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원주시

[스크랩] 원주 / 김제남 신도비와 인목왕후

임병기(선과) 2008. 6. 6.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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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지지 않은 발길을 돌려 나오면 오래된 노거수 아래에 대리석 비신을 갖춘 비석이 보인다. 심하게 마모되어 글은 보이지 않지만 선조 비인 인현왕후의 아버지 김제남의 신도비다.

 

김제남 신도비

 

金悌男

1562(명종 17)~1613(광해군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공언(恭彦). 증조부는 영의정 전(詮)이며, 아버지는 증(贈)영의정 오( )이다. 1585년(선조 18)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4년 의금부도사·공조좌랑을 거쳐, 1596년 연천현감을 지냈다.

 

1597년 별시문과에 급제한 뒤 1601년 정언·헌납·지평을 거쳐 이조좌랑이 되었다. 1602년 둘째딸이 선조의 계비(繼妃:인목왕후)가 됨으로써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에 봉해졌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뒤 1613년 이이첨(李爾瞻) 등에 의해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소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추대하려 했다는 공격을 받고 처형되었다.

 

1616년에 폐모론이 일어나면서 그 죄가 재론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뒤에 복권되었으며 왕명으로 사당이 세워졌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의민(懿愍)이다.


신도비 귀부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 2년에 세운 신도비로 거북이 목을 돌려 비신을 바라보는 모습이 이채롭다.
 


이수/문화재청


목릉/문화재청

仁穆王后

1584(선조 17)~1632(인조 10).

 

조선 제14대 왕인 선조의 계비(繼妃).

 

영돈녕부사 김제남(金悌男)의 딸이다. 1600년(선조 33)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懿仁王后)가 죽자, 1602년 왕비에 책봉되었다. 1606년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자 왕위계승을 둘러싼 문제가 발생했다. 유영경(柳永慶) 등 소북(小北)은 당시 세자인 광해군이 서자이며 둘째 아들이라 하여 영창대군을 옹립하고, 대북(大北)은 광해군을 지지하여 당쟁이 확대되었다.

 

1608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이 정권을 잡았다. 1613년(광해군 5) 이이첨(李爾瞻) 등이 반역죄를 씌워 영창대군을 폐서인시킨 뒤 죽였으며 김제남도 사사시켰다. 1617년 삭호(削號)당하고 서궁(西宮)에 유폐되었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복호(復號)되어 대왕대비가 되었다. 글씨에 뛰어나 직접 쓴 〈보문경 普門經〉 일부가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전한다. 1604년에 소성(昭聖), 1610년 정의(貞懿), 1624년(인조 2) 명렬(明烈)의 존호가 올려졌다. 휘호는 광숙장정(光淑莊定)이다. 능은 양주에 있는 목릉(穆陵)이다.

 

인목대비가 저술하였다고 알려진 계축일기가 전해온다.

 

계축일기

 
인목대비 폐비 사건건에 얽힌 궁중 비사를 기록한 글.

1책. 필사본. 지은이는 인목대비 측근의 궁녀로 추정되나 인목대비 또는 정명공주(貞明公主)의 작품이라는 설도 있다. 낙선재본 〈계?M일긔〉와 홍기원본 〈서궁일기〉 2가지가 전하며 이전의 원본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인목대비는 19세에 선조의 계비가 되어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을  낳았다. 공빈김씨의 소생 광해군이 세자가 되었으나 늘 영창대군을 경계했다. 선조가 죽자 광해군이 즉위하였는데, 친형 임해군(臨海君)을 죽이는 등 주변을 의심하며 많은 옥사(獄事)를 일으켰다.
 
계축년(1613, 광해군 5)에 이이첨(李爾瞻)이 서양갑(徐羊甲) 사건에 연루된 박응서(朴應犀)를 꾀어, 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추대하여 역모를 꾀한다고 무고(誣告)하도록 하였다. 이 사건으로 김제남 부자와 영창대군은 죽음을 당하고 인목대비는 경운궁(慶運宮)으로 쫓겨나 폐비가 되었으며, 온갖 고생을 하다가 11년 뒤 인조반정으로 복위되었다는 내용이다.
 

조선 중기 궁중의 풍속과 생활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순 우리말로써 우아한 궁정어와 문체를 구사하였다. 3인칭 시점으로 서술했고,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에 대해서는 극존칭을 사용하였다. 모든 일을 실제 보고 들은 듯이 기록했으며, 대화 부분을 특히 실감나게 표현하였다. 광해군을 규탄하고 인목대비를 옹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숨겨진 의혹을 풀어주는 읽을 거리가 될 수 있도록 하였다.

 

예전에 읽었던 "한국 지명의 신비"(?) 글 내용중에 강화도 살창리(殺昌里)라는 지명이 생각난다. 고려 창왕(昌王)과 영창대군(永昌)이 살해된 곳이라 살창리라고 불려지며, 영창대군이 죽은 음력 2월 9일을 전후하여 내리는 비를 '살창우(殺昌雨)라고 한다.



합천 묘산면 소나무/문화재청


이런저런 사연을 간직한 소나무가 지금도 푸르름을 뽐내며 경남 합천에서 자라고 있다.

 

합천 묘산면의 소나무는 해발 500m 정도 되는 곳에 위치한 화양리 나곡마을의 논 가운데 서 있으며 나이는 500년 정도로 추정된다. 높이 17.7m, 둘레 6.15m의 크기로 가지는 2.5∼3.3m 높이에서 갈라져 다시 아래로 처지 듯 발달하였는데 그 모습이 매우 독특하고 아름답다.

 

나무 껍질이 거북이 등처럼 갈라져 있고 가지가합천 묘산면의 소나무는 해발 500m 정도 되는 곳에 위치한 화양리 나곡마을의 논 가운데 서 있으며 나이는 500년 정도로 추정된다. 높이 17.7m, 둘레 6.15m의 크기로 가지는 2.5∼3.3m 높이에서 갈라져 다시 아래로 처지 듯 발달하였는데 그 모습이 매우 독특하고 아름답다. 나무 껍질이 거북이 등처럼 갈라져 있고 가지가 용처럼 생겼다 하여 구룡목(龜龍木)이라고도 한다.

연안 김씨의 후손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광해군 5년(1613)에 연흥부원군 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한다는 모함을 받고 역적으로 몰려 3족이 멸하게 되자 김제남의 6촌벌 되는 사람이 도망와서 이 나무 밑에 초가를 짓고 살았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마을을 지켜주는 나무로 여기고 오랫동안 보호해 왔으며, 민속적·역사적·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문화재청

 

06.03.13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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