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남해군

남해...남해의 석탑

임병기(선과) 2009. 12. 2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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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가는 길/유배시첩.1..고두현

 

물살 센 노량 해협이 발목을 붙잡는다.
선천(宣川)서 돌아온 지 오늘로 몇 날인가.
윤삼월 젖은 흙길을
수레로 천 리 뱃길 시오 리
나루는 아직 닿지 않고
석양에 비친 일몰이 눈부신데
망운산 기슭 아래 눈발만 차갑구나.
내 이제 바다 건너 한 잎
꽃 같은 저 섬으로 가고 나면
따뜻하리라 돌아올 흙이나 뼈
땅에서 나온 모든 숨쉬는 것들 모아
화전(花田)을 만들고 밤에는
어머님을 위해 구운몽(九雲夢)을 엮으며
꿈결에 듣던 남해 바다
삿갓처럼 엎드린 앵강에 묻혀
다시는 살아서 돌아가지 않으리.

 

9월 어느 날. 남해에서 날아온 엽서 한 장. "고두현 시인과 함께 떠나는 남해문학기행" 소식에 잠시 잊었던 그리운 사람이 떠올랐고,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바다위에 걸려 있는 이슬다리가 스쳐 갔다. 과거에 무슨 인연을 맺었길래 고향만큼 자주 생각나고 찾아오는 횟수가 잦은지 알 수 없다.

 

이슬다리가 보이는 이자리에 서면 아스라한 아름다운 추억과 익숙한 해풍의 촉감 때문에 늘 살짜기 흥분된다. 혼자임이 행복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가슴속으로 전해온다. 아직 기행팀과 약속 시간은 여유가 있어 남해의 옛님을 찾아 혼자 길을 나섰다.

 

 

3년전에 찍은 사진이다. 

 

보리암 삼층석탑. 빼어난 절경의 금산, 남해바다 다도해의 아름다움과, 해수관음보살의 미소에 젖어 놓치기 쉬운 석탑이다.  2층 기단, 하기단에는 양우주와 탱주를 새기고 사이에 2개 안상을 조각하였다. 상기단 갑석은 폭이 지나치게 줄었으며 탑신 받침은 2개를 두었다. 상기단 면석과 탑신 몸돌에는 양우주가 보이고 옥개받침은 각각 3단이다. 낙수면 물매가 급하며 추녀의 반전은 급하지 않다. 상륜에는 보주만 남아 있다. 고려시대의 탑으로 추정한다.

 

보리암 석탑과 시대적 편년은 맞지 않지만 달빛에 젖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김수로왕비 허태후가 인도에 갔다가 돌아올 때 풍파를 만나 건너오지를 못했다. 그런데, 허태후가 탄 배에 파사석(인도에만 있는 석재)을 싣고 오니 아무 사고 없이 무사히 건너오게 되었고,  이 돌을 재료로 원효대사가 보리암 앞에 세웠다고 전해온다." 또한 이탑위에 나침판을 올려두면 북쪽을 향하지 못하는 불가사의한 일이 생긴다고 한다.

 

 

정지석탑. 고려 우왕 9년(1383) 정지 장군이 관음포에서 왜구를 격파하여 전쟁에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남해군민이 만든 탑으로 전해온다. 자연바위를 받침 삼아 좁고 두터운 방형 지대석위에 기단 없이 1~4층 탑신은 방형, 옥개석과 한 돌인 5층 탑신은 조그만 원형이다. 5층 탑신은 처음 부터 이렇게 조성하였는지는 불분명하다.

 

옥개석은 기울기가 없이 평평 모서리로 갈 수록 희미한 반전이 보인다. 옥개석과 몸돌의 재질도 서로 다르게 보여 본디의 모습인지 의문스럽다. 일반적인 석탑 형식에 비해 둔중하고 투박하며 비례가 맞지 않으나 소박한 모습의 탑이다.

 

 

정지 장군은 어떤 분인가?

"나주 문평면 죽곡(竹谷)에서 정이(鄭履)의 외아들로 태어난 정지장군(1347(충목왕 3년)∼1391(공양왕 3년은 신체가 장대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열심히 독서하여 많은 서적에 능통하였다고 전한다. 1374년 중랑장(中郞將.28세)이 되었을 때 왜구 토벌책 및 토적책(討賊策) 10조를 건의하여 전라도 안무사(按撫使)겸 왜인추포만호(倭人追捕萬戶)가 되었다. 1377년~1378년(우왕 3~4)에 걸쳐 예의판서(禮儀判書)로 있으면서 순천도병마사(변경의 군사문제를 의논하던 회의기관)와 겸임하여 1378년 순천·낙안·영광·동복·광주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섬멸하여 전라도순문사(巡問使.)가 되었다.

 

1382년 해도원수로 남원에 침투한 왜적을 물리쳤으며, 1383년 고려 우왕(9) 전선 47척으로 나주, 목포에서 경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 5월, 왜선 120척이 경상도 해안지방으로 침략하여 노략질을 일삼는다는 소식을 접하고 즉각 남해 관음포로 진출하여 전선 17척을 불살라 왜구를 격퇴시킨 관음포 전투 활약상에 대해서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으며 남해군민들은 남해를 구해준 정지장군에 대한 보은으로 석탑을 세워주었다. 정지석탑은 보은탑인셈이다. 년(우왕 14) 안주 도원수로서 요동출정에 참여했다가 이성계를 따라 회군에 동조한 뒤 2등공신이 되었다.

