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영주시

[스크랩] 영주 / 가흥동 바위에 새긴 꿈

임병기(선과) 2008. 6. 6.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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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400년 전 신라가 삼국통일후 고구려 옛고토, 당으로 가는 주 통로인 영주 서천변 바위에 이름모를 석공은 어느님의 발원으로  삼존불을 새겨 생명력을 불어 넣었다.

교역을 하는 상인, 자식을 바라는 부모, 고관대작, 기층민 들은  삼존불에 예를 올려 그들의 염원을 빌고빌었으며, 세월이 흘러흘러 서천의 하상구조가 바뀌어도, 주변이 상전벽해가 되어도 마애불은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

 

인간의 편리성만 추구, 밤낮으로 소음을 내며 달리는 자동차 길이 눈 앞에 있건만 찿아오는 사람은 드물고, 눈길 한번 주지 않기에, 길이 험하고 배고픈 시절에 보리살 한됫박 공양하며  철야로 자식 잘 되기를, 가족이 건강하기를 주문하던 가난한 그시절을 더 그리워하고 있지는 않을까?

 


가흥리 삼존석불/문화재청

 

그다지 높지 않은 바위 상단에 돋을새김 된 삼존불의 주불인 연꽃대좌 위의 좌불은 소발의 육계, 시무외인,여원인의 통인의 수인, 겹연꽃과 화불을 갖춘 광배, 광배를 에워싼 화염문이 보이며, 좌우협시불은 좌우로 겹치는 삼국시대 석불의 특징인  엑스자형 천의, 부드러운 인상, 광배를 갖춘 입상이다.

 

영주지방의 석불들 중에서도 가장  눈의 마모가 심하여 보는 사람을 안타깝게 만들지만 어쩌면 바른 눈을 가지고도 세상을 바르게 보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팔정도의 가르침을 몸소 시현하고 계시는지도 모르겠다. 

 

좁은 바위에 삼존불만 계신다면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자리를 떠날 수 있겠지만  가흥동 마애불보다 훨씬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청동기 시대에 이미 바위의 주인공이 있었으니...


 


영주가흥리암각화/문화재청

 

영농, 경작의 시작 등으로 계급, 집단이 형성된 청동기 시대의 부산물로 알려진 바위에 새겨진 벽화가 가흥동 마애불 하단에도 보인다.

주지하는대로 암각화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지만, 일반적으로 성혈은 다산과 풍요, 태양은 자연 숭배 및 다산,  검파형 암각화는 칼자루를 남성,안쪽의 구멍은 여성을 상징하여,다산,풍요과 권위를 의미한다.

 

또한 암각화가 그려진 바위는 신성공간인 제단으로 보기도 하는데 청동기 시대의 사람들은 왜 바위 상단의 좋은 자리를 두고  최하단에 그림을 새겼을까?

혹 그시절엔 깍아 지른듯한 천애의 암벽이었으며 현재 마애삼존불 자리에는 접근불가, 아니면 흙속에 묻혀 바위 상부가 들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온갖 상념이 명멸해가지만 가흥동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는 또하나의 숙제를 답사객에게 던진다.

 

새로 발견된 마애여래좌상/雲心月性님 사진

 

해방후 최대 발견의 하나로 여기는 공주 무령왕릉 처럼 2003년 영주지방의 집중 호우로 바위 더미가 무너지면서 바위 위쪽에 놓여있던  바윗돌에 마애삼존불 형태와 유사한 통일신라 시대 불상이 천년의 산고 끝에 태어난 것이다.

 

이중의 광배, 소발, 육계, 어깨에 닿은 귀, 코와 입의 훼손이 심하지만 얼굴은 풍만한 삼존불의 본존불 모습이며,우리가 궁금한 것은 불상이 어떻게 해서 갈라진 바위의 안쪽면에 새겨져 있게 되었는지 알고 싶지만,  몇가지의 추측만 나돌 뿐이기에 더 경이롭다.

 

 "불상을 만들다가 석공의 맘에 안들었기 때문에 그대로 방치하기는 그렇고, 폐기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므로 숨긴 것이 아니냐는 추측", " 많은 비용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 석불조성 때, 이를 담당한 석공은 잘못 만들어졌다는 핑계로 자신의 염원을 기리며 몰래 숨긴 것일 수도 있다는 해석을 하는 이들도 있고, 발원자의 주문 대로 불상을 숨긴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
 

석불은 말이 없건만......


 2005.08.27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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