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채,바깥마당,안사랑채
파사산성에서 여주읍으로 향하는 큰길에서 벗어나 얕은 구릉을 넘으면 상당한 규모의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멀리 여강을 바라보며 얕은 산을 등진 이른바 전형적인 양택풍수 배치인 배산임수임을 알 수 있다. 처음이지만 느낌으로 김영구 가옥임을 직감하고 빵모자를 깊게 눌러쓴 어른에게 김 영자 구자 어르신 집이 어딥니까? 라고 여쭈었더니, 벌떡 일어서며 내가 김영구요!!
김영구 가옥은 1999년 가옥 보수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영조 29년(1753년)에 최초로 지었으며 명문가인 창녕 조씨 종가집이었다. 안동 학봉 종택처럼 이 집도 독립운동가 조성환 부친이 독립군군자금 충당을 위해 처분된 뒤 민속자료 지정시기에 현재의 거주자 김영구 가옥으로 등재되었지만 아쉬움이 남는 것은 왜일까?
여강을 바라보며 남향한 사랑채 앞은 행랑채와 솟을대문이 자리지만 무너지고, 기왓장만 영욕의 아픔을 삭인채 쌓여 있다. 그나마 밭으로 조성하여 바깥사랑의 흔적도 아득하다.까치집 아래 우측으로 돌출된 것은 작은사랑채로 흔한 배치는 아니다.
사랑채
이벌대 기단,홑처마 팔작지붕의 사랑채는 큰사랑·큰사랑대청·사랑방·머리대청을 一자로 배치하고 앞쪽에 길게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큰사랑 앞에는 마당쪽으로 높은 누마루를 만들었지만 영남지방의 사랑채 배치와는 반대 방향이다.
누마루 옆에는 담장에 보이는 작은 건물은 오늘날 출입문으로 사용되는 협문이다. 모르긴해도 최근에 조성되었거나, 예전부터 있었다면 이집의 규모는 지금보다 훨씬 컸음을 시사한다.
중문
사랑채 큰사랑방 옆으로 난 안채로 통하는 중문이다. 중문을 들어서도 다시 90도를 돌아야 안마당으로 들어갈 수 있다. 바깥주인 안채 마님 여성 보호(?) 노력이 눈물겹지 않은가? ㅎㅎ
안채
안마당에는 화단을 가꾸어 사랑채와 안채를 은근하개 단절시켰다. 외벌대 기단의 ㄷ자형 안채는 안방과 대청을 가로로 두고 서쪽에 부엌과 동쪽에 건넌방을 붙이면서 꺽어 배치했다.
건넌방 앞은 작은 부엌과 광 및 동쪽으로 꺽어져서 맨위 사진에 돌출되어 보이는 작은 사랑방과 작은 사랑대청, 앞퇴의 툇마루로 이루어지는 작은 사랑채를 곁들였다.
안마당 정원
청도 운강고택에는 얼마전 까지도 안채 안마당에 정원있었다. 근자에 들렸더니 정원이 사라지고 없었다. 마침 집에 계시는 종손님에게 여쭈었더니, 최초에는 없었기 때문에 들어내었다고 하신다.
풍수지리서에서 공부한 내용이 얼핏 떠올라 다른 이유가 있으시죠? 라고 넌지시 말씀드렸더니 "집의 구조가 '口'字라 그안에 나무를 심으면 '困'字가 되어 가족들의 건강을 해친다는 이야기가 있어서...라며 말끝을 흐리셨다.
해시계
충남 예산 추사고택의 석년 처럼 이집 마당가에는 일반 민가에서는 보기 드문 해시계가 놓여 있다. 마모가 심해 명문도 알아볼 수 없었지만 현재 위치도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지금의 자리에서는 햇볕을 잘 받을 수 없으니 무용지물이나 다름없겠지만, 세종조에 발명한 해시계가 비록 후대에 보급었더라도 사대부 명문가가 아니면 어려웠을 것이다.
김영구 어르신
처음에는 사람을 피하는 표정이 역력했지만 나중에는 아주 말씀을 잘해 주셨다. 기거하는 사람이 있는 집에서는 답사객 모두가 긴장하고 예의를 갖추어야 함에도,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단체 관람객이 어르신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모양이었다.
심지어는 마음대로 문을 열고 촬영하고, 집을 비울 때는 물건을 허락없이 가져간 사례도 많았단다. 답사하는 사람에게 문을 닫고 출입을 금하고 싶은게 솔직한 심정이라고 하셨다.
2007.03.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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