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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당진시

당진...안국사지

by 임병기(선과) 2010.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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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글:04.04.20

2.수정:10.06.04

3.사진:10.04.13

 

진입로도 바뀐 것인지 예전 기억이 없다. 04년 기록한 답사기에 문화재 관련 내용만 일부 수정한다.

 

 

백제 시대에 대 당나라 루트를 따라 당진 땅 안국사지로 향하면서 내내 떨쳐지지 않은 안국사의 숨겨진 내력에 빠져 길을 잃고 해메었지만 사전에 준비한 지도를 들고도 길위에서 길을 잃어버렸다. 급기야 정미면 정미초등학교 까지 가서야 안국사지 들목을 한참이나 지나 온 것을 알았지만 되돌아 와서도 한 시간 이상을 입구를 찿지 못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노인회관 앞 입구에는 공사가 진행 중이라 입간판이 들어 누워 있으니 보일 리가 있겠는가?
 

 

물어물어 우회로를 알았지만 아뿔사 길이 끝난 지점에서 길이 막혀 버려 한 바가지의 땀을 흘리며 후진으로 산길을 내려 와서 다시 큰길에서 달리는 승용차를 세우고 물었더니 고맙게도 길을 안내하겠다며 안국사지 입구 까지 친절히 안내해 주신다. 그분 아마 당진군청의 공무원 같았는데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글을 쓰는 지금도 얼굴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작은 요사채 하나와 너무도 멋져 사립문을 밀고 들어가고픈 초가 선원이 반겨주는 절터에는 고려시대 충청 일원에서 보이는 석주형의 불상 세기와 석탑, 석탑부재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안국사'란 절이름과 위치가 기록되어 있다. 사역내에서 발견되는 기와 조각도 여말선초의 것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안국사는 고려말기에 처음 지어져 조선 중종 25년을 전후한 시기까지 존립하였다고 한다. 2단 축대를 쌓아 조성되었는데 상단에는 삼존석불이 있고, 하단에는 석탑이 있다.

 

 

지대석 위에 단층기단을 조성하였다. 갑석에 조식은 발견되지 않는다. 초층 몸돌과 4층의 옥개석 외에는 결실되었다. 옥개석은 4층만 남아있는데 대체로 체감율이 적으며 4단의 층급받침이며. 처마에 반전도 보인다. 옥개석 상단에는 탑신 받침 1개가 있다. 몸돌의 크기가 작아 불안정한 모습이다. 상륜은 결실되었다. 고려시대 석탑이다.

 

 사방불

 문비와 사방불

 석탑 부재

 

연화대좌에 모셔져 있다.

 

 석탑부재

 

갓을 쓴 본존불은 중품하생의 수인으로 미루어 아미타불이다. 좌우 협시불은 관음과 세지보살인가? 하지만 매향비로 미루어 미륵불로 모셔졌을 것이다. 본존불의 눈은 반개형,  코는 마멸되었고, 입은 작다. 귀는 어깨까지 늘어져 있다. 오른손은 국기에 대한 경례처럼, 왼손은 아미타불의 중품하생인 이라고 알려져 있다. 

 

 

 

오른쪽의 협시보살은 무릎 이하가 땅 속에 묻힌 채로 남아있는데 조각수법은 본존불과 흡사하다. 왼쪽 협시보살은 얼굴의 절반 이상이 파손된 상태이다. 고려시대 충청도 지방에서 유행하던 괴체화한 불상으로 알려져 있다.

 

 

불상 뒤쪽에는 돌고래 모습의 큼직한 바위가 있고,바위에는 얕게 판 글씨가 있는데 매향비이다. 매향비는 고된 삶을 살아가는 민초들이 미륵이 이 땅에 내려와 극락을 이루어 주기를 기원하면서 미륵하생신앙으로 향을 묻고 빌었다는 비문을 말한다. 

 

우리님들 매향(埋香)을 아세요?

 

[매향 의식에 담긴 새 시대의 기원]
천 년의 세월 넘어 미륵 세상을 기다리다.

이해준(공주대학교 교수)


민중의 염원이 담긴 "매향의례" 고통스런 현실에서의 탈출구, 미륵신앙 천년의 신비, 침향의 역사

매향(埋香)이란 과연 무엇일까? 천년 전의 우리 조상들은 무슨 연유로 향을 갯벌에 묻고 천 년 뒤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불살랐던 것일까? 또 당시 그들이 느꼈을 현실감은 과연 오늘의 우리가 느끼는 그것과 얼마나 다르고, 또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을까? 매향에 담긴 선조들의 깊은 마음을 더듬어 보자.

