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주사 대웅전(20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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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주사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말사로서 역대 명망이 높던 선사(禪師)와 강백(講伯)들이 후학들을 길렀던 수행승의 요람이다.고려(高麗) 제7대 목종(穆宗) 12년(1009) 혜명(惠明)대사와 대주(大珠)스님이 창건하고 사찰의 명칭을 두 스님의 이름에서 한자씩을 따서 명주사(明珠寺)라 하였다. 『건봉사말사사적』기록에 의하면 창건 당시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 보통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결과부좌(結跏趺坐)한 자세로 앉아 있음]을 조성 봉안한 것으로 보아 처음부터 화엄종 계통의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으나(경전상으로 볼 때 비로자나불은『화엄경(華嚴經)』의 교주) 여러 차례 소실로 남아있지 않다. 비로자나불을 모셨다면 당시 사찰 규모로 보면 대적광전(大寂光殿)이 금당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 기록에 의하면 고려 1123년[인종(仁宗) 원년] 부속 암자인 청연암(靑蓮庵)과 운문암(雲門庵)을 창건하여 이 고장에 불교가 크게 번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운문암은 법수치리(法水峙里)로 가는 길 강가 바위에“운문암(雲門岩)”이란 음각된 글씨만 전하는데 이형익(李衡翼)이 대각(大刻)했다고 한다.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金時習)은 반승반속(半僧半俗)의 삶으로도 유명한데 1486년(성종 17년) 52세 나이로 법수치리 부근 검달동(黔達洞)에서 살 때 명주사의 암자 이름도 지었다고 하며 혹자는 명주사에서 수행했다고 한다. 명주사는 현재 설악산 신흥사의 말사로 규모가 아담하지만, 한때는 강원도에서 건봉사와 비교하여도 작지 않은 큰 거찰이었다고 전해진다. 금강산으로 가는 길목인 까닭에 옛날에는 많은 고승과 시인 묵객이 명주사를 거쳐 갔다고 한다. 또한 예로부터 선원(禪院)으로 이름나 많은 학승을 배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1676년(숙종 2년) 수영(秀瑩)이 향로암(香爐庵)을 창건하였다. 1701년(숙종 27년)에는 법당 맞은편에 벽옥루(碧玉樓)를지었다. 1781년(정조 5년)에는 연파(蓮坡) 스님이 원통암(圓通庵)을 창건하고 관음상(觀音像)을 조성 봉안하였다.
1849년(헌종 15년)과 1853년(철종 4년) 원통암이 화재로 소실되자 곧바로 중건하였으며, 1860(철종 11년) 큰 화재가 만월산 전체를 뒤덮어 명주사 본사와 원통암·청연암·운문암·향로암이 소실되자 월허(月虛) 스님이 사재를 기울여 명주사를 중건하였다. 이듬해인 1861년(철종 12년) 월허(月虛)와 인허(印虛)가 운문암을 중건하여 만일선회(萬日禪會)를 개설하고 향로암을 서쪽에 옮겨 중건하고 보련암(寶蓮庵)이라 개명하였다. 1864년(고종 원년)에는 학운정원(鶴雲正原) 스님이 사재를 털어서 원통암을 중건하였으며, 1878년(고종 15년)에 또다시 화재를 입어 이듬해인 1879년(고종 16년)에 명주사를 중건하였다.1887년(고종 24년) 일봉(日奉)스님이 용선전(龍船殿)을 지으면서 가람의 규모를 제대로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대한제국 광무(光武) 원년인 1897년(고종 34년) 명주사가 화재로 다시 한번 모두 소실되자 부속 암자였던 원통암에서 여러 가지 사무(寺務)를 행하게 되자 이때의 명주사를 원통암으로 칭하면서 지금의 명주사는 본래의 원통암 자리가 된 것이다. 1899년(고종 36년)에는 향로전, 1906년(고종 43년)에는 원통전을 중건 새롭게 사찰을 확장하였다. 1912년 31본말사법 인가로 건봉사 말사가 되었고, 그해 1월 홍포룡(洪莆;龍) 스님이 주지로 취임하였다가 1913년 3월 김월인(金月印) 스님이 취임하였고, 1915년에 침고(砧庫)를 건립하였다. 1917년 8월에 김백월(金白月) 스님이 취임하여 다음 해엔 사찰을 중수하였다. 1920년 8월에 노제봉(盧霽峯) 주지에 이어 1923년 7월에 윤설호(尹雪昊)가 주지로 취임, 1925년에 사찰을 수리하였다. 1926년 7월에 묵옹(黙翁) 스님이 취임하여요사채의 지붕을 기와로 바꾸었다.
이 당시 명주사는 총 15동 95칸의 건물이 있었다. 건봉사말사사적(乾鳳寺末寺史蹟)에 따르면 법당인 원통암 30칸을 비롯하여 독성각 1칸, 산신각 1칸, 어향각(御鄕閣) 9칸, 응향각(凝香閣) 6칸, 진영각(眞影閣) 6칸, 현위실(弦葦室) 6칸, 만수실(曼殊室) 6칸, 미타암(彌陀庵) 6칸, 삼포방(三浦房) 6칸, 창고 6칸, 욕실 3칸, 족침실(足砧室) 2칸, 수침실(水砧室) 4칸, 해우 소 3칸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9칸의 어향각(御鄕閣 임금이나 왕비의 조상과 관련)은 명주사가 왕실과 관계가 있음을 시사해 주는 것(연파당 스님 등)이며, 법당 좌우의 선방과 강원을 현위실(弦葦室), 만수실(曼殊室)로 명명한 것도 주목된다. 그리고 진영각 안에는 환성당(喚惺堂)을 비롯한 이 절과 관련된 17분의 고승 영정이 일제 강점기까지 봉안되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모두 전하지 않는다. 6·25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명주사는 폐허가 되어 한동안 방치되었다가 1963년 주지 수룡(壽龍) 스님이 중건하였으며, 1979년 주지 마근(麻根) 스님이 법당과 삼성각, 추성각(秋聲閣 : 주지스님 거주), 종각, 요사체 등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출처.양양문화원)

