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원주시

[스크랩] 원주 / 흥법사지...떠남이 아쉽지 않을려면

임병기(선과) 2008. 6. 6.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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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시내를 벗어나도 눈은 그칠 줄 모른다. 그렇게 소망하던 눈내리는 겨울 폐사지를 만날 수 있음에도 즐거움 보다는, 가슴이 답답해 오니 야릇한 심사다. 얼마나 들리고픈 흥법사지 였던가. 거돈사지, 법천사지, 여주 고달사지와 더불어 남한강 유역 폐사지 답사의 메카이건만 이제서야 산문을 열어준다.

 

김제남 신도비를 거쳐 모퉁이를 지나니 멀리 삼층탑이 길손에게 손을 내민다. 폐사지는 여유롭게 멀리서 가능한 멀리서 바라보아야 하거늘 달구지는 거침없이 삼층탑까지 달려,  고려 태조 왕건의 지원으로 진공선사가 중건한 흥법사지 중정(?)에 이르니 눈발이 그쳐 눈 내리는 폐사지 정경은 또다시 후일을 기약할 수밖에...

 

원주 흥법사지

 

금당터 자리에는 허물어진 가옥이 황량함을 주지만 멀리 뒷산을 바라보니 허허롭던 절터가 금방 빛이 나는 까닭은 산봉우리가 본존불과 좌우 협시불인 삼존불로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임란, 병란 을 거치면서 파괴된 절집이 숙종조에 도천서원이 자리했다니 파괴의 정도는 능히 짐작이 가고 남는다.

 

태조 왕건은 무엇때문에 심심산골 절을 지원했을까? 혹 불완전한 통일, 지방호족의 환심을 사려는 목적이었거나, 선종 세력의  확대로 선종 가람과 손을 잡으려는 목적은 없었겠는가?

 

신라 유민 위무, 국가 통치 철학인 불교 단체 지원 등, 태조 왕건으로서는 일석삼조 유형의 효과를 기대하고 남한강변 사찰을 육성했다고 보는 것은 나만의 근거 없는 논리일까?

 

흥법사지 삼층탑

 

이중기단의 신라계 석탑으로, 기단 면석에는 안상속에 꽃이 만개해 있고, 1층 몸돌에 비해 2,3층 몸도 체감이 급격하며 상륜부에는 노반만 보인다.

 

삼층탑만 보아도 흥법사지의 창건연대 추론이 가능할 정도로 옥개석 받침, 탱주가 줄어 들었다.

흥법사지 석축


국보, 보물보다 못할 게 뭐냐? 튼실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자랑스런 모습인 것을...


흥법사지 주추


부서지고 깨어지고 불에 타버린 기둥을 지켜보았을 주추는 그냥 말이 없다.

서원 창건, 일반 민가에 제짝이 팔려갈 때도 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안으로 안으로 슬픔을 삭였겠지.


진공대사 부도비 귀부, 이수


왕실소속 장인의 작품이 분명한 진공대사 부도비 귀부, 이수는 힘이 있어 보이지만 여타 답사기에서 묘사한 아름다움을 못 느껴도 부끄럽지 않으니 건방이 극에 달했음이 분명하다. 

 

부도, 부도비는 일반적으로 사찰 서쪽에 조성되는데 진공대사 부도비는 가람 중앙지점에 현존하는 것으로 미루어 제위치가 아닐 것이다.

 

귀부는 삼국통일 후 무열왕릉비에서 처음보이고, 고려에 이르면 용의 모습이며, 후에는 거돈사지 귀부처럼 아가미도 표현된다.

 

여의주를 입에 물고, 등에는 육각형 무늬 만(卍), 연꽃이 보인다,이수 중앙 제액에는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고, 주위에는 구름 속을 요동치는 네마리 용을 조각하였지만, 어찌 내 눈에는 어지럽게 보이는지...

 

진공대사 비문...역마살 향기방 칸델리님 사진

 

사라진 비신으로 국립박물관에 있다. 고려 왕건이 글을 짓고, 당나라 황제 글씨를 최광윤이 집자하여 새겼다고 전해지니 과연 진공대사는 어떤 분일까?

 

신라말의 고승으로서 속성(俗姓:세속의 성씨)은 金씨로 계림(鷄林)의 귀족 출신이다. 아주 어려서 부모를 잃고 출가하여 장순선사(長純禪師)의 제자가 되었다.

