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제천시

[스크랩] 제천...청풍 문화재 단지

임병기(선과) 2008. 9. 7. 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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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영루

 

이 누문(樓門)은 조선(朝鮮) 숙종(肅宗) 28년(1702)에 부사(府使) 이기홍(李箕洪)이 현덕문(賢德門)이라고 한 그 터에 고종(高宗) 7년(1870) 부사 이직현(李稷鉉)이 다시 중수(重修)하였다. 팔영루는 청풍부(淸風府)를 드나드는 관문으로, 정면 3칸·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북측의 돌계단을 딛고 올라서면 성누문(城樓門)답게 홍예(虹霓)를 쌓은 높은 대(臺) 위에 우뚝 서 있다.
 
내부에는 우물마루를 깔고 난간(欄干)을 둘렀으며, 고종조(高宗朝) 부사 민치상(閔致庠)의 청풍팔경(淸風八景)을 읊은 팔영시(八詠詩)로 하여 팔영루(八詠樓)라 하였다. 충주댐 건설로 인한 수몰지인 청풍면(淸風面) 읍리(邑里)에서 1983년 현위치로 이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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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곡리 고가

 

이 집은 곱은자 모양의 안채와 일자 모양의 곡간채 및 문간채로 구성(構成)돼 있으며, 안채 뒤 석축(石築) 위에 있었던 사랑채는 없어졌다. 사랑채는 따로 건축(建築)되지 않고 건넌방이 사랑방의 기능(機能)을 대신한다. 부엌 앞에는 우물마루를 깐 고방을 두어 식료품을 저장한다. 부엌과 고방에는 판자벽을 둘렀는데, 이런 기법은 건축연대(建築年代)가 오랜 집에서만 볼 수 있다.
 
문간채 주위에는 담장을 둘러 바깥마당과 구분하고, 대문간에 내외담을 설치해 밖에서 집안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했다. 특히 안채와 곡간채 사이에 담장을 둘러서 안마당과 구분함으로써 건넌방의 독립성과 아늑한 분위기를 조성한 점이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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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 석조여래 입상

 

충주댐 건설로 수몰된 청풍면 읍리에서 현재의 청풍강 옆 대광사 입구로 옮겨진 이 불상은 전체적인 조각양식을 볼 때 10세기 무렵의 작품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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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매우 작아서 우뚝해 보이며 사각형의 얼굴은 후덕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가늘면서도 두툼한 눈, 넓적한 코, 뚜렷한 인중은 자비로운 부처의 풍모를 잘 나타내고 있다. 두 귀는 양 어깨까지 길게 드리워져 있고 목에는 3개의 주름이 형식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데 옷주름이 두껍게 처리되어 신체의 윤곽이 거의 드러나지 않고 있다. 허리에는 치마를 묶은 띠매듭이 표현되어 있으며, 그 아래로는 U자형의 주름이 비교적 자연스럽게 흘러 내리고 있다. 손은 오른손을 들어서 손가락을 구부렸고, 왼손은 늘어뜨려 손가락을 펴서 밖으로 내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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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불 앞의 검은 돌은 소원을 들어주는 돌로도 불리우며 자기 나이만큼 남자는 우측, 여자는 반대로 돌리며 소원을 기원하면 성취된다고 한다. 우리님들 당장 달려 가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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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남루

 

조선 순조 25년(1825)에 부사 조길원이 세운 관청의 정문으로 고종 7년(1870)년에 고쳐 지었고, 1985년에 청풍문화재단지 안으로 옮겼다.

앞면 3칸·옆면 2칸의 2층 건물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1층은 3개의 문으로 되어있는데, 가운데 문은 부사가 출입했고 양쪽 문은 평민이 출입했다고 한다. 2층에는 난간을 둘렀으며 사방이 탁 트여 멀리있는 적의 동정을 살필 수 있도록 하였다. ‘도호부절제아문(都護府節制衙門)’이라는 현판은 건물을 세울 당시에 부사 조길원이 썼다고 한다.
 
 
천장(天障)은 연등천장이나 양측 합각부(合閣部) 밑에는 일부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다. 가구(架構)는 오량(五樑)이며, 처마는 부연(浮椽)이 있는 겹처마이다. 현재 이 누문(樓門)의 현판 "도호부절제아문(都護府節制衙門)"은 건립 당시의 부사 조길원이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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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병헌.응청각.한벽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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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병헌

 

금병헌(錦屛軒)은 명월정(明月亭)이라고도 하며 조선(朝鮮) 숙종(肅宗) 7년(1681)에 부사(府使) 오도일(吳道一)이 창건(創建)하였다. 그후 영조(英祖) 2년(1726)에 부사(府使) 박필문(朴弼文)이 다시 옮겨 개축(改築)하고 당(堂)의 이름을 금병헌(錦屛軒)으로 바꾸었다. 현판글씨는 권돈인(權敦仁)이 썼다.
 
옛 동헌(東軒)으로서 집회 및 집무를 처리했다고도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건물구조(建物構造)는 건평(建坪)이 40평으로 팔작지붕에 정면이 6칸 측면이 3칸으로 된 목조건물이다. 충주댐 건설로 금병헌이 있는 청풍면 읍리가 수몰되자 1983년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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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청각

 

19세기 초기의 건물(建物)로 보이는 이 2층 누각(樓閣)은 원래 청풍현(淸風縣) 객사(客舍)의 누각인 한벽루(寒碧樓) 옆에 나란히 세워졌던 것인데, 충주댐 공사로 인해 현 위치에 이건(移建)했다. 평면(平面) 구성(構成)은 전면의 협칸(夾間)과 그 2배 정도 넓이의 후면 어칸(御間)으로 이루어졌고, 협칸 한 끝에 3단의 목조 계단을 설치해 2층으로 오르내릴 수 있게 했다. 아래층은 창고로 사용한 듯 한데 다듬지 않은 덤벙주초 위에 둥근 기둥을 세워 그 사이에 흙벽을 쳤다.
 
