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홍성군

[스크랩] 홍성 / 백야 김좌진 생가

임병기(선과) 2008. 6. 6.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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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곳을 답사하면서 느끼는 감회지만 문인 출신의 생가는 수수하고 소박하며 아늑한
분위기라면, 무인 출신의 생가는 풍기는 맛이 호방하고, 거침이 없어 보인다.
물론 풍토, 산야가 사람의 기질을 후천적으로 변화시키는지는 모르지만 객관적으로 판단해
보면 구데타를 합리화, 정당화 하기 위한 박정희 대통령의 무인 우대(?) 성역화 사업의 
영향이라고 생각도 드는게 사실이다.
단장지통
적막한 달밤 칼머리에 바람은 찬데
칼끝의 찬서리는 고국생각 돋는구나
삼천리 금수강산에 왜놈이 왠 말인고
더러운 세상 한 칼로 슬어버릴 길 없다.
만해 생가와는 달리 성역화가 뚜렷한 생가터에 그의 품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시비가
서있다.
"백야 김좌진(金佐鎭:1889~1930)
호는 백야요,고종 26년(1889) 음 11월 24일 갈산면 향산리에서 출생하였다.
18세때 우리 사회에 처음으로 노예해방의 첫 기록을 남겼다. 15세가 되던 해는 대대로 
살아오던 80칸이 넘는 집을 내놓고 작은 집으로 옮긴 다음 호명학교를 설립하여 신학문을 
배울 수 있는 길을 열었는데, 이것은 우리 지방에서 신학문을 배울 수 있는 첫 기록이다.
 그는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기호흥학회라는 장학단체를 설립하여 지방의 유망한 청년들을 
선발, 서울 유학을 시키기도 하였다. 20세 때에는 이봉창과 같이 서울에 고아원을 설립하여 
무의무탁 고아들을 양육하는 한편, 한성신보의 이사로 취임하였고, 관철동 대관원자리에 
이창 양행과 신의주에 염직회사를 설립하였다.
31세가 되던 해에 서백리아에 출전중이던 일본의 가납연대 3,000명을 화 룡현 청산리로 
유인하여 연대장 가납 이하 1,200명을 함몰시키고 천수백명 을 전상자로 만든 싸움이 
저 유명한 1920년 10월 21에 있었던 청산리 작전 이다. 38세에는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취임하고 재만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추진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40세가 되던 해 군무
서독변겸 북만군정서총사령, 한족총연합회 주석에 취 임하여 재만동포의 교육문제와 
민생문제에 주력하는 한편,중국의 항일세력 과 연합전선을 결성하고 대일항전을 위하여 
준비를 하던 중,1930년1월24일 하오 2시 중동 산시역부근 정미소에서 고려공산청년당원의 
흉탄으로 일세의 풍운아 백야 김좌진 장군은 생의 장막을 내렸다."
이른 아침이라 기념관도 굳게 닫혀 있어 둘러볼 수 없었지만 이 곳도 예외없이 생가지
성역화를 충실히(?) 수행한 홍성군수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외면하며 농기구가 전시된
바깥 채를 지나 문간채 이면서 사랑채와 이어진 솟을문을 넘어 마루에 앉아 예전에 들었던 
안동 김씨 문중에 대한 이야기를 되짚어 본다.
김상용과,김상헌을 아시나요?
김상용은 김상헌의 형이며 병자호란 때에 강화도로 왕족과 함께 피신해 적과 맞서다가 
성이 함락되자 분신 자살한 충신이며, 주전론(主戰論)자인 그의 동생 김상헌은 익히 
알려진 청나라에 끌려가면서 읊었던 시조의 주인공이지 않는가?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 수야
고국 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 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이분들이 김좌진 장군의 직계 조부이니 백야의 피속엔 무골의 피가 흐른다고 해야하지 
않을까?
족보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익히 알겠지만 안동 김씨는 경순왕의 후손을 시조로
하는 구파와 후삼국시대에 왕건을 도와 견훤을 물리친 후 사성을 받은 이른바 삼태사의
한분인 김선평을 시조로 모시는 신파로 나뉘어 지며, 그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신파에는
문인, 구파에는 무인의 기질을 타고난 후손이 많다는 것이다.
(안동 김씨들에게 누가 되지 않았음 하는 바램이다. 어렸을 때 조부님에게 귀동냥 했던
이야기니...) 구파의 인물 들 한말의 김옥균, 백야 김좌진, 그의 아들 김두환, 딸인 
탈렌트 김복동도 여걸의 풍모이지 않는가?
잡생각에 벗어나서 생가터를 벗어 나오니 더욱더 성역화된 사당이 눈에 들어 오지만 
눈을 돌려 버렸다.
우리 모두 가물가물 할 청산리 대첩을 기억의 저편에서 가져와 보자.
"1920년 10월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이 만주의 화룡현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싸움을 말한다.
1920년 8월 하순에 왕청현 일본군이 우리 독립군을 토벌하여는 작전을 펴기 시작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독립군은 김좌진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청산리의 백운평 계곡에 숨어 
있다가 일본군의 일부가 백운평으로 들어서자 일제히 사격을 가하였다.
이 싸움에서 5백여 명의 일본군을 전멸시킨 독립군은 그 날 밤으로 포위망을 뚫고 갑산촌에 
이르러 다시 천수평을 공격하여 일본군을 무찔렀다. 이어, 일본군의 사단 사령부가 있던 
이랑촌을 전격적으로 공격하여 일대 혈전을 벌인 끝에 또다시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렇게 세 번에 걸친 싸움에서 일본군의 사상자는 3,300여 명이었는데 반해, 우리 독립군의 
사상자는 100여 명에 불과했다.청산리 싸움은 우리 무장 독립 운동사상 가장 빛나는 
승리를 안겨 준 싸움이었다."
2004.04.20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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