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양양군

양양...선림원지 삼층석탑 外

임병기(선과) 2026. 4. 25.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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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림원지
1982년 강원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선림원은 동국대학교 발굴조사단이 1985년 7월부터 1986년 8월에 걸쳐 이 사찰을 발굴한 결과 해인사를 창건한 순응법사(順應法師) 등이 창건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광복 직후 출토된 신라범종의 범종명문(梵鐘銘文)에 의하면, 해인사를 창건한 순응법사 등이 참여하고 있어서, 이 사찰이 종이 만들어진 804년(애장왕 5) 경에 해인사 등 화엄종계통에서 조성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발굴 시 출토된 초창기 때의 기와로 보아 적어도 9세기 초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찰이 획기적인 변모를 겪게 된 것은 9세기 중엽경으로 추정된다. 즉 홍각선사(弘覺禪師)라는 분이 이곳에 주석(駐錫 : 중이 입산하여 안주함.)하면서 외형적으로 대대적인 중창불사(重創佛事)를 하게 되고, 내면적으로는 화엄종이 아닌 선종으로 전향하게 된 것으로 믿어진다.
 
오늘날 남아 있는 유물들인 삼층석탑 · 승탑 · 석등 · 비석귀부는 물론 발굴 때 대량 출토된 기와들이 모두 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9세기 후반경에 대대적인 중창이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찰은 중창 후 얼마 되지 않아서 태풍과 대홍수로 산이 무너져내려 금당 · 조사당 등 중요건물들을 덮어버렸기 때문에 폐사된 뒤 다시는 복원되지 않은 듯하다. 따라서 발굴 때 당시 각종 기와들이 고스란히 출토되었던 것이다.
 
이 사찰의 가람배치는 3층석탑 뒤에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 금당건물이 배치되었는데 주춧돌이 완전하게 남아 있으며, 오른쪽에 금당과 잇대어 또 하나의 건물지가 있다. 서편 언덕 위에는 석등이 놓여 있고 석등 북쪽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지가 발굴되었는데, 이 옆에 홍각선사탑비(보물, 1966년 지정)가 남아 있어서 조사당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넓은 광장에는 승방 등 많은 건물지들이 확인되는데 이곳 입구에 중문(中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림원에는 일괄 1966년 보물로 지정된 선림원지삼층석탑 · 선림원지석등 · 선림원지부도 · 선림원지홍각선사탑비 등이 남아 있다.(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2024년 국립춘천박물관 선림원지 금동보살입상展
https://12977705.tistory.com/8728516

마지막 답사가 2012년입니다.
https://12977705.tistory.com/8723798
 
옛글로 대신하며 사진 몇 장 올립니다.

삼층석탑. 보물
이층기단의 삼층석탑. 1965년 복원

지대석. 기단부
지대석 8매
하층기단 저석 8매, 중석 7매, 갑석 6매. 중석에는 우주, 탱주 1주 모각, 각호 2단 중석 받침
상층기단 중석 8매, 팔부중 봉안
갑석 부연 조출, 2단 각호 탑신받침, 4매석 결구

아수라. 건달바

긴나라. 마후가라

야차. 용

천. 가루라

탑신부
탑신석 우주 모각
옥개석 낙수면 물매, 풍탁공, 전층 5단 층급받침, 2단 각형 탑신 받침

상륜부
노반석과 파손된 보륜?

배례섹

소탑
선림원지 삼층석탑 출토. 국립춘천박물관

진전사지 삼층석탑을 모본으로 9세기 중엽에 조성한 석탑으로 전합니다.

금당지

홍각선사 탑. 보물
2015년 옥개석이 발견되어, 탑신석만 망실

지대석
하대석 하단석, 하대석 상단석과 4단 중대석받침은 일석

하대석 하단석
4면에 사자상을 새겼습니다.

중대석의 운용문

중대석의 운용문

중대석의 운용문

중대석과 일석인 상대석과 탑신 받침

승탑 옥개석(2015년 발굴). 사진. 강원도민일보
모서리마다 귀꽃이 있었습니다.

탑신석 받침과 옥개석으로 추정하면 탑신석은 팔각원당형으로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홍각선사 탑비(886년) 제작시기를 고려하면 승탑 역시 그 무렵 일 것입니다.

