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춘천시

춘천...청평사

임병기(선과) 2009. 4. 29.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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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답사 동선은 유난히도 지난 군시절을 돌이켜 보게하고, 졸업후 잊혀진 친구 놈들을 떠올리게 했다. 인제 원통에서 근무했던 친구놈들이 구절양장의 소양호를 끼고 휴가를 나왔다며 한 잔 술에 소양강 처녀를 젓가락 장단에 맞추어 구성지게 불렀었다. 벌써 30년전 저편의 아득한 빛바랜 앨범속의 추억이 되었지만...

 

화천 간동면 성불사지 석불,석장승을 찾지 못하고 내쳐 달려 청평사 입구에 도착했다. 청평사 동선은 소양강 댐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청평사 입구에 하선하여 도보로 진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게으른 중생은 좁은 산길도 아랑곳 않고 달구지를 몰았더니 입구에서 제지를 받았다.

 

중국 원나라 공주와 상사뱀. 산길 도중에 달구지를 세우고 계곡을 벗삼아 춘흥을  느끼려는 순간 묘한 인물상이 눈길을 사로 잡았다.  뱀을 희롱하는 인도 저자거리의 풍경이 스쳐 갔지만 애닲은 사연에 나의 젊은 날이 생각 나더라. 짝사랑 님 생각에 밤을 하얗게 보내고, 부치지 못한 편지를 책갈피에 오랫동안 접어 두었던 추억이 없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 아닐까?

 

 

거북바위

 

 

구성폭포. 계곡을 따라 전개된 비경에는 처처에 공주의 사연이 얽혀 있다. 공주가 묵었던 동굴은 ‘공주굴’로, 목욕을 했던 웅덩이는 ‘공주탕’이라 전해오고 있다. 그런저런 달빛 이야기를 곁에서 지켜보았을 구성폭포는 지금도 아홉 가지 소리를 내며 물줄기를 떨어트리고 있다.

 

 

 

청평사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진락공  이자현의 부도. 고려시대 유명한 학자인 이자현(李資玄, 1061~1125)은 청평사 전신인 백암선원을 중창하여 문수원이라 하고, 이곳에서 나물밥과 베옷으로 생활하며 선을 즐겼으며, 『능엄경(楞嚴經)』을 연구하면서 혼자 수도하여 불도를 깨달았다고 한다. 예종은 사람을 시켜 다향(茶香)과 금백(金帛)을 보내고 여러번 궁궐로 청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고 평생을 수도생활로 일관하였다고 한다.

 

 

이자현 오도송

 

    家住碧山岑

    내가 머무는 푸른 산기슭

 

    從來有寶琴

    옛부터 보배로운 거문고 있어

 

    不妨彈一曲

    한 곡조 타는 일이야 무방하지만

 

    祗是少知音

    이 소리 듣는 이 얼마나 되리

 

공주탑. 이제 청평사와 공주와 상사뱀 설화 속으로 들어가보자. 글은 전통사찰정보에서 옮겨왔다.

 

중국 원나라 순제의 딸은 매우 아름다운 미모를 갖추고 있었다. 궁중을 출입하는 자들은 하나같이 연정을 품고 있었지만, 신분의 차이가 있어 감히 마음을 표하지는 못하였다. 어느 날 한 말직의 청년 관리는 궁전 뜰을 거니는 공주의 모습을 보는 순간 짝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공주에게 사랑의 고백조차 할 수 없었던 그는 마침내 상사병을 앓다가 죽고 말았다. 청년은 죽는 그 순간 맹세를 했다.
 
“이 세상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 내 죽어서라도 그녀와 함께 하리라.”
 
어느 날 낮잠에서 깨어난 공주는 몸이 이상하여 살펴보다가, 난데없이 뱀이 몸을 휘감고 있는 것을 보고 기겁을 하였다. 뱀은 밤이고 낮이고 떨어질 줄 몰랐다. 이 사실을 안 왕과 왕후가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뱀을 쫒으려 하였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다시 공주의 몸을 휘감는 것이었다. 죽고만 싶었던 공주는 마침내 궁중을 뛰쳐나왔고, 죽기 전에 명산대천이나 유람하겠다며 중국 천지를 다 돌아 다녔다. 그리고 배를 타고 고려로 와서 금강산 구경 길에 올랐다가 청평사가 유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참배하고자 하였다.
 