 

그후 지문하부사(문하시중(門下侍中)을 보좌하여 궁정 전반을 관장하는 역할을 담당,종2품)라는 자리에 올랐으며 해군사령관에 양광, 전라, 경상, 강릉도의 도지휘처치사(4도의 육군총사령관) 까지 겸하여 왜구의 토벌에 큰 공을 세웠다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개경에 돌아와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옹립한 후, 수시중(守侍中)과 도총중외제군사(都摠中外諸軍事)가 되고 창왕도 폐위 시키고 공양왕을 옹립하여 문하시중이 되어 군사적 실권자의 자리를 굳힌후1392년 7월 공양왕을 원주로 내쫓고, 새 왕조의 태조로서 왕위에 올랐다.

 

이성계는 정지장군에게 수차례 관직 등용을 종용받았으나 두 임금을 섬길수 없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던 충의와 절개로 이름이 높았던 분으로 최영, 이성계와 함께 고려말 ‘3명장’으로 불렸던 인물이다. 후일 나라에서 장군의 공과 절의를 기리어 경렬사란 사당을 지어 장군을 모시고 있으며 경렬공 외에 설강 유사, 송설정 고중영, 구성 전상의 송암 유평, 정지장군의 9대손 충무공 정충신, 고중영의 아들 구암 고경조, 시은 유성익 등이 추배되었다."...출처/다음

 

 

정지석탑은 다른 이야기도 함께 전해 온다. 우선 보은탑, 무공탑을 사찰의 석탑처럼 조성한 예는 없기 때문에 사찰의 탑이라는 설이다.  주민들과 석탑 옆에 새겨진 비문에 의하면 예전에 망덕사라는 절이 소재했고, 행정명도 큰절을 뜻하는 대사리大寺리, 마을 이름도 탑동塔洞으로 사찰탑이라는 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참고로 이번 남해문학기행 가이드로 남해에 거주하는 지인 김성철님은 고려사와 종경록(?)의 기록으로 미루어 남해를 팔만대장경의 판각지로 확신하며 고현면 대사리 일대를 유력한 지역으로 추정했다. 지금도 여름 태풍이 급습하여 지리산에 산사태가 발생하면 아름드리 나무가 떠내려와 관음포 근처로 밀려온다고 했다. 대장경판의 원료로 사용된 산벚나무 등 지리산에 자생하는 나무로 만든 판각 재료의 수급과 연관성이 깊다고 추측할 수 있는 사례이다.

 

 

다정리 석탑.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후에 용문사에 귀속된 다천사에 있었던 석탑으로 전한다. 차밭과 정자로 인해 다정茶丁으로 불리우는 마을 건너 밭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대나무가 둘러싼 탑 뒷쪽으로는 석축이 남아 있고 석탑이 자리하여 다천마을도 탑골로 불리어지고 있다. 

 

 

지대석, 기단은 멸실 또는 매몰되어 몸돌 2개,옥개석 2개,상륜의 보주만 남아 있다. 비례로 보아 3층 몸돌과 옥개석이 멸실돤 탑으로 추측된다. 몸돌에는 양우주를 새겼고 옥개 받침은 각각 3개이다. 옥개석 모서리에는 반전이 있고 낙수면 물매는 급하며 옥개석에 새겨진 몸돌 받침은 2단 각형이다.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한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비수님, 남해대교님과 조우하여 남해탈박물관 근처에서 맛난 점심을 대접 받았다. 언제나 고마운 인연이다. 다정리 마을 입구에서 길을 안내해준 아주머니, 들판에서  정답게 인사를 주시던 촌부 모두들 정이 가득한 분이다.

 

다정茶丁 마을이지만 내게는 다정다감하고  살가운 사람내음과  인정 넘치는 남해땅 다정多情 마을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당항리 느티나무. 당항리 석탑으로 가는 길에 만난 느티나무. 마을의 역사를 간직한 채 주민들과 희노애락을 나누었을 약 500년 된 할아버지 나무로  텃주대감이며 수호신이다. 여느 마을 처럼 당산목으로 추앙받으며 주민들은 마을의 풍요와 무병 안녕을 위해 정월 보름이면 당산제를 올릴 것이다.

 

 

당항리 신흥사지석탑. 당항마을 마을회관 앞에 위치한다. 신라 신문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오는 신흥사지 3층 석탑이다. 신흥사는 폐사되고. 탑도 여러차례 이건되어 제모습을 잃었으며 특히 상륜에는 다른 석탑 부재를 마구 쌓아 혼란스런 모습이다.


현재는 기단부는 멸실되고 방형 받침위에 탑신을 올렸다. 1층 몸돌과 1~3층 지붕돌, 상륜의 일부만 본디의 부재로 보인다. 2.3층 몸돌은 복원한 듯하다. 그나마 1층 몸돌은 뒤집혀져 있다. 모서리  반전이 약하며, 옥개석, 옥개받침은 희미하게 3단으로 표현 하였다. 려말선초 석탑으로 전해진다.

 

 

1층 몸돌이 뒤집혀 복원되어 있다.

 

 

석탑은 만신창이가 되어 안태고향을 지키고 있지만  이제는 당항리 주민들에게는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이다.  신흥사 불탑이었지만 고향 떠난 사람들에게는 향수의 탯자리며, 돌아갈 마음의 원형질이다. 주민들에게는 풍요 기자 벽사 안녕의 귀의처이며 정신의 안식처로 자리매김한 석탑일 것이다.

 

 

남해의 가을은 벌써 자리를 털고 일어섰고 부지런한 민초들은 벌써 봄날을 준비하고 있다. 오늘 내가 만난 것은 남해의 탑이 아니라 탑을 귀의처로 삼으며 척박한 자연환경을 비옥한 땅으로 일군 억척스럽고 경외스런 민초들의 삶의 모습과 투박한 말씨에 묻어나던 사람내음이 아닐런지......

 

 

2009.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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