조사당지(추정)

고복형 석등

기단부
지대석. 하대석 하단석. 하대석 상단석. 중대석. 상대석

하대석

고복형 중대석

화사석. 안상이 눈에 들어옵니다

옥개석 하부

옥개석 상부

우리나라 고복형 석등
https://cafe.daum.net/moonhawje/MebK/340

석등에서 바라본 뷰

홍각선사(810-880)의 탑비. 886년
 
"비의 주인공인 홍각선사에 대해서는 자세히 전하지 않으나 비의 파편과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의하면, 그는 서사(書史)에 해박하고 경전을 송독(誦讀)했으며 영산(靈山)을 두루 찾아 선석(禪席)마다 참석했다. 홍각선사는 수양이 깊어 문도(門徒)가 운집했다고 한다.
비문은 숭문관직학사 겸 병부낭중 김원(金薳)이 짓고 승 운철(雲澈)이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새겼으며 차성현령(車城縣令) 최경(崔瓊)이 전액(篆額)을 써, 886년에 비를 세웠다고 전한다. 이수 중앙에 제액은 '홍각선사비명이 2행 행 3자씩 독특한 전서로 양각되어 있다. 글씨는 2㎝ 정도의 행서로 당(唐)나라 회인(懷仁)이 집자한 「집자성교서(集字聖敎序)」에서 뽑은 것임을 알 수 있어, 통일신라시대에 왕희지의 글씨가 유행했음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다."(네이버)

2006년 답사 때는 비신이 없었는데, 이후 복원

귀부 전면

제액
홍각선사비명

비좌

귀부 측면, 후면

이수 후면

故弘覺禪師碑銘 幷序
儒林郞守兵部郞中兼崇文館直學士賜緋魚袋臣金薳奉敎撰
沙門臣雲徹奉敎集晋右將軍王羲之書

▨…▨知法本不眞不假, 迺達禪宗. 是故譚空而實在其中, 論實而空居其內, 逈曉千經之表, 恒彰萬象之▨, ▨…▨焉. 懷道體兼作化成, 自然非滅非生, 不增不減, 修之則了乎正覺, 得之則豈究其源, 斯爲法焉. 法▨…▨, 掃跡於玄寂之鄕, 安靜於忘言之域, 其▨弘覺禪師乎.
禪師, 神岸淸爽, 性覺非凡. 法海津梁, ▨…▨. 諱利觀, 字有者, 金姓, 京都人也. 默識天竺▨粹, 堅貞居一節操. 無儔處世, 得松竹之心, 安▨…▨文, 該通書史, 一覧無遺, 誦讀經墳, 五▨▨▨. 卷之敏, 不爲尙也.
年十七, 遂剃髮, 披緇捐俗, ▨…▨. 往海印寺, 訪諸善知, 求其勝者 參問▨▨. ▨▨如流, 義海無涯. 詞峯極峻, 耆宿咸贊曰, 後生▨▨. ▨遊靈嶽, 遍詣禪林, 偶次凌岫, 便欲▨▨. ▨…▨翠泉雲, 奇而復異. 絕昏埈之態, 幽而▨…▨. 敎聰者, 無遠迩, 湊若雲屯.
禪師, 逍▨▨▨▨▨▨, 聖跡名山, 願周巡禮, 乃振▨…▨年, 復於靈巖寺, 修定累月, 諠囂徒▨…▨圓鑒大師, 自華歸國, 居于惠目山, ▨…▨架崖構壑. 重建創脩, 月未朞而功▨…▨
禪師, 緇門模範, ▨…▨彩儼容, 觀覩者, 莫不神肅. ▨…▨之爲上足.
咸通末, 復住於雪山億聖, ▨…▨, 成金殿與香榭. 參差琪樹, 共於松隱, 逆▨…▨, 於時譽雷於世. ▨…▨聖上, 聆風慕德, ▨…▨窹寐▨…▨禪躅, 仍昇內筵, 演苦空, 談妙▨, ▨▨是乎. ▨…▨龍顏, ▨…▨, 以覩靑天, 後不逾旬而告辭. 詔▨▨▨錢路▨…▨. 上亦遣使, 衛送至山.
廣明元年冬十月廿一日詰旦, ▨…▨, “今法緣當盡, 汝等勉旃守道.” 是日, 奄然遷▨, …▨夏五十. 鳴呼, 生爲救俗, 亡以示滅. ▨…▨, 宸衷㧠悼, 萬姓悲涼. 忍草淍衰, 慈雲慘絶. ▨…▨徒興, 追痛之哀. 弟子梵龍使義等, 百▨…▨側, 恩命中官, 爭刻焉.
來年▨…▨, 賜謚曰弘覺禪師, 塔號爲禪鑒之塔. 巍巍▨…▨衣冠, 末流風塵, 冗吏▨…▨, 譽藝匪揚, ▨…▨陳記述. 雖文多簡略, 事不繁書, 盖春秋一字之▨…▨.