위층은 전면만 둥근 기둥이고 나머지는 네모 기둥을 세웠고, 우물마루로 바닥을 깔았으며 그 주위에 머름형태의 평난간(平欄干)을 둘렀다. 건물(建物)의 구조(構造)는 1고주5량(一高柱五樑)이며 기둥머리에 쇠서(牛舌)가 1개 달린 초익공계(初翼工系) 건물이다. 홑처마 합각(合閣)지붕을 한 비교적 소박한 누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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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벽루

 

이 건물(建物)은 고려(高麗) 층숙왕(忠肅王) 4년(1317)에 청풍현(淸風縣)이 군(郡)으로 승격되자 세운 관아(官衙)의 부속건물이었다고 한다. 이 누(樓)는 정면 4칸 측면 3칸의 중층(重層) 팔작집으로, 서축의 누에 오를 수 있도록, 정면 1칸 측면 3칸의 측랑(側廊)이 부설돼 있다. 누의 공포(包)는 이익공(二翼工)이고 측랑(側廊)은 초익공(初翼工)이며, 누는 부연(浮椽)이 있는 겹처마이나 측랑은 부연이 없는 홑처마이다.
 
누의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고 천장은 연등천장이나, 동측 합각 밑을 가리기 위해 우물천장을 일부 가설하였다. 조선(朝鮮) 태종(太宗) 6년(1406)에 군수 정수홍(鄭守弘)이 중수(重修)하고, 고종(高宗) 7년(1870)에 부사 이직현(李稷鉉)이 중수하였으며, 1972년 8월 19일 수해 때 붕괴된 것을 1976년 4월에 다시 복원(復元)하였다.
 
밀양의 영남루(보물 제147호), 남원의 광한루(보물 제281호)와 함께 본채 옆으로 작은 부속채가 딸려 있는 조선시대 누각 건물의 대표적인 예이며, 세 건물 가운데 가장 간결하고 단아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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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림.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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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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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산리 고가

 

현재는 ㄱ자모양의 단독건물(單獨建物)만이 남아 있지만 일반적(一般的)인 예로 보아 안마당 앞에 사랑채가 있었을 것이다. 구조(構造)는 전퇴를 두는 1고주5량(一高柱五樑)이며 특이한 것은 대청 가운데 놓인 대공으로써 긴 첨차(詹遮) 위에 소로(小累)를 얹어 장혀와 종도리를 받도록 한 포대공(包臺工)을 설치(設置)한 점이다.
 
평면(平面) 구성(構成)은 중부지방(中部地方)의 보편적인 민가(民家) 유형(類型)을 따르지만 안방 뒤에 수장공간(收藏空間)인 웃방을 둔 점과 대청 한구석에 상제례(喪祭禮)를 위한 상청(喪廳)을 둔 점이 특징이다. 지붕은 건넌방쪽은 합각(合閣)으로 처리하고 부엌쪽은 박공으로 처리하여 고식(古式)의 기법(技法)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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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리 고가

 

우진각지붕의 현 살림채는 ㄷ자집으로서 앞쪽에 건물(建物)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바깥채가 있었으며 전체적으로 튼ㅁ자모양의 배치(配置)를 한 것으로 보인다. 평면구성(平面構成)은 안방과 건넌방을 대청(大廳) 좌우로 배치하는 일반적인 곱은자집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건넌방 앞에 부엌과 상방을 덧붙였다. 안방과 웃방 사이는 장지문을 설치해 틀 수 있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집에서는 그 사이를 벽으로 막아 버렸는데 이는 오래된 집에서만 볼 수 있는 방식이다.
 
3칸의 대청과 2개의 부엌은 집 규모에 비해 넓은 편이며, 남서쪽 상방 앞에는 툇마루를 놓아 접객 공간으로 이용했다. 둥근 통나무 굴뚝과 부엌 살창 옆의 코쿨은 태백산맥(太白山脈) 일대의 산간지대 민가(民家)에서 볼 수 있는 특징적인 것으로, 코쿨이란 관솔을 지펴 어둠을 밝히는 시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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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리 고가

 

이 집은 4칸 전우퇴(前右退)집으로 일반적(一般的)인 3칸집의 평면(平面)과 같이 부엌·안방·웃방을 나란히 배치(配置)하고 끝에 사랑방을 두었다. 안방과 웃방 앞에는 마루를 놓았고, 사랑방 앞에는 마루없이 한데부엌을 두는 대신 머리퇴에 툇마루를 놓아 손님을 맞을 수 있게 했다. 이 집에서 보이는 평면구성(平面構成)은 머리퇴를 가진 4칸집의 가장 대표적인 유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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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번이 3번째 방문이며 옛님의 숨결방에 답사기도 있다. 우리문화유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한 곳에서 다양한 문화재를 섭렵할 기회의 장이며, 청풍호반의 절경과, 영화세트장 등의 눈요기거리가 많다. 특히 아이들과 함께 벚꽃 흐드러지게 피는 계절에 나들이 겸 방문하면 금상첨화로 생각된다. 근데 입장료(\3400)가 왜 그리 비싼지????????????

 

자료 출처...문화재청

 

2008.08.07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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