진성여왕 3년(889)에 무주 영신사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뒤 법상부(法相部)를 배우고 율장(律蔣)을 연구하였다. 그 뒤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불도를 연마하였다.

 

경문왕 9년(869)에 태어나 고려 태조 23년(940)까지 살았으며 태조는 왕사(王師)의 예로서 극진히 예우하였고 71세로 입적하였고 시호(諡號)는 진공(眞空)이라 함으로서 진공대사라 칭하게 되었다... 출처/다음
 


흥법사 진공대사탑부 석관/ 문화재청

 

흥법사지를 떠나 국립박물관에 모셔진 진공대사 부도이며, 특이하게도 석함이 함께 있다.

 

부도는 전체가 8각으로 이루어진 기본적인 형태로, 기단(基壇)의 아래와 윗받침돌에는 연꽃을 새겼다. 북모양을 하고 있는 가운데받침돌 표면에는 웅장한 구름과 함께 뒤엉켜 있는 용의 몸체를 생동감있게 조각하였다. 탑신의 몸돌은 8각의 모서리마다 꽃무늬가 장식되어 독특하고, 앞뒤 양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짝모양이 각각 새겨져 있다.

 

그 위로 얹혀 있는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과 2중으로 된 서까래가 표현되어 있다. 경사가 완만한 낙수면은 8각의 모서리선이 굵게 새겨져 그 끝에는 높이 솟아있는 꽃조각이 달려있다. 특히 낙수면에는 기와를 입힌 모양의 기왓골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고 처마 끝에 이르러서는 암막새, 수막새까지도 자세히 조각됨으로써 밑면의 서까래와 함께 당시 목조건축의 일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꼭대기에는 8각의 작은 지붕모양의 머리장식인 보개(寶蓋)가 있다.

한편 탑의 왼쪽에 따로 놓여 있는 돌로 만든 함에는 불교경전과 함께 관련된 유물을 담아두었는데, 뚜껑까지 완전하게 남아있어 그 가치를 지닌다. 지붕의 윗부분을 수평으로 자른 듯한 뚜껑돌과 긴 상자 모양의 몸통으로 이루어진 이 함은 거의 완전하며 온화한 품위를 보여주고 있다. 두 유물의 조성연대에 대하여는 알 수 없으나『고려사』에 남아 있는 기록으로 미루어 고려 태조 23년(940)으로 추측된다...출처 문화재청 



傳 흥법사염거화상탑/문화재청

 

국립박물관에 있는  도의선사의 법제자이며 체징의 스승인  염거화상 사리탑으로, 입적 년대가 확실해(844) 최초(?)의 사리탑으로 알려져 있다.

 

이탑이 일제강점기에 흥법사에 있었다고 하지만, 해방후 조사에서  확실한 근거를 발견하지 못해 傳염거화상탑이라 칭하고 있다.

탑은 아래위 각 부분이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 기단(基壇)은 밑돌·가운데돌·윗돌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면마다 소박한 조각이 멋스럽게 펼쳐져 있다. 밑돌에는 사자를 도드라지게 새겼고, 가운데돌에는 움푹 새긴 안상(眼象)안에 향로를 새겨 두었다. 2단으로 마련된 윗돌은 아래단에는 연꽃을 두 줄로 돌려 우아함을 살리고 윗단에는 둥그스름한 안상(眼象) 안에 여러 조각을 두어 장식하였다.

사리를 모셔둔 탑신(塔身)의 몸돌은 면마다 문짝모양, 4천왕상(四天王像)을 번갈아 가며 배치하였는데, 입체감을 잘 살려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지붕돌은 당시의 목조건축양식을 특히 잘 따르고 있어서 경사면에 깊게 패인 기왓골, 기와의 끝마다 새겨진 막새기와모양, 밑면의 서까래표현 등은 거의 실제 건물의 기와지붕을 보고 있는 듯하다. 꼭대기에 있는 머리장식은 탑을 옮기기 전까지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

탑을 옮겨 세울 때 그 안에서 금동탑지(金銅塔誌)가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해 통일신라 문성왕 6년(844)에 이 탑을 세웠음을 알게 되었다. 사리탑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나 단아한 기품과 깨끗한 솜씨가 잘 어우러져 있다. 이후 대부분의 사리탑이 이 양식을 따르고 있어 그 최초의 의의를 지니는 작품이다...문화재청

정지된 시간 속에서 떠남이 아쉽지 않은 폐사지 답사는 언제쯤 가능할지...

 

2006.03.13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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