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구미시

구미...주륵사지 탑부재.금호리 석불입상

임병기(선과) 2009. 2. 10. 07:48
300x250
300x250

 

 

 

오래전 두어번 찾아 왔지만 오늘이 첫 만남이다. 도개에서 군위 소보로 향하는 길 우측 산록만 관심을 두었으니 반대편에 위치한 주륵사지 석탑부재를 만날 수 없었다.  도개면 다곡리(다항 마을)의 청화산 중턱 주륵사 절터의 폐탑. 자료에의하면 "조선 초기에 폐사에 가까워져서 1429년(세종 11)에 부사 이길배()가 남관()을 수리할 때 주륵사의 목재와 기와를 사용할 것을 상주하였다 한다."로 미루어 조선초 부터 옛영화를 잃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제는 문화재 안내문도 반듯하고 등산로도 가꾸어 접근이 용이하지만 마음 심사는 불편하기 그지 없다. 이렇게 심하게 도괴된 시기가 불과 얼마전이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타종교의 몰이해, 비뚤어진 시각, 자기자신, 종족, 가문의 영화를 빙자하여 마구 훼손한 문화재가 어디 한둘인가? 그래서인지 폐사지를 점령한 조선왕조 많은 왕비를 배출한 치맛바람 양반(?)가문의 묘소가 눈쌀을 찌뿌리게 했다.

 

 

 

석탑은 부재들이 많이 없어지고 기단부, 부재등이 매몰되어 탑의 전체 규모는 파악되지 많지만 옥개석으로 미루어 불국사. 경주 미동리, 창녕 술정리. 청도 봉기리 석탑과 버금가는 전성기의 석탑으로 추측한다. 

2층 기단,기단에는 우주, 탱주가 있을 모각되고, 옥개석에는 5단 받침을 두고, 낙수면이 완만한 반전을 이룬 추녀에 걸린 풍탁의 청아한 법음이 바람을 타고 청화산 자락을 오르내렸을 것이다.

 

 

자료에 의하면 "초층 지붕돌의 추녀 폭이 236cm, 2층 지붕돌 204cm, 3층 지붕돌 175cm이며, 5단 받침의 최하 폭이 제1 지붕돌의 경우 144cm, 2층 지붕돌 124cm, 3층 지붕돌이 107cm로 큰 탑에 속하며, 큰 규모의 지붕돌임에도 경쾌한 느낌을 준다.

 

또 탑 아래 부분 기단의 폭은 358cm, 위층 기단 면석의 높이는 117cm이다. 면석에는 모서리 기둥과 안 기둥이 새겨져 있다. 이 석탑은 8세기 후반이나 9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규모의 큰 탑이다."이라고 기록 되어 있다. 

 

 

금당터 소맷돌, 주초, 기단면석이 어지럽다.

 

 

아무런 근거도 자료도 없는 설을 풀어 보자. 현재사지로 과거를 유추하는게 무리겠지만 저만한 규모의 큰 석탑과 현재의 금당터는 부조화 아닌가? 금당터와 석탑터 크기가 대동소이하며 거리도 너무 짧아 우리장인들이 저렇게 옹졸하게 조성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우선. 현재 금당터는 주륵사 주불전인 금당터가 아니라 다른 불상을 모신 전각 또는 범종루로 보이며, 금당은 탑 뒷쪽 묘소 옆에 있지 않았겠는가? 이건 더욱 근거가 희박한 이야기지만 금당터가 아니라 본래에는 탑지이며  석탑이 있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인가?

 

현재 부재의 조합으로는 상상에 불과하지만 왠지 쌍탑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머리를 짓누른다.. 불국사 쌍탑. 봉기리도 쌍탑이었지 않은가? 술정리도 발굴이 진행되면 다른 단서 발견될지 알 수 없는 일이고... 주륵사지도 발굴을 시작하여 당당한 모습으로 복원되었으면 더욱 좋겠다. 

 

 

해평면 금호리 도리사 근처 오인마을에 위치한 석불입상이다. 금호리에는 최근 연지를 조성하여 많은 사진 작가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지만 석불의 존재는 모르고 있는 듯하다.  금호리 연지와 관련 신문기사를 옮겨왔다.

 

"가시연꽃은 산림청 보호식물 우선 순위 1호로 지정되어있는 우리나라 토종 연꽃으로  가시연꽃은 구미시 해평면 금호리에 있는 연지로 신라 불교 발생지인 도개면 모례정과 가까이 있으며 신라에 불교를 전해준 아도화상이 연지에 연꽃을 심어놓고 떠나면서 이 연못에 연꽃이 만발하면 내 정신이 살았있고 연꽃이 사라지면 내 정신이 살아진것이라~  그 후 해방후 1977년까지만 해도 이 연못에는 연꽃이 별로였으나 1977년 4월 초파일 부처님 진신사리가 발견되고 부터는 이 연못에 연꽃이 서서히 자리잡더니 동네 사람들이 연지를 정리하고 부터  가시연꽃이 자리하기 시작하여 전국 각지의 많은 사진 작가들과 관광객들이 이 가시연꽃의 군락을 보기위해 찾아오고 있다."

 

 

약 백년전 전주 이씨 다섯사람이 이주하여 마을 이룬 까닭에 오인동으로 불리우는 마을 개인주택 담벼락 아래에 계셨다. 삼도도 보이며, 긴귀는 어깨까지 닿았다. 통견의 법의지만 얼굴은 민초들에게 모두 내어 주었다. 불상과 광배는 하나의 돌이다.

 

인기척에 방문을 나오신 초로의 며느리는 마을에는 아들없는 집이 없지요라는 농담에 "우리 어머님은 아들이 여섯(?)이라고 시원스럽게 답하신다. 그런 자신감, 믿음이 마당에 모신 불상에 기인했을까? 아래가 묻힌 상태인 석불을 발굴하여 이제는 작은 전각속에 모셨으면 좋겠다.

 

 

나이 탓인가?

 

 온 몸 가득한 이끼가 연륜보다는 가슴을 아리게 한다.

 

2009.01.31 

300x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