IMF 이후 깊은 산 속의 기암괴석 아래에서는 무당굿이 한창이고, 도심 속의 여관 골목에는 수많은 "도사님"들이 성업중이라고 한다. 그만큼 미래가 불투명하고 사회가 혼란스럽다는 이야기일 것이다.우리의 과거 역사 속에서 힘없는 인간들은 이럴 때면 어김없이 갖가지 신령들에게 자신의 미래를 의지하여 왔다. 고려 말과 조선 초기, 해안과 섬 지방 민중들도 마찬가지로 매향을 통하여 자신들의 미래를 기원했다. 그들은 개펄에 향을 묻고 다가올 미륵 세계와 미륵불을 기다렸다. 자신의 이러한 애틋한 기다림과 정성을 미륵보살이 분명코 알아주리라 기대하면서 말이다.

매향(埋香)이란 글자 그대로 향나무를 땅에 묻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향나무는 아무 곳에나 묻는 것일까, 아니면 특별한 곳에 묻는 것일까? 또 왜 묻는 것이며, 향을 묻어서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것일까?

 

민중의 염원이 담긴 "매향 의례"

매향을 할 때 향나무는 아무 곳에나 그냥 묻는 것이 아니다.불가에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매향의 최적지는 계곡 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이어야 한다.따라서 매향이 이루어지는 곳은 섬이나 해안지역이어야 하고, 구체적으로는 개펄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실제로 매향한 지점이 정확히 밝혀진 바는 없지만, 이와 관련하여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이 바로 저 유명한 신안 해저 유물선이다. 이 유물선이 발견된 곳은 개펄이었다.

 

조사단에 따르면 이 유물선은 개펄에 침몰하였기 때문에 선체의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 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목재는 개펄 속에 묻혀 오래되면 마치 강철처럼 단단해진다. 더욱이 신안 해저 유물선에 화물로 실려 있던 목재 자단목은 일종의 향나무였다.본래 목재로 수출된 것이었으나 이 자단목은 1천영년 가까이 개펄에 묻히는 바람에 결과적으로는 침향이 되었다. 매향의 결과 얻어진 침향목이 바로 그 모습 아니었을까?

필자는 1982년 8월, 전남 신안군 암태도에서 새로운 매향비를 발견하였는데, 이는 도서 지방에서 발견된 유일한 예이다. 당시만 하여도 고성 삼일포(1309년), 사천(1387년), 해미(1427년)에서 발견된 매향비 정도만 알려진 상태였다. 그러나 암태도 매향비 발견 이후 전라도 해안 지역에 서만도 5-6종의 매향비들을 추가로 발견할 수 있었다.

예컨대 해남 마산면 맹진리 속칭 장군바위에서 또 다른 매향비(1406년)를 확인할수 있었고, 연이어 영암 엄길리(1344년), 영광 법성포(1371년, 1410년), 장흥 덕암 매향비(1434년)등을 확인한 바 있다. 그리고 충남 당진과 경남 삼천포에서도 매향비가 발견되어 앞으로 이와 같은 자료의 발견 가능성은 매우 높다.

 

 

이러한 매향비들은 여러 사람들이 잘 알아 볼 수 있도록 비석처럼 세워진 경우가 거의 없다. 오히려 비석이라 부르기보다는 암각이라 불러야 할 만큼 대개는 산의 중턱쯤에 있는 암벽의 감춰진 내면에 쓰여져 있거나, 자연석에 투박한 글씨로 새겨진 것이 보통이다. 혹 매향을 하지도 않은 제 3자가 비문을 알아보고 침향을 캐 가면 큰일이라고 걱정해서 일부러 숨겨 두고 비밀스럽게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수많은 불교사의 문헌자료나 역사서에 매향에 관한 내용이 거의 기록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이는 매향 의례가 그만큼 민중적인 기반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렇듯 기록이 없는 까닭에 매향비의 기록은 매향에 관한 유일한 기록 자료로서 중요하게 취급된다. 매향비에는 매향의 시기와 주체, 발원의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고통스럼 현실에서의 탈출구, 미륵 신앙

현존 매향비들은 거의가 고려 말-조선 초기의 것들이며, 지역적으로는 거의 모두 해안 지역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또 매향의 주체는 거의가 민중들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공통점들이 생기게 된 것일까? 매향의 최적지는 계곡 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지점이기 때문에 매햐처가 해안 지방에 집중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런데 바로 이 같은 입지조건-해안지만-이 구세·기복적(救世祈福的)인 매향을 추진케한 배경이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현전 매향비들의 건립 시기가 "왜구의 창궐"이라는 당시의 역사적 배경과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즉, 여말선초라고 하는 역사의 전환기가 정치적인 면에서 지배층의 불안 요인이었다면, 민중- 적어도 왜구에 의해 격심한 침탈을 받던 해안 지방 민중들- 의 입장에서는 왜구의 창궐이 보다 큰 불안이요, 현실적 위기감이었을 것이다.