명주사 승탑원. 문화재 자료
조선후기에 조성된 원구형 7기, 종형 5기, 4기 비석이 있습니다.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부도를 1994년에 현재의 자리로 이건하였다고 합니다. 2020년 답사하였으나 각각의 부도 사진을 찍지 못해 오늘 순례하였으며, 기차 시간에 쫓겨 대웅전 참배를 못하고 승탑원에서 발길 돌렸습니다

월허당(月虛堂)
방형지대석, 팔각의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 원구형 탑신, 팔각옥개석, 상륜부
12기 중 7기에 이르는 부도는 이런 유형입니다.

기단부

중대석의 亞형태의 안상

탑신
상하에 앙련, 복련 조식. 총탄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옥개석과 상륜

월허당(月虛堂)
아래 양양문화원 명주사 자료를 참조하면 1861년 명주사에 계셨던 스님으로 19세기 후반에 세운 부도로 추정됩니다.
1849년(헌종 15년)과 1853년(철종 4년) 원통암이 화재로 소실되자 곧바로 중건하였으며, 1860(철종 11년) 큰 화재가 만월산 전체를 뒤덮어 명주사 본사와 원통암·청연암·운문암·향로암이 소실되자 월허(月虛) 스님이 사재를 기울여 명주사를 중건하였다. 이듬해인 1861년(철종 12년) 월허(月虛)와 인허(印虛)가 운문암을 중건하여 만일선회(萬日禪會)를 개설하고 향로암을 서쪽에 옮겨 중건하고 보련암(寶蓮庵)이라 개명하였다.

