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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아 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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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헌
동헌은 조선시대의 지방 관아건물로 고을의 수령이 일반 행정업무와 재판 등 공적일 일을 하던 곳이다.
흥선대원군은 정권을 잡은 후 관청의 위엄을 세우기 위하여 전국에 걸쳐 관청건물을 정비하였다. 그 일환으로 고종 8년(1871) 정기화 군수가 세웠다. 해방 후 홍산지서로 사용하다가 1984년에 부여군에서 현재의 모습으로 보수하였다.
앞면 7칸·옆면 2칸의 크기로 중앙에 대청마루를 두고 좌우에 각각 크기가 다른 온돌방을 설치했다. 지붕은 옆모습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관청의 위엄을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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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은 조선시대(朝鮮時代) 홍산현(鴻山縣)의 관아(官衙) 건물 중의 하나인 형방청(刑房廳)이다. 고종(高宗) 8년(1871)에 개건(改建)한 민가풍(民家風)의 목조건물로, 당시의 현액명은 비홍추청(飛鴻秋廳)이다. 10칸 크기의 ㄷ자형 동향집이다.
원래 중앙 대청과 남쪽 딸림채는 마루를 깔았었다. 북쪽 안채에는 2분합문(二分閤門)의 띠살문을 단 1칸짜리 온돌방 2개를 들였다. 자연석 주춧돌에 방주(方柱)를 세웠는데 공포(拱包)가 없는 납도리집이다. 기둥 위에는 주두(柱頭)를 놓고 창방(昌枋)을 짜돌렸으며 창방 위에는 주칸(柱間)마다 4개씩의 소로(小累)를 배치하였고, 그 위에 장혀와 외목도리를 얹었다.
남쪽 딸림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에 전면에 빈칸짜리 퇴칸을 달았다. 팔작지붕집으로 지붕가구(架構)는 대들보 위에 동자주(童子柱)를 세워 종량(宗樑)과 내목도리를 걸었으며, 이 종량 위의 제형대공(梯形臺工)은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천장은 연등천장을 가설하였고, 처마는 부연이 없는 홑처마이다.
조선시대 관아건물 중 형방청은 그 예가 희소한 것으로 문화재적 보존가치가 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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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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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헌종 2년(1836) 홍산군에 세운 객사 건물이다. 객사는 국왕의 전패를 모시고 초하루와 보름에 망궐례를 올리는 한편 왕명을 받들고 내려오는 중앙관리를 접대하고 유숙시키던 곳이다.
중앙에 정당이 있고 양쪽에 익실이 있다. 정당은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앞면은 문짝없이 트였고 옆면과 뒷면은 벽을 둘러 막았다. 내부는 통칸으로 트인 넓은 대청마루이다.
앞면 5칸·옆면 2칸의 동익실은 앞면은 개방하여 툇마루를 놓았고 오른쪽 3칸은 대청·왼쪽 2칸은 온돌방을 들였다. 서익실은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이며 동익실과 같은 구조이다. 그러나 온돌방 대신 마루방을 들였고, 대청은 앞면 뿐 아니라 옆·뒷면까지 모두 개방하였다.
익실은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화려한 팔작지붕집이며, 정당보다 한층 낮게 되어있다. ‘비홍관(飛鴻館)’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객사기(客舍記)」가 남아있다. 객사기에 보면 인부(人夫) 4,000여명에 목수(木手) 20여명이 5개월에 걸쳐 완성했으며, 민간인(民間人)의 기부금(寄附金)과 공금(公金)으로 충당하였다고 한다.
홍산 객사는 동·서익실의 규모가 달라 좌우의 균형을 이루지 않았으며 객사 건물로는 규모가 비교적 큰 건물이다.
출처:부여군청 홈
2007.03.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