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창녕군

70여년 해로한 노부부의 보금자리...창녕 술정리 하씨초가

임병기(선과) 2010. 1. 4.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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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어둔 베란다 창문 너머로 아카시 꽃향기가 집안 가득히 밀려왔다. 계절은 벌써 연두색 향연이 끝나고 초여름 녹음을 전해오는 오월이다. 오늘은 문화유산 답사 동호회원들과 이방면 무심사 석불좌상과, 옥천사지 폐탑, 불상 대좌, 당간지주부재 등 경남 창녕의 비지정문화재 답사 일정이 잡혀 있어 겸사겸사 술정리 하씨 가옥으로 향했다.

 

 

술정리 동탑 주변 발굴 때문에 펜스를 두른 집 앞에는 예전에 없었던 작은 주차공간이 있었고, 복원한 문간채의 억새로 이엉을 올린 지붕은 쪽진 머리에 단아한 여인의 자태이다. 초가는 2007.1.29일 문화재청 공지로 “창녕 술정리 하씨 초가”로 지정명이 변경되어 있었다. 문화재 답사, 특히 고택 방문 때마다 느꼈던 현실과 동떨어진 명칭이 정리된 것은 늦은 감도 있지만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현풍 도동서원에 배향되는 한훤당 김굉필의 외손자이며 성주 회연서원에 모셔진 한강 정구선생이 창녕현감 시절에 지은 정자이름에서 유래된 술정리, 거주내력(하씨), 가옥의 형태(초가)를 함축하는 명칭이라고 한다. 전통적인 천연스런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지닌 초가는 최근에 복원된 문간채, 사랑채, 안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억새지붕인 안채만 중요민속자료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다.

 

 

 

문간채를 들어서면 왼편으로 사랑채 중문이 보이고 우측은 안채로 향하는 골목 같은 진입 공간이다. 예전에는 중문으로 들어가 사랑마당을 거쳐 안채로 출입했겠지만 지금은 거주하는 분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바로 안채로 출입할 수 있다. 하씨 초가도 유교 사회의 남여 유별을 상징하는 전통 가옥 배치처럼 여성 공간인 안채가 정면으로 노출되지 않도록 장독대 바깥으로 내외담을 쌓았다.

 

 

사랑채 중문이 닫혀 있어 안채로 들어갔더니 할머니 혼자서 안마당 텃밭에 계셨다. 할머니의 부지런한 손놀림으로 초가는 사람이 거주하지 않은 고택 답사에서 느낄 수 없었던 사람내음 가득하며, 고풍스럽고 윤기 나는 세간살이는 비구니 사찰 보다 더 정갈했다. 할머니는 17세에 현풍 김녕김씨 집안에서 시집 온지 70년이 되어가며 처음부터 이집에서 생활하셨다고 한다. 두 차례 뵙고 좋은 말씀을 들었던 90세인 하병수 옹은 가벼운 요통으로 병원에 물리 치료를 받으러 가시어 뵙지 못했지만, 할머니를 뵐 수 있어 여간 다행스럽지 않았다. 왜냐하면 민가, 고택 답사는 방문객의 주관적 시각이 아니라 살고 있는 분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것이 올바른 답사이기 때문이다.

 

 

초가는 조선 영조 36년(1760)에 상량하여 250여년 이어온 집이지만 흐트러짐 없이 의연하다. 잔디가 곱게 깔린 안마당에는 사랑채와 문간채에서 안채로 출입하는 사람을 위해 작은 돌을 징검다리처럼 인(人)字형으로 깔아 ‘퐁당퐁당 돌을 던지자’로 시작되는 동요가 절로 입가에 맴돌았다. 억새로 엮은 초가는 一자형 홑집으로 서쪽부터 작은방, 대청, 큰방, 부엌 네 칸이며 방 앞에는 쪽마루를 내었다. 기단은 막돌흐튼층 쌓기로 낮게 조성하고 덤벙주초에 방형기둥을 세웠다. 벽체는 최근 황토로 맥질한 듯 황토 고유의 온화한 색조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우리 전통 가옥의 지붕은 자연환경에 순응하며 쉽게 획득할 수 있는 재료를 사용했다. 벼농사를 짓는 대부분 민가에는 볏집, 산간 지방 화전민 가옥의 나무껍질을 이용한 굴피집, 굵은 소나무를 잘라 널판을 지붕에 올린 너와집, 점판암 재료인 너새로 지붕을 얹었으며, 하씨 초가는 늪지와 화왕산에서 채취가 용이한 억새로 지붕을 이었다.