인곡당 선사비명(麟谷堂禪師碑銘). 1832
명나라 시대에 조선국 인곡당 선사의 서문은 쓰고 비를 새기다.
수록대부 영명위 홍현주( 洪顯周)가 짓고 씀(撰幷書)
선사께서는 옹정 갑인(1734) 2월 23일에 태어났다. 가경(청나라 연호) 병자(1816) 11월 20 일 83세에 열반하였다. 이름은 뇌학(雷學)이며, 인곡(麟谷)은 그의 당호이다. 21세에 현산(양 양)의 명주사에 들어갔다. 자흠(自欽) 장로에게서 머리를 깎고(祝髮) 월송대사에게 계를 받았으며 설송선사의 법을 이어서 실질적으로 서산대사(휴정)의 정통 법맥(法脈)을 이었다. 후에 오대산 북대암으로 이주하여 부처님께 군친자사(임금과 왕비, 아버지, 어머니)의 복을 기원하는 재(齋)를 백일 동안 올리자 곡식과 재물이 지원되었다. 이것으로 재앙을 입은 스님이 있으면 도와주고 불타고 무너진 절을 재건하며 큰 종을 만들고 법의를 마름질하였으며, 굶주린 자를 보면 밥을 주고 추위에 떠는 자를 보면 옷을 벗어주었다. 이것이 선사가 베푼 자비의 대강이다.
자비란 부처님의 가장 뛰어난 가르침인데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며 등불에서 등불로 전해 왔으니 부처님 이전이나 이후나 불교의 제일 덕목이다. 선사의 삼세(三世) 제자인 벽훈이 그은혜를 잊지 않도록 비석에 새기어 전한다. 풍산 홍씨 현주가 그것을 글로 썼다. 서쪽에서 와동으로 간 것인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온 것인가? 그것이 동(東)인지 서(西)인지 나는 감히 그것을 안다고 못 하겠다.
숭정기원(1628)후 4년 임진년(1832) 5월 일 세움

숭정기원후4임진5월일립(崇禎紀元後四壬辰五月日立)

연파당蓮坡堂 (1730~1817)

기단부

범자문
우리나라의 범자문양 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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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층기단 갑석의 안상문

연파당
탑신 하단부의 연화문. 얼핏 연주문처럼 보였습니다.

옥개석과 상륜부

연파당대선사비명(蓮坡堂大禪師碑銘). 1818
명나라 시대 조선국 연파당대선사의 비명을 새기고 쓰다
대광보국숭록대부 행판중추부사 원임규장각직제학 서용보(徐龍輔)가 짓다.
조봉대부 행선공감감역 유한지(兪漢芝)가 전서체와 나란히 쓰다.
연파 대선사(1730~1817)가 입적하자 사리가 나왔는데 특이하였다. 제자 계옥(戒玉) 등이 돌을 잘라 부도를 만들어 사리를 간직하였다. 단단하고 아름다운 비석을 세워 오래 전하려고 나에게 글을 부탁했다. 세 번 돌려보냈으나 더욱 간절히 청하기에 내가 그에 관한 기록을 살폈다. 연파 선사의 성은 김으로 월성인(月城人)이다. 법명은 영주(永住)고 연파(蓮坡)는 그의 호 (號)다. 대대로 양양부의 현산 아래에서 살았다. 어머니 홍씨의 꿈에 한 노승이 구슬을 주면서 이것은 우리 집의 가보(家寶)라고 말했다. 아이를 낳았는데 태어나서부터 빼어나게 총명했다.
놀 때는 돌로 부처를 만들어 세우고 모래를 모아 음식을 베풀었다. 보는 사람들이 이상히 여겼다. 12세에 부모가 죽자 몹시 슬퍼하였다. 의지할 곳이 없어 만월산 명주사에서 머리를 깎았다. 선사를 불쌍히 여겨 맡아서 불법을 가르치겠다는 분들이 스스로 나타나니 연파는 나라 안의 이름난 승려와 불경 안팎의 여러 교리에 능통한 분들을 찾아 뵐 수 있엇는데 예를 들면 호월당(皓月堂), 풍악법사, 송암대사, 설파대사 같은 분이다.
그는 뛰어났다. 특히 화엄에 깊이 통달하였는데 탄식하며 말하길 “세상 사람들을 인도하는 뗏목으로서 어찌 잎만을 보는 일에 머물겠는가, 나는 장차 천하를 크고 넓게 보리다.” 내 마음을 넓히기 위하여 관동지방의 모든 승지를 찾아다녔다. 이어서 남쪽의 가야 기림사(경주 함월 산)에 이르러 고운 최치원과 의상의 옛 자취를 보았다. 남으로는 달이 떠오르는 보길도 부황 리(윤선도 유배지)에 이르렀고 서쪽 묘향에 가서 단군과 서산대사가 남긴 향기를 찾았다. 다시 서쪽 용만에 이르러 통군정(의주군 압록강가 정자)에 올라 오랑케를 조심하라는 글을 보았고 북쪽 마운령 산맥에 이르러 백두산과 장백산이 보여 주는 장엄함의 끝을 보았다. 다시 만월산(명주사)으로 달려와 수련하였다. 사방에서 배우기 위해 찾아온 승려가 100명을 헤아린 다. 중생의 성품과 자질에 맞추어 가르치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다. 정축(1817)년 1월 9일, 머물던 곳에서 빛나는 구슬(明珠, 명주)이 되었는데 속세 나이 87세, 법랍(절 나이) 73세다. 일찍이 표충사선교양종도총섭, 석왕사도원장의 소임을 맡았다.
시답천편(詩答千篇)을 통해 부처께 듣기로 ‘선(禪)은 가섭(迦葉)이 전하고 교(敎)는 아난(阿 難)이 전한다.’ 하였다. 연파 선사께서 즐겨 경전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아난의 계통이 아닌 가. 달마가 갈대 배로 바다를 건넜다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도리어 가르침을 넓게 하는 것이고 오히려 도량(度量)을 넓히는 것이다. 연파 선사께서 구름을 탄 듯 세상 사방을 여행하셨음은 달마의 뜻이 아닌가? 세존께서 열반에 들어서 그의 두 발을 보임으로써 그가 사멸하지 않았음을 나타내셨다. 연파 선사의 사리(靈珠, 영주)가 세존의 두 발 아니겠는가? 마침내 비문으로 새겨 말한다. 아난이 말하는 가르침과 달마가 말하는 뜻은,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어찌 전해지며 맞추지도 않았는데 어찌 일치하는가. 마음이 도(道)와 합쳐지면 시문(詩文)으로 나타난 다. 패수(浿水 : 대동강의 옛 이름)에서 한 수 읊자 소리에 먹구름 가득하구나. 스님은 땅끝까지 거의 다니셨지만 밝은 구슬 명주가 신령함을 보인다. 달은 꽉 찼는데 산은 험준하구나. 바닷물은 깊고 거친데 천년 세월에 만 가닥 칡넝쿨이구나. 선사께서 계신 이곳이 연꽃 핀 보배 로운 장소로구나.
숭정기원(1628)후 4 무인년(1818) 7월 일 세움