청평천을 건너 회전문 앞에 이르렀을 때 상사뱀은 공주가 걸음을 걷지 못하도록 요동을 쳤다. 10여 년 동안을 함께 있었지만 한번도 이와 같은 일은 없었으므로 공주는 이상히 여기며 타일렀다. “나는 지난 10여 년 동안 한번도 너를 거슬려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내가 좋아하는 절 구경을 못하게 하느냐? 만일 들어가기 싫거든 잠깐만 여기에 떨어져 있으라. 속히 절 구경을 하고 돌아와서 너와 함께 가리라.”
 
이 말을 들은 뱀은 곧 몸에서 떨어져 나왔고, 10년 만에 홀몸이 된 공주는 구성폭포를 맞으며 몸을 씻고 절 안으로 들어갔다. 법당과 절의 이곳저곳을 살피던 공주는 가사(袈裟)를 만들기 위해 아름다운 비단과 바늘이 널려 있는 방을 발견했다. 문득 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옷인 가사를 만들고 싶다는 충동으로 아무도 없는 그 방으로 들어간 공주는 열심히 바느질을 했다. 그리고는 황급히 뱀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뱀이 다시 공주의 몸을 감으려 하는 순간,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치면서 벼락이 떨어져 상사뱀이 새까맣게 태워 죽여 버렸다.
 
마침내 뱀으로부터 해방된 공주는 부왕에게 자초지정을 아뢰었고, 순제는 부처의 은덕에 감사하며 이 절에 공주탑을 세웠다고 한다.

 

구성폭포 뒷편 산자락에 위치한 석탑.  상.하 기단에는 우주와 한 개 탱주가 모각되었다.상기단 갑석에는 덧서까래를 표현하였고 몸돌과 옥개석은 한 개의 돌이다. 몸돌에는 우주가 보이고 옥개받침은 4개이며, 상륜은 멸실되었다.

 

신라 석탑을 계승한 고려 초기 탑으로 보여진다. 공주와 상사뱀의 이야기도 재미있지만, 탑의 위치로 판단하면 비보탑으로도 여겨 진다.

 

 

고려 정원의 영지. 영지는 청평사 뒤의 오봉산이 비치도록 되어 있으며, 연못 가운데는 삼신산(三神山)을 상징하는 세 개의 큰 돌 보인다. 이자현이 조성했다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정원으로 알려진 고려정원은 청평사 구석구석 모든 곳에 걸쳐서 펼쳐져 있다. 문화재청 자료를 가져왔다.
 
" 고려시대의 영지(影池)와, 거기에서 400m쯤 떨어진 청평사 계곡 하류의 정원조성용 암석 및 석축, 그곳에서 다시 2㎞쯤 떨어진 상류에는 이 정원을 만든 이자현이 새긴 ‘청평식암(淸平息菴)’이라는 각자(刻字)가 새겨져 있어 기록상에 나타나 있는 영지 중심의 대규모 고려 정원임을 입증하고 있다.
 
또한 구성폭포에서 식암에 이르는 2㎞ 길, 9,000여 평의 아주 너른 지역에는 계곡을 따라 주변의 자연경관을 최대한으로 자연스럽게 정원 안으로 끌어들여 영지에 연결시켰으며, 주위에 정자와 암자 등을 세우는 등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여 선(禪)을 익히는 정신수양의 도량답게 짜임새 있는 구성을 보이고 있다." 

 

 

긴 계곡을 거쳐 청평사 중정에 도착했지만 일주문은 보이지않고 잣나무 두 그루가 일주 처럼 나란히 서서 두 팔 벌리고 반긴다.