 

 

 

예전 억새지붕 모습이 궁금하여 할머니에게 여쭈었더니 한숨부터 먼저 내시며 예전 지붕은 동글하니 참 예뻤지만 지금은 펑퍼짐하여 옛 멋이 없다고 하셨다. 아마 우리네 초가집의 유려한 지붕곡선의 미감을 의미한 것 같았다. 그 이유가 과거 우포늪을 비롯하여 늪지에서 채취한 쇄(억새)는 가늘고 길며 탄력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몇 년 전에 올린 현재 지붕은 늪지의 쇄가 아니며 쇄와 대나무(산죽)를 혼합하여 수명이 길지 못하지만 예전 지붕은 30년 이상 견디었다고 덧붙이셨다. 늪에서 억새 채취가 쉽지 않은 까닭이 습지 보호를 위한 람사르 협약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술정리 초가의 특징에 관해서는 오늘은 출타중인 어르신에게 들은 이야기가 뚜렷이 기억난다. 당시 하병수옹은 흰 구두를 신고 빨간 베레모를 착용한 멋쟁이 스타일로 일행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가옥의 특징과 내력을 흥미진진하게 설명해주었다.

 

우선, 기둥은 모두 자귀로 쪼아서 만들었고, 못을 일체 사용하지 않았으며. 둘째, 대청 우물마루는 상부만 자귀로 다듬고 마루 아래는 나무의 원형을 그대로 살렸다. 셋째. 할머니의 손때가 고스란히 배여 윤기가 잘잘 흐르는 마루에 누워서 보면, 서까래가 드러난 연등천정이지만 서까래 위에 대나무 산자를 곱게 엮고 그 위에 흙 대신 억새로 마무리 하였으며, 큰방, 작은방 천정에는 보온과 습기 방지를 위해 흙으로 마감했다고 했다.

 

 

술정리 하씨 초가지붕의 처마도 깊은 편이다. 처마 깊이, 즉 물매는 강우량과 일조량을 고려하여 서까래 경사로 조정했다. 물매에 의해 한 여름의 볕은 처마에 걸려 대청과 방을 시원하게 하며, 반대로 겨울 볕은 마당에 반사되어 마루 안까지 깊게 들어온다. 오늘 햇볕은 여름과 겨울을 아우르는 봄볕으로 낮은 이벌대 기단위의 죽담에 가득하다.

 

 

고택 답사에서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알 수 있는 한옥 배치는 음양의 조화를 고려하여 남, 북향 가옥은 부엌을 동쪽, 동, 서향 가옥은 부엌이 북쪽에 자리한다. 하지만 술정리 초가는 남향집인데도 부엌이 동쪽에 위치한 까닭을 하병수 옹에게 여쭈었더니 이 집을 방문한 풍수지리학자들은 화왕산 화기를 누르려는 비보책으로 설명했다고 했다. 또한 현재 채마밭 자리가 허해 보이는 까닭은 그 자리에 있었던 골방, 디딜방앗간 채가 헐렸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초가 못지않은 볼거리는 기화요초가 형형색색의 꽃을 다투어 피우며 봄의 향연을 열고 있는 안마당 꽃밭과 안주인의 곰살맞고 정성이 가득한 살림 솜씨다. 장독대를 비롯하여 마루, 부엌 등의 살림살이는 살아 숨 쉬고 있으며, 전통적인 농촌생활의 필수품이었던 탈곡기, 멍석, 키, 사다리, 맷돌, 돌확, 반닫이 등이 집안 여기저기에 가지런하게 옛 모습을 지닌 채 남아 있어 민속박물관에 들린 듯하다.  