숭정기원후4무인7월일립(崇禎紀元後四戊寅七月日立). 1818

1781년(정조 5년)에는 연파(蓮坡) 스님이 원통암(圓通庵)을 창건하고 관음상(觀音像)을 조성 봉안하였다. 원통암을 창건한 연파 스님의 법명은 영주(永住:1730~1817)로 양양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돌을 세워 부처라 하고 모래로 탑을 만들어 예배하는 놀이를 좋아하였다고 한다. 12세에 부모를 잃고 명주사로 출가한 뒤 불경을 배우다가, 당대의 고승인 호월(皓月)·풍악(楓岳)·송암(松巖)·설파(雪坡) 스님을 찾아다니며 불경을 깊이 연구하였다. 그 뒤 명주사로 돌아와 원통암을 짓고 강석(講席)을 열었는데, 항상 100여명의 학도들이 모였다고 한다. 또한 스님은 나라에서 내렸던 승려에 대한 직책 중 최고의 승직(僧職)인 표충사선교양종도총섭(表忠祠禪敎兩宗都摠攝) 및 석왕사도원장 (釋王寺都院長)을 역임하다가 세수 87세, 법랍 73세로 입적하였다

추암당(楸庵堂)

기단부

탑신

옥개석,상륜부

추암당 탑
행장을 찾을 수없으나 19세기 후반으로 추정

대공덕주학운당태선사정원영세불망비(大功德主鶴雲堂太禪師正原永世不忘碑)
경신년(1860), 세월이 지나며 푸른 바다가 뽕나무밭이 되었다. 선사께서 스스로 시주하여 다시 절을 지으니 크나큰 공덕이 산처럼 높고 물처럼 길다. 나는 청나라 도광제(道光帝 : 1821~1850) 때 선사를 모셨다. 길러주시고 가르쳐주시며 함께 고생하셨다. 불행하게도 청나라 동치제(同治帝 : 1862~1874) 기사년(1869) 4월 초하루에 암자는 적멸의 아픔을 맞았다. 비록 일에는 순서가 있다고 하지만 추호(追號, 여기서는 추모의 뜻으로 쓰임)를 더 미룰 수 없다. 한 조각 비석으로 선사를 사표로 삼고자 작은 정성을 바친다. 이 깊은 뜻을 훗날 우리 가문 후손들이 알아줄 것인가? 연파후손용악보위 씀 숭정기원(1628)후 4 임신년(1872) 칠월 립(세움)
배면에는 비를 세운 스님 법명을 새긴 것 같습니다.
師弟 桂月覺宣 長上在 聳岳 普衛 弟子 靜菴大俊
(사제 계월각선 장상재 용악보위 제자 정암대준)
受戒 應宜
(수계 응의)
孫上在 大隱旿珎 有典
(손상재 대은오진 유전)
曾孫 濟常 鏡海玩 海大 童子基成 玄孫 沙彌取衍 童子在守
(증손 제상 경해완 해대 동자기성 현손 사미취연 동자재수)
僧族 仁城包策 月菴敬允 桂山坦恂 雲潭坦謙 坦信
(승족 인성포책 월암경윤 계산탄순 운담탄겸 탄신)