결국 매향지의 민중들은, 그들이 피부로 느끼고 있는 이같은 현실적 고통과 불안감에서 구원받는 방법으로서 미륵 신앙과 접합된 매향을 택했던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당시의 해안 지역 민중들은 현실적 불안과 불투명한 미래에 대하여 어떤 형태로든 대응 장치를 마련하고자 했으며, 그 방법으로 내세에 출현하는 미륵을 선택하여 기다린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매향비문에서 볼 수 있듯이 매향은 미륵신앙 중에서도 하생신앙(下生信仰)과 직접 연결되고 있다 .즉, 개펄에 묻은 향을 매개로 하여 하잘 것 없는 민중들이 하생한 미륵보살을 만나기를 기대하는 것이며, 그가 주관하는 용화회(龍華會)에 참여함으로써 미륵과 함께 내원궁(內院宮)에 들 수 있다는 논리는 단순하면서도 정연한 것이다. 맨손이 아닌 침향을 지극정성으로 준비하였다가 하생한 미륵을 맞이한다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이니 발원은
민중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이와 함께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이들이 묻은 향나무가 수백 년이 지나면 침향이 되고 침향이 된 뒤에는 "서해 바다에서 용이 솟아오르듯이 스스로" 물위로 떠오르게 돼 있다는 것이다. 이는 민중들의 염원이 때가 되면 드디어 현실로 나타나게 됨을 의미한다. 사실 이는 민중 의식 속에서 자리잡은 미륵신앙의 모습을 그대로 전하고 있는 셈이다.

10수 년 전에 서해 바다에서 솟아오른 침향목을 한 어부가 발견하여 횡재를 했다는 소식이 문에 보도된 적이 있는데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는 요즘에 그것도 매향의 결과라고 보지 않을까 걱정된다. 그런가 하면 최근 어느 지역에서는 새 천년을 맞는 밀레니엄 행사로 침향을 찾는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침향을 찾는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매향을 했던 우리 선조들의 뜻과 기대와는 매우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경오년(庚午年) 2월에 이미 북쪽 천구라고 하는 포구 동쪽에 향을 묻었으며 화주와 주민들의 힘으로 세웠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천년의 신비, "침향"의 역사

매향의 결과 얻어진 "침향"은 그 기원의 뜻대로라면 미래 미륵 세상과 직결되는 신비와 경이의 공양물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매향비에 전해지는 전설은 모두 "보물"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매향비에 새겨진 뜻을 알면 보물을 찾을 수 있는데, 이는 "조선 군사가 3년 먹을 식량"이라는 둥, "군량미 수천 석"이라는 식이었다. 그런가 하면 "보물을 숨긴 비기(秘記)여서 이 기록을 해석하는 사람만이 보물을 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왜 신비의 침향이 이렇듯 보물로 전해지게 되었는지 잘 알 수 없다.

20세기의 우리 사회에서 침향은 더욱더 그 본연의 모습을 잃어 가고 있다. 희귀 약재로서 한야방에서 용뇌와 함께 고급 약재로 취급되고 있도, 사찰에서는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기보다는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향으로 쓰이고 있다. 그것들의 대부분은 수입되는 "대만산"의 침향을 이용한다.

그러면 실제로 우리 역사 기록상에서 보여지는 침향의 용처나 중요성은 어떤 것일까? 물론 아주 명확하게 침향의 용처가 확인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침향목이 본래의 불교적 의미를 상실치 않은 경우로는 [삼국유사]에 보이는 것처럼 사리보관함 중 가장 으뜸으로 침향 합이 거론되는 것이나, 침향이 불상 조각 재료로 이용되었던 사례를 들 수 있다. 신라 경덕왕 대에 당나라 대종(代宗)을 위해 침향목을 만들었다는 "만불산"([삼국유사]권2만불산)과 고려 의종의 명으로 침향목으로 만든 관음상([고려사] 의종 5년 4월 을유조) 등이 그 예이다. 그러나 이들 불상의 경우도 매향의 결과 얻어진 침향목을 재료로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매향의 절차나 경위 침향의 모습 등에 대하여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한편 고려시대에는 중국사신들이 침향을 가져와 바치는 사례가 기록에 자주 보이는데 이를 통해 느낄수 있는 침향의 용도나 가치는, 그것이 침향에 대한 이 같은 인식은 조선시대에 와서 종교적 의미가 퇴색되면서 점차 왕실을 중심으로 신비한 약재로 전용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조선시대 기록에 나타나는 침향은 모두가 약재로서의 효용을 강조한 것에 지나지 않고 [조선왕조실록]에는 모두 약재로서 수입하는 물품명으로 침향이 등장하고 있다.


결국 매향의 그 크고 깊고 오랜 염워은 본연의 모습과 의미를 잃은 채우리에게 잔상으로만 남아 있는 셈이다. 실제 이같은 매향의 의미는 조선 후기 실학자인 정동유가 지은 [주영편]에서도 고성 삼일포 매향비를 말하면서, "매향을 하여 복을 빌었다는 것은 듣지 못했으며,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처럼 매향의 전통이 정사의 기록에 전혀 보이지 않고, 후대의 지식인들이 파악하지 못하였던 것은 어쩌면 매향의식이 가진 민간 신앙적 성격 때문일 것이다.

 

 

2010.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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