 

 

 

예전처럼 많이 소비되지는 않겠지만 사랑채 뒤, 안채 작은 방 옆과 뒤란에는 겨울을 지내고 남은 장작더미가 쌓여 있다. 유년 시절 조부님은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의 기준을 여름날 두엄 높이와, 월동 준비용 나뭇단으로 가름하셨다. 나뭇단이 마당 가득 여러 동 쌓인 집은 틀림없이 마을에서 부지런한 사람으로 입소문이 자자한 집이었다고 했다. 당신께서도 눈바람을 막기 위하여 나뭇동을 짚으로 싸고 새끼로 동여 맨 후에는 북풍한설 살을 에는 추위도 걱정되지 않았다고 했다. 잊혀져가는 우리 삶의 원형질의 하나가 나뭇단이 아닐까?

 

 

뒤란으로 돌아가면 안주인의 정갈함과 부지런함에 또다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경복궁 교태전 후원의 아미산 조경에 견 줄 수는 없지만 일반 민가에서 흔치 않는 3단으로 화계를 쌓은 후원에는 녹음방초 우거지고 꽃향기 가득하다. 대청 쪽문을 열면 후원의 청량한 바람이 들어와 집주인은 여름 한 철을 시원하게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굴뚝은 남부지방 굴뚝에 비해 다소 높으며 수더분한 초가집에서 유일하게 황토와 암키와 조각으로 단장한 모습이다. 연기 배출 용도와 더불어 후원과 비례를 감안하여 높게 조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뒤란을 돌아 나와 텃밭에 계시던 할머니에게 몇 가지 질문을 드렸다. 문간채도 복원되었는데 할머니의 소원은 무엇인지요? 잠시 머뭇하더니 “디딜방앗간채 복원과, 안채를 수리 하면서 큰방, 작은방 띠살문여닫이 안쪽의 문(완자문 미닫이)을 걷어내고 다른 문(격자문 미닫이)을 달았다며 아직 창고에 보관중인 본래 미닫이로 교체하였으면 좋겠다고” 했다.

 

본래의 문

 

멀쩡한 창살이었고, 오랜 세월동안 할머니에게 친근하고 익숙한 완자문 미닫이를 바꾼 이유를 모르겠다. 그런데 미닫이창을 교체하고도 문화재 안내문은 수정하지 않고 여전히 완자문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전국의 많은 가옥을 방문해보았지만 대부분 집은 주인이 거주하지 않거나, 답사객의 무분별한 행동으로 인해 대문을 개방하지 않은 경우가 비일비재 했다. 봉제사 접빈객을 중요한 덕목으로 삼는 명문 종가에서도 안채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어 사랑마당에서 종손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초가지붕에 하얀 박덩이가 옹기종기 모여 앉은 만추의 서경과 한가롭고 포근한 고향의 정취가 되살아나는 술정리 하씨 초가의 노부부는 그런 기우를 불식시키고 아스라이 멀어져 간 향수를 자아내어 추억에 젖게 했다.

 

 

우리가 술정리 하씨 초가에서 느끼고 깨우쳐야 할 마음가짐은 초가의 외형적인 모습이 아니라 70년을 해로한 노부부의 정겨운 삶, 정갈하고 윤기 나는 농가 살림집의 원형, 고향처럼 아늑하고 편안한 분위기다. “내가 죽은 후에 우리 집이 어찌 될지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는다.”는 할머니의 말씀이 아니라도 지자체에서는 현재처럼 살아 있는 모습의 초가 보존을 위해 다양한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일부 지역의 가옥, 고택처럼 생명력을 잃은 박제품 형상의 집으로 남거나 흉물스럽게 방치하여 폐가로 전락된다면, 그것은 우리 민족의 정신적 고향인 농경사회 주거문화의 원형질 상실로 이어질 것이다.

 

 

2009.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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