 

"청평사가 창건된 것은 고려시대의 일이다. 973년(광종 4) 중국의 영현(永賢) 선사가 이곳 오봉산에 절을 짓고 백암선원(白岩禪院)이라는 참선도량을 열었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백암선원은 폐사가 되었다. 1068년(문종 22) 지금의 춘천에 해당하는 춘주도(春州道)의 감창사(監倉使)로 부임한 이의(李의)는 오봉산의 빼어난 경치를 사랑하여 백암선원의 옛 터에 절을 짓고 보현원(普賢院)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 절이 대찰의 면모를 갖춘 것은 이의의 아들 이자현(李資玄)이 이곳에 머물고부터다. 1089년(선종 6) 과거에 급제하여 대악서승(大樂署丞)이 되었던 그는 뜻하는 바가 있어 벼슬을 버리고 아버지가 세웠던 보현원으로 들어갔다. 당시 이곳에는 도둑과 호랑이와 이리가 들끓었지만 그가 들어오자마자 모두 자취를 감추었고, 자신은 문수보살의 진신을 두 번이나 친견하였다고 한다.
 
이에 이자현은 모든 것이 맑게 평정된 산이라 하여 산 이름을 청편산(淸平山), 문수 보살의 큰 지혜로 불법의 가장 요긴한 뜻을 깨달아 얻는 도량이라는 뜻으로 절 이름을 문수원(文殊院)으로 바꾸고, 많은 건물과 견성(見性), 양신(養神), 칠성(七星), 등운(騰雲), 복희(福禧), 지장(地藏), 식암(息庵), 선동암(仙洞庵) 등 여덟 암자를 지었다."

 

 

 

회전문(回轉門). 천왕문으로 좌우에 사천왕이 시립할 공간을 두었다. 중앙 3칸이 회전문이고 좌우에 딸린 전각 때문에 폐쇄적인 느낌이 든다. 고색 짙은 기단은 옛시절 청평사 부재로 보여진다.

 
문의 이름을 회전문이라 한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일명 공주탑이라고 부르는 삼층석탑이 세워진 배경에 대한 전설처럼, 공주와 상삿뱀에 얽힌 전설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공주를 괴롭혔던 상삿뱀이 이 문으로 들어서려 했다가 하늘의 노여움으로 못 들어가고 죽어서 돌아섰다는 전설에 따른 것이다.
 
다른 하나는 중생에게 윤회 전생의 삶을 깨우치기 위한 것으로, 고통과 생사의 세계를 끊임없이 윤회하는 중생들의 삶을  해탈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 문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회전문을 통과하여 만나는 경운루. 회전문 석축처럼 초창기 기단을 활용하여 쌓았다.산지중정 가람 배치와 어울려 층단을 이루고 있으며 누하 진입하면 청평사 금당 대웅전 영역이다.

 

 

대웅전 영역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나한전,관음전 정면에 회랑을 조성하여 전형적인 산지가람의 口字형 가람배치이다. 단청이 화려하고 채색이 뚜렷하게 보여 근래에 불사을 마친 모양이다.

 

수도권에서 접근이 용이하여 찾는 사람이 많겠지만 섬속의 절이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고즈넉한 분위기도 조성하였으면 좋겠다.

 

 

청평사 금당 대웅전. 정.측면 3칸, 빗살 창호, 다포계 겹처마 맞배 지붕의 건물이다. 극락보전이 위치 했었다고 한다. 기단 장방형 석재와 소맷돌은 극락보전의 부재를 복원했다. 사진에는 담지 못했지만 소맷돌에는 태극문양과 측면에 대나무 처럼 보이는 기둥과 안상이 곱다.

 

 

대웅전 삼존불. 석가모니불. 좌우에 문수·보현 보살좌상이 협시하고 있다. 
 

 

극락보전.

 

 

아미타여래좌상.관음보살. 대세지보살
 

 

극락보전 옆 주목. 수령 500년.800년으로 추정.

 

 

有客 ... 金時習 

有客淸平寺

나그네 청평사에서

春山任意遊

봄 산 경치 즐기나니.

鳥啼孤塔靜

새 울음에 탑 하나 고요하고

花落小溪流

지는 꽃잎 흐르는 개울물.

佳菜知時秀

때를 알아 나물은 자랐고

香菌過雨柔

비 지난 버섯은 더욱 향기로워.

行吟入仙洞

시 흥얼대며 신선골 들어서니

消我百年憂

씻은 듯이 사라지는 근심 걱정.

 

 2009.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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