설봉당(雪奉堂)

기단부

道光 五(?) 1821~1850

설봉당

상륜, 옥개

행장을 찾지 못했으나 19세기 후반으로 추정

용악당대선사비명(聳岳堂大禪師碑銘)
명나라 시대에 조선국 용악당 대선사의 비를 새기고 서문을 쓰다.
방산거사(艕山居士) 허훈(許薰) 지음
황곡 서주지(徐錫止)가 쓰고 전서체도 씀
내(방산거사 허훈)가 남쪽 바다를 떠돌며 여러 달 지내다 돌아오니 한 스승이 도를 닦고 계셨다. 그는 양주(襄州)에서 큰 영을 넘어 15유순(由旬 : 고대 인도의 거리 단위)을 걸어와 묘교(卯橋)의 농막에 머무르며 내 여행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한참을 보니 그의 용모는 단정하고 말은 우아하고 지적이었다. 대덕 스님 문중(門中)의 기풍을 따르고 익힌 것임을 알았다. 스님의 소매에서 조사(祖師, 그 종파의 시조 스승) 용악당 대화상의 행록(行錄 : 언행을 적은 글)이 나왔다. 소승(小僧)〔수법상좌 오진(旿珍)〕이 “스승을 위하여 단단한 7척의 돌(비석)에 심오한 뜻을 밝혀 현재와 후세에 전하려 하는 차에 선생(방산거사 허훈)의 이름을 듣게 되었습니다.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찾아왔으니 선생께서 한 마디로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였다. 나는 이미 사양하지 못했다.
그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니 용악 노선사는 여전히 아무 탈 없이 책상다리로 앉아서 경을 암송하고 계신다. 마침내 내가 “비석은 지난 일을 슬퍼하여 세우는 것인데 선사께서 지금 생존해 있으니 비석을 어찌하겠습니까?”라고 물으니 현자〔玄者 : 도를 깨친 자. 즉 오진(旿珍)〕가 “정말 선생의 말씀과 같으니, 바라건대, 선사의 무성한 상(像)이 쇠잔해지고 마음을 한곳에 모아 고요히 생각하다 어둠에 가려지는 날 아름다운 덕행을 드러나게 하여 중생을 깨우치게 하고 싶습니다.”라고 답하였다.
일단 이 일을 시작하자 노선사(老禪師)에게서 배운 모든 고족제자(高足弟子 : 학식과 품행이 우수한 제자)들이 노선사께 정성을 다하였다. 이를 어찌 번거롭게 여기겠는가. 선생도 그만두지 않으셨다. 내가 다시 현자(玄者)에게 말씀드렸다. “제가 불가의 법에 대하여 들었습니다. 죽음과 삶이 같다면 산 것도 산 것이 아니고 죽은 것도 죽은 것이 아닙니다. 사대(四大, 우리 몸을 구성하는 땅, 물, 불, 바람)는 잠시 머무는 전사(傳舍 : 윤회에서 몸을 바꾸는 과정 )에 불과합니다.
한번 생긴 영혼과 지각(知覺)은 계속 쌓여 사라지지 않습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 간격이 없습 니다. 만약 생사에 집착한다면 그것은 곧 상(相 : 겉모습)에 빠져 도(道)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즉 살아 있다 하더라도 죽은 것입니다. 비석이 어찌 해롭겠습니까?” 이렇게 말하고 그의 몸가짐과 품행을 살펴 비문을 썼다.
