

 

일제강점기에는 효봉(曉峰) 스님이 총독부의 집요한 감시를 피해 정암사에 3년 이상 머물며 수행 정진하였고, 해방 후에도 지월(指月)․서옹(西翁) 스님 등이 이곳에서 수행을 하는 등 정암사는 고승들의 수행처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갈래사사적기」에 의하면 자장 율사가 말년에 강릉 수다사(水多寺)에 머물렀는데, 하루는 꿈에 이승(異僧)이 나타나,
“내일 대송정(大松汀)에서 보리라.”
라고 하였다. 스님이 아침에 대송정에 가보니 문수 보살이 나타나,
“태백산 갈반지(葛盤地)에서 만나자.”
하고 사라졌다.
 
자장 율사는 태백산으로 들어가 갈반지를 찾다가 어느 날 큰 구렁이가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을 보고 제자에게 이곳이 갈반지임을 이르고 석남원(石南院)을 지었는데, 이 절이 바로 지금의 정암사이다.

 

 

창건에 관해 또 다른 일설에는 자장 율사가 처음 사북리 불소(佛沼) 위의 산정에다 불사리탑을 세우려 하였으나, 세울 때마다 붕괴되므로 간절히 기도하였더니 하룻밤 사이에 칡 세 줄기가 눈 위에 뻗어 지금의 수마노탑·적명보궁·사찰터에 멈추었으므로 그 자리에 탑과 법당과 본당(本堂)을 세우게 되었다. 그래서 이 절을 ‘갈래사’라 하고 지명을 ‘갈래’라 하였다고 전한다.

 

아래서 바라본 수마노탑

 

적멸궁은 신라시대 선덕여왕 때 자장 율사가 석가여래의 사리를 수마노탑에 봉안하고 이를 참배하기 위해 건립한 법당이다. 팔작지붕에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의 규모인데, 「정암사사적」에 따르면 1770년(영조 46)에 중수한 모습이 남아 있다. 그 뒤에도 1858년(철종 9)과 1919년에 각각 중수한 흔적이 남아 있다. 현재 강원도문화재자료 제32호로 지정되어 있다

 

 

적멸궁 앞 주목. 자장율사의 지팡이라고 한다. 설화는 늘 즐겁다.

 

 

정암사 열목어... 이용한 

 

정암사에는 아직도 자장이 산다

그것도 정암사 계곡을 이리저리 헤엄치며 산다

믿지 못하겠다면 한번 정암사 계곡에 가보라

거기서 윤회한 자장을 만나게 될 것이다

만일 계곡에서 유유히 헤엄치는 열목어를 만났다면,

당신은 이미 자장을 본 것이다

이 사실을 정암사 스님들은 알고 있다는 듯

적멸보궁 가다가 혹은 수마노탑 가다가

꼭 한번은 계곡을 들여다 본다

스님 거기 잘 계시오?

그때마다 스님은 잘 있다고 지느러미를 흔든다

~앞남산 황국 단풍은 구시월에나 들구요

이내 몸에 속단풍은 시시때때로 드네~

불경 대신 중얼중얼 정선아리랑 부르며,

죽어도 죽은 목어는 싫다고

오늘도 정암사 열목어로 산다

 

 

정암사 경내에서 약 100m쯤 위에 떨어진 적멸보궁 뒤편, 급경사를 이룬 산비탈에 축대를 쌓아 만든 대지 위에 보물 제410호로 지정된 수마노탑(水瑪瑙塔)이 서 있다.
 
지대석은 모를 죽인 화강암재로 6단을 쌓아 올렸고, 탑신부를 받치기 위하여 모전석재(模塼石材)로 2단의 굄대를 그 위에 마련하였다. 탑신을 구성한 석재는 회록색의 수성암질석회암으로 길이 30~40㎝, 두께 5~7㎝의 크기인데, 수법이 정교하고 표면이 잘 정돈되어 있어 얼핏보면 전(塼)을 사용한 것과 같다.

 

 

초층 옥신은 한 변이 178㎝로 15단을 쌓아 높이 103㎝의 사각형을 만들었고, 초층의 옥신 남면 중앙에는 화강암으로 틀을 짜서 감형(龕形)을 설치하였다. 문비(門扉)는 1매의 판석으로 만들어 졌으나, 중앙에 종선(縱線)을 음각하여 2매의 문비임을 나타내려고 하였고, 중심에는 철제 문고리를 달았다

 

 

옥개는 전탑 특유의 형식으로 추녀 넓이가 짧아지고, 추녀는 수평을 이루다가 전각(轉角)에 이르러 상하로 풍령공(風鈴孔)이 뚫려 있으며, 상층 일부에 풍령이 남아 있다.
 
옥개 받침은 초층에서 7단으로 되어 있으나, 상층에 갈수록 1단씩 줄어들어 7층에서는 1단이 되었고, 옥개석 위쪽의 낙수면 층단도 초층에서는 9단으로 되어 있으나, 층을 거듭할수록 1단씩 줄어 7층에 이르러서는 3단으로 되어 있다.

 

 

상륜부는 화강암으로 조성한 노반 위에 모전석재 2매를 얹고 다시 그 위에 청동제 상륜을 설치하였다. 이 청동제 상륜은 투각된 오륜 위로 복발과 보륜을 두었다. 보륜 위에는 다시 병형(甁形)을 얹었으며, 그 목에서 네 가닥으로 돌출된 끝에는 풍경을 달았다. 제일 정상에는 위가 크게 외반된 수연을 얹었으며, 병형의 목에서는 철쇄가 내려와 4층의 옥개까지 이르고 있다.

 

 

이 탑은 거대한 편은 아니나 형태가 정제되고 수법이 정교하다. 옥개 우각 추녀 밑의 상향은 고려시대의 양식을 잃지 않은 것이고, 청동제 상륜의 투각수법 또한 시대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탑 앞에는 배례석이 놓여 있는데, 여기에 새겨진 연화문이나 안상문 등은 고려시대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이 석탑은 오래 전부터 각층의 모전석이 결실되거나 파손되어 보물로 지정할 때부터 보수 문제로 논의되어 오다가 1972년 전면 해체·복원되었다.

 

 

해체수리과정에서 3층 옥신부터 기단부까지의 사이에서 5개의 탑지석이 발견되고, 기단부 최하단석 밑의 적심부에서 청동합, 은제외합, 금제외합 등의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어 조선시대 말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의 보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탑지석에 의하면 이 탑의 현재 모습은 1653년의 중건 때 갖추어진 것이고, 탑 앞의 배례석과 기타 경내에 남아 있는 여러 유물과의 비교, 검토에서 그 초창의 하한은 고려시대로 추정되고 있다.

 

 

자장 율사가 643년(선덕여왕 12) 당나라에서 돌아올 때 서해 용왕이 자장 율사의 도력에 감화되어 마노석(瑪瑙石)을 배에 싣고 동해 울진포를 지나 신력으로 갈래산에 비장(秘藏)하여 두었다가, 자장 율사가 정암사를 창건할 때 이 돌로써 탑을 건조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에 물길을 따라 마노석을 반입하여 만든 탑이라 하여 ‘물 수(水)’자를 앞에 붙여 수마노탑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전통사찰 관광정보에서 글을 가져왔습니다.

2010.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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