大哉佛日 有土皆周
盛乎法▨ 簡方不流
辰韓酷尙 ▨…▨修
竺乾可並 王舍斯儔
師其弘敎 聖跡皆遊
眞理了悟 至道竟覺
心鏡洞開 ▨霜自鑠
談法言表 ▨▨▨廓
論發傾河 德尊仰岳
頻昇內座 居
摧毀禪敎 削▨▨期
▨▨▨▨ ▨▨▨謝
人間蕭條 禪室寂寞
玄關法要 萬古誰攀
▨瞻遺影 涕相生顏
淒淒巖樹 慘慘雲山
豊碑▨…▨
大唐光啓二年丙午十月九日建. ▨…▨車城崔敻篆額. ▨▨▨ 報德寺沙門臣慧江刻字.

 

고(故) 홍각선사(弘覺禪師) 비명(碑銘) 병서(幷序)
유림랑(儒林郞) 수병부낭중(守兵部郞中)註 001 겸 숭문관직학사(崇文館直學士)註 002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은 신 김원(金薳)註 003이 교서를 받들어 찬하다.
사문(沙門) 신 운철(雲徹)이 교서를 받들어 진(晋)의 우장군(右將軍) 왕희지(王羲之)註 004의 글씨를 모았다.

(결락) 법(法)註 005이 본래 진실하지도 않고 거짓이지도 않음을 알아야 선(禪)의 종지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공(空)註 006을 말하되 실(實)이 그 안에 있고, 실을 논하되 공이 그 안에 있어서 멀리 천경(千經)의 바깥까지 밝히고 항상 만상(萬象)의 (결락)을 드러내어 (결락). 〔공은〕 도의 체를 품고 아울러 교화의 성취를 일으키므로 자연히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생기는 것도 아니며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다. 그것을 닦으면 바른 깨달음을 깨달을 수 있으니, 그것을 체득하면 어찌 근원을 궁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법이다. 법은 (결락) 그윽하고 고요한 곳에서 자취를 감추고, 언어를 잊은 곳에서 편안하고 고요하다. 그러한 이는 아마도 홍각선사일 것이다.
선사는 정신이 맑고 상쾌하였고, 타고난 총명함이 평범하지 않았다. 불법의 바다를 건너는 나루터와 다리 (결락). 이름이 이관(利觀)이고, 자(字)는 유자(有者)이며, 김씨 성으로 도성[京都] 사람이다. 묵묵히 천축(天竺)의 순수함을 헤아리며 굳게 하나의 절조에 머물렀다. 벗 없이 세상에 처하여 소나무 대나무 같은 마음을 얻었다. 편안히 글을 (결락) 전적에 두루 통달하여 한 번 보아 남김이 없었고, 경전을 외고 읽어 (결락). 책을 헤아리는 민첩함은 그보다 뛰어난 이가 없었다.
17세에 마침내 삭발하고 승복을 입어 속세를 버려 (결락). 해인사(海印寺)에 가서 여러 선지식(善知識)을 방문하였고, 훌륭한 스승을 구하고자 (결락)를 찾아뵙고 도를 물었다. (결락)이 물 흐르듯 하고, 교학(敎學)에 대한 이해가 막힘이 없었다. 문사(文詞)에 대한 조예가 매우 높아 기숙(耆宿)들이 모두 칭찬하기를 “후생(後生)이 (결락)”라고 하였다. 신령한 산을 다니면서 선림(禪林)을 두루 다니다가 우연히 능수(凌岫)에 머물렀는데 바로 (결락) 하고자 하였다.註 007 (결락) 푸른 샘물과 구름이 기이하고 또 기이하였다. 어리석음을 끊는 태도가 그윽하면서 (결락). (결락) 총명한 자들을 가르치니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구름이 모이듯 성대하게 모여들었다.