선사의 이름은 보위(普衛)이고 세속의 성은 김이고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남다른 재주를 갖고 태어나서 일찍이 문사(文史)에 능통했으며, 18세에 양양 명주사의 학운(鶴雲) 화상에게서 머리를 깎고 법복을 입었다. 불경에 통달하여 도반 중에 앞서는 자가 없었다. 몽암 장로(長老 : 고승)가 있었는데 선교(禪敎) 양종(兩宗)의 뜻을 온전히 전하였다. 이는 청허당(서산대사)의 적통으로 환성(喚醒)의 7대손이라 전한다. 처음에 학운 화상은 재물이 넉넉하였는데 사찰이 재앙을 당하자 재물을 풀어 그 절을 새롭게 일으켰다. 나머지도 모두 용악 선사에게 주어 그것을 잘 관리하여 스승을 봉양하도록 하였다.
학운 선사가 돌아가시자 용악은 슬픔을 품고 삼 년 동안 산문을 나가지 않으며 비석을 새기고 비문을 다듬고 삶을 흠모하였으며 재단(齋壇)을 설치하였는데 모두 규범에 맞아 아쉬움을 남기지 않았다. 성품이 베풀기를 좋아하여 가난하고 곤궁한 사람을 보면 서둘러 도와주고 경전을 새기고 탑과 절을 세울 때 돈 쓰는 것에 인색하지 않은 무량한 공덕을 세운 분이다.모든 것을 스승을 위해 하였고 스승의 음덕을 가슴에 품었는데 자신을 위해서는 서원(誓願) 하거나 발원(發願)하지 않았다. 문장에 뛰어나고 전서와 예서에 능했는데 모두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제자를 많이 모아 글을 읽었는데 유교와 불교의 차이를 일러주었다. 경(經 : 성현이 남긴 글)과 전(傳 : 현인의 글)을 드나들었는데 세상에 오래된 선비라도 그보다 나은 이가 없었다. 그의 시는 슬프면서 장엄하고 시원하며 밝았다. 소채와 죽순 같은 글의 기운은 없으며 억산선월(抑山禪月)과 상통한다. 이것이 유몽득(劉夢得)이 말한 욕망에서 벗어나고 소리의 운율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경지인가. 관동(關東)의 샘과 돌은 옥처럼 맑고 기괴하고 수려한 절경으로 우리나라에서 최고이다. 선사께서 늘 이곳에 주석하셨는데 밤 숲과 새벽 골짜기에 은하가 돌고 돈다. 안개 덮인 기운이 머무르고 늘어선 촛불이 고요함을 밝힌다. 무릎을 잡고 앉아 시문을 읊조리다 소리 높여 노래하니 모두가 시가 되고 게송(偈頌)이 된다. 기쁜 마음으로 반야경을 외니 이곳은 묘음(妙音)이 스스로 머무는 자리요 법의 바다가 있는 곳이라 하겠다.
선사께서 이런 일에 능하셨는데 받아들이고 활용하여 밀인(密印 : 언어나 문자 없이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깨달음의 증표)을 돌리니 많은 중생이 근기(根機 : 타고난 성품과 능력)에 따라 응대했다. 이 명주(明珠)가 있는 산을 만월(滿月)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나는 왕사(王舍 : 王舍城, 석가 모니가 중생을 제도한 중심지로 영취산이 있는 곳)의 둥근 달이 흘러와 이 산을 비춘다는 것을 안다. 산은 영롱하며 물은 맑고 평탄한 이곳에 절을 세우고 스님이 반야(般若 : 참모습을 아는 지혜)를 얻어 달처럼 원만하게 되었으니 선사의 이름이 동방의 만월세계(滿月世界 : 불교의 이상향)에 오래도록 남아있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선사께서 정축년(1817)에 태어나 올해 67세이며 승랍(절 나이) 50이다. 그의 고족제자(高足 弟子)는 오진(旿珍)이고 그가 다시 전했는데 제상 취연, 취현, 취운이 계승하였다.
