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봉화군

[스크랩] 봉화...닭실 청암정

임병기(선과) 2008. 6. 7. 18:37
728x90

 

솟을대문

 

긴 하루의 마감을 충재 고택에서 해야만 했다. 안동에서 옛님들과 만남도 약속돼있지만 엄청난 폭우가 쏫아부어 더이상 이동은 무리었다. 지친 표정도 없이 차에서 먼저내려 솟을문으로 향하는 놈에게 샌들 갈아 신고 가야한다고 소리질러도 쇠귀에 경 읽기다. 종손 어른에게 애비 욕먹일려고 작정했는지 씩씩하다.

 

경북 봉화군 봉화읍 유곡(酉谷)1리는 우리말로 닭실마을이라고 불리운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이 금계포란(金鷄抱卵)형국, 그런 풍수는  황금빛 암탉이 둥지의 알을 품은 채 날개를 펼친 모습의 지형으로 큰 인물이 많이 나온다는 명당 터라고 한다.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경주의 양동, 안동의 내앞, 하회마을과 함께 삼남의 4 대 길지로 꼽은 닭실은 봉화읍에서 태백 방면 국도를 따라 가다가 봉화읍을 벗어나자마자 얕은 고개를 넘으면 멀리 보이는 전형적 배산임수의 마을이다.  

 

사랑채. 안채

 

본래는 현재 마을 진입로가 아니라 물야에서 봉화읍으로 내려오다 석천정사 안내문을 보고 좌회전 하여 석천계곡을 거슬러는 진입동선이었다. 현재도로는 소위 신작로로 일제강점기에 마을의 지기를 꺽기위해 건설되었다고 한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석천정사로부터 도보로 석천계곡을 거쳐 닭실마을로 걸어 들어오면 마을 분위기를 깊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이번 답사에 시도를 했지만 석천정사 앞이 물이 불어 이룰 수 없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사랑이 전개되고, 전형적인 口자 구조 형태 가옥의 사랑채는 객을  무한한 정으로 포옹하려는 듯 근엄한 대가집의 위엄보다는 따뜻한 정이 느껴진다.

 

누마루가 없어서일까? 편안함의 근원을 더듬으며 중문을 들어갈려는 순간 키가 크고 잘 생긴 청년이 "손님. 안채는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사진 촬영도 삼가해주십시요"라고 슬쩍 말을 남기고 문 안으로 사라졌지만 그 알 수 없는 무게에 위축되어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사당

 

사당은 정침 동쪽에 두는 것이 정설이지만 충재 고택은 반대편에 위치해 있다. 숨은 내력이 궁금하다.


서실. 충재

 

고택 답사 묘미의 하나가 집안 내력과 그분의 삶, 철학, 학문을 익히고 배우는 것이며 종손어른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다. 하지만 충재 선생님에 대한 기본적인 공부도 없이 앵무새처럼 몇마디 말을 펼치는 불경을 범하기는 싫어 네이버에서 옮겨온다.

 

"본관 안동. 자 중허(). 호 충재(冲) ·훤정(). 시호 충정(). 1496(연산군 2)에 진사가 되고, 1507년(중종 2)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지평 ·사성()을 거쳐 도승지가 되고, 1519년 예조참판이 되었다.

이어 삼척부사로 나가 있다가 이 해 겨울에 일어난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당했다. 1533년 밀양부사로 복직되었으며, 경상도관찰사 ·형조참판을 거쳐 한성부판윤을 지냈으며, 1539년 종계변무사(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춘추관지사()로 세자우빈객()을 겸하였다.

1545년(인종 1) 우찬성으로 의금부판사를 겸하였고, 이 해 7월 어린 명종이 즉위하자 원상()에 임명되었다. 8월 을사사화()로 위사공신()에 올랐으나 정순붕()의 반대로 삭훈()되고, 1547년(명종 2)에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된 죄로 구례()에 유배된 후, 삭주()에 이배()되어 배소에서 죽었다.

선조 초에 신원()되고, 좌의정이 추증되었으며, 봉화()의 삼계서원()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충재집(冲)》이 있다."


 

충재고택에는 선생이 아꼇던 근사록, 충재일기 7책, 중종으로부터 하사받은 책, 교서, 분재기(分財記), 호적단자 등 고문서, 충재와 퇴계 등의 서첩과 글씨 등의 서찰이 보물로 전해오고 있다.