비문이 말한다. 석가모니께서 영축산에서 가르칠 때 산에 비유하였다. 모든 산은 처음에는 높고 가파른 것이 수미산(須彌山)에 있는 법당 같다. 산문을 연 시조(始祖)인 임제, 조동, 운문, 하택이 이와 같은데 높이 솟은 산, 산 구릉, 첩첩이 깊은 산, 포개진 산처럼 일정한 구역 에서 서로 빼어남을 다투며 뒷세대에게 영향을 미쳤다. 석문, 고봉, 모암, 자백 역시 이산 저산에서 나와 울창한 숲이 마치 옥 비녀를 꽂은 화려한 정원과 같이 되었다. 대동(大東 : 우리 나라)으로 고개를 넘으니 나씨(羅氏)를 창시하여 청허정(淸虛亭 : 서산대사의 법명이 청허당) 에 이르렀는데 우뚝 서 있기를 태화산의 견고함과 같다.
시대마다 명덕(名德) 높은 이들이 일어나, 정신은 높고 덕은 우뚝하여, 그 이름과 행적이 뚜렷이 남아 손꼽을 수 있었도다. 아아, 불문이여! 운세가 바뀌고 숭상되던 날들이 지나가, 낮아지더니 무너졌고, 결국 붕괴에 이르렀도다. 오, 큰 산이 늙으니 우뚝하고 험준한 산이 평평해 졌구나. 티끌을 잡고 불법을 강의하니 원만하고 즉각적으로 깨우칠 수 있고 진실에 부합할 수있으며 밝고 넓게 볼 수 있구나. 높은 경지에 이르기는 아득하여 도달하기 어렵다고 누가 말하는가. 나를 채찍질하고 나의 걸음으로 앞서간 사람의 용맹을 따르리라.
시가(詩歌)를 지녔고 불법에도 능통하였다. 그 우뚝하고 뛰어나며 깊고 신비로움이 옥 우물 속의 연꽃 같고 안탕산(雁宕山 : 중국 제일의 명산)의 바위는 찬란히 빛나되, 공화(空華) 같고, 푸르스름하고 고색창연하여, 진실로 옛것이로다. 금강산의 동굴과 오대산의 절벽에 달이 있고 연못이 있고 구름은 언덕 저편에서 나온다. 선사는 여기 남쪽에서 노년을 마쳤다. 안개와 노을 속에 원숭이와 학이 오랫동안 동무가 되었다.
〔용악의 수법상좌 오진(旿珍)〕
광서 구년 계미년(1883, 고종 20) 칠월 일 세우다.
【배 면】
上佐受法 大隱旿珍 順庵舒允 越山壯念 海峰敞聞 慧月琦含
(수법상좌 대은오진 순암서윤 월산장염 해봉창문 혜월기함)
禪弟子 鏡潭善眞 石翁喆侑 允岑
(선제자 경담선진 석옹철유 윤잠)
受戒 桂山坦烱 景煥 俗侄 五衛將 金敦熙」孫弟子 漢雲亘法 慧雲濟常 竺衍
(수계 계산탄경 경환 속질 오위장 김돈희」손제자 한운긍법 혜운제상 축연)
僧族 月庵普允 應學 泰敏 章誼 智岸
(승족 월암보윤 응학 태민 장의 지안)
孫上佐 應碩 海天 泰浩 (손상좌 응석 해천 태호)
僧族 義龍取淵 取玄 取雲 璟郁 就厚
(승족 의용취연 취현 취운 경욱 취후)
玄孫 炳夏
(현손 병하)

명주사 주지
덕신당수용대화상(德信堂壽龍大和尙). 1977년

성월당 탑 기단.

안곡당(安谷堂),1832

중봉당(中峯堂),1818

기단부

탑신



호월당(皓月堂)



충암당(忠庵堂)




무하당(無瑕堂),1872


무하당
탑신에 돋을새김 한 후 당호를 새겼습니다.
이런 사례?
기억나지 않습니다.



인허당(燐虛堂),1823

탑신


청신거사상정(淸信居士尙淨),1883
재가신도 부도

탑신 상부, 연화보주
화려하게 장식


여러 자료에 7기 원구형 부도를 팔각 원당형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기단, 옥개석이 팔각이지만, 부도는 탑신으로 유형을 분류하기 때문에 圓球形입니다.
개인적으로 우리나라의 부도(통일신라~일제강점기) 하나하나를 모두 촬영한 것 같습니다.
단, 현재까지 알려진 부도이며, 두드려도 두드려도 문이 열리지 않은 통도사 승탑원 개별 부도는 미촬영입니다.
2026.04.02
비문, 부도 조성시기 등은 한국의 사찰 문화재, 양양문화원 홈페이지를 참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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