 

공사가 완료되어 준공식을 앞둔 충재박물관에 들리면 귀한 자료가 열람 가능할 겁니다.  많은 책들이 전해올 수 있었던 이면에는 근세 혼란기와 한국동란 때 독에 책을 담아 당속에 묻어 분실과 소실 도난을 방지한 후손들의 눈물겨운 노력과 정성의 결과라고 한다.

 

 

 

충재 건너편에는 1526년 지었다고 알려진 정자 '청암정'으로 멀리서 보면 거북형상으로 보이는 바위 위에 지어졌다.눈썰미 있는 답사객은 보았겠지만 정자에 마련된 방도 온돌이 아니라 마루다. 처음에는 온돌이었으며 주위를 둘러싼 척촌천도 조성되지 않았다고 한다.

 

청암정을 처음 세운 후 방에 물을 지피자 바위가 소리내어 울었다고 한다. 마침 지나가던 고승이 "이 바위는 바위가 아니라 거북이므로 방에다 불을 지피는 것은 거북이 등에다 불을 놓는 것과 같다”고 하여 아궁이를 막고 바위 주변을 파내곤 못을 만들어 바위 거북에게 물을 주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실화이든 전설이든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하나 되어 그속에 융화하려는 우리민족의 정신 세계를 짐작할 수 있는 일화가 아닐 수 없다.

 

 

 

거북 모양의 큰 바위위에 정자를 세우고 성곽의 해자 모양 연못을 주위에 조성한 청암정에는 많은 나무를 심어 별서 정원 느낌마져 든다. 청암정은 6칸  마루에 잇대어 2칸  마루방 을 붙였다. 맞배지붕인 마룻방은 퇴를 내고 계자난간을 둘렀으며, 누마루는 팔작지붕으로 3면이 트여 바람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멀리 조망할 수 있다.


 

정이 듬뿍 묻어나는 돌다리. 척촉천에 석조다리를 세우고 두개 장대석을 이어논  다리다.  영남일보 정자를 찾아서 기사에는 "정자의 마루 위에는 퇴계 이황, 백담(栢潭) 구봉령, 관원(灌園) 박계현, 번암(樊庵) 채제공, 눌은(訥隱) 이광정 등 역대 명현들의 글이 현판으로 늘어서 있다. 남명(南冥) 조식이 쓴 것으로 전하는 청암정 현판과 미수 허목이 쓴 '청암수석(靑巖水石)' 현판이 정자의 품격과 위상을 더욱 높여주고 있다." 고 했다.


 

청암정...이퇴계

 

선공이 닭실에 집터를 점지하여(酉谷先公卜宅寬)

구름 걸린 산 둘러 있고 다시 물굽이 고리처럼 둘러있네(雲山回復水灣環)

 

외딴 섬에 정자 세워 다리 가로질러 건너도록 하였고(亭開絶嶼橫橋入)

연꽃이 맑은 연못에 비치니 살아있는 그림 구경하는 듯하네(荷映淸池活畵看)

 

채마밭 가꾸고 나무 심는 것은 배우지 않아도 능했고(稼圃自能非假學)

벼슬길 연모하지 않아 마음에 걸림 없었네(軒裳無慕不相關)

 

바위 구멍에 웅크린 작은 소나무가(更憐巖穴矮松在)

풍상의 세월 격려하며 암반 위에 늙어가는 모습 더욱 사랑스럽구려(激勵風霜老勢盤)


 

청암정 일원은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답사 동선이지만 이제 조만간 개관할 박물관과 더불어 닭실마을에는 한과가 유명하니 들려보면 좋을 듯하다. 한과마을로 알려진 것은 동네 명문가 며느리들이 제사 음식으로 준비하던 한과의 맛을 계승하기 위하여 봉화군청에서 지원을 하였다고 한다.

 

우리의 답사꾼들도 대부분 여기서 답사를 끝내지만 단체가 아니라면 옛님의 숨결방에 이어서 답사기 게재할 예정인 지근의 천성사와 봉성면 답사를 적극 추천한다. 사진을 찍은 후에 엄청난 비가 몰아쳐 꼼짝없이 청암정 마루에 누워 비를 벗삼아 오랫동안 휴식을 취했다.

 

2007.08.13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메모 :
728x90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