선사는 (결락) 소요하였고, 성인의 자취가 있는 명산을 두루 순례하기를 원하여 이에 떨쳐 (결락). (결락)년에 다시 영암사(靈巖寺)註 008에서 여러 달 동안 선정을 닦았는데, 소란스러운 무리들이 (결락). (결락) 원감대사(園監大師)註 009가 중화(中華)에서 귀국하여 혜목산(惠目山)註 010에 머물러 (결락) 절벽에 가로지르고 골짜기에 건물을 지었다. 창건하고 중수하기를 달이 1개월이 되지 않아 일이 완공되었다. (결락)
선사는 불문(佛門)의 모범이었고, (결락) 풍채와 의젓한 용모를 (결락) 보는 이들이 신숙(神肅)하지 않음이 없었다. (결락) 상수제자[上足]가 되었다.註 011
함통(咸通, 860~874) 말년에 다시 설산(雪山)의 억성사(億聖寺)註 012에 가서 (결락) 금당[金殿]과 누각[香榭]을 완성하였다. 삐죽삐죽한 옥나무가 소나무와 함께 숨었지만, 도리어 (결락) 당시에 명예가 세상에 진동하였다. (결락) 성상(聖上)께서 풍문을 듣고서 〔선사의〕 덕을 사모하여 (결락) 자나 깨나 (결락) 선의 자취를 (결락) 그리하여 궁궐의 연회에 올라가 고공(苦空)註 013을 연설하고 묘□(妙□)을 말하였으니 (결락) 이러하였도다. (결락) 용안(龍顏)을 (결락) 푸른 하늘을 보고자 하여 뒤에 열흘이 지나지 않아 사직을 고하였다. 조서를 내려 송별연을 열어주게 하고 (결락) 성상은 또한 사신을 보내 산에 도착할 때까지 호송하게 하였다.
광명(廣明) 원년(880, 헌강왕 6) 겨울 10월 21일 새벽에 (결락) “이제 법의 인연이 다할 것이니 너희들은 힘써 도를 지켜라.”라고 하셨다. 이날 갑자기 천화(遷化)하셨으니 (결락) 법랍이 50세였다. 아아! 살아서는 속세를 구원하시고 죽음으로써 입멸을 보이셨다. (결락) 성왕은 마음속으로 애도하였고, 만백성이 서글퍼하였다. 인동초(忍冬草)가 시들고, 자비로운 구름이 쓸쓸해하였다. (결락) 무리가 일어나 마음 아픈 슬픔을 추모하였다. 제자인 범룡(梵龍), 사의(使義) 등이 백 (결략) 중관(中官)에게 은혜로이 명하셔서 다투듯 새겼다.
다음해 (결락) 시호를 내리기를 홍각선사(弘覺禪師)라 하고, 탑호는 선감지탑(禪鑒之塔)이라 하였다. 높고 높은 (결락) 의관(衣冠) (결락) 말세[末流]의 세상살이 할 일 없는 관리가 (결락) 명예와 재주를 드날리지 않고 (결락) 펼쳐 기술하였다. 비록 글이 대부분 간략하고 일을 번잡하게 쓰지 않은 것은 대개 『춘추(春秋)』에서 한 글자가 (결락)

위대하도다. 부처의 해여. 어떤 땅이든 두루 비추는구나
성대하도다. 법의 (결락)여. 어떤 지역이든 흐르지 않는 곳이 없도다
진한(辰韓)이 매우 숭상하여 (결락) 닦았으니
천축과 나란히 할 수 있고, 왕사성(王舍城)과 짝을 이루로다
선사는 가르침을 펼치면서 성인의 자취가 있는 곳이면 모두 다녀
참된 이치를 완전히 깨달았고 지극한 도를 끝내 깨달아
마음의 거울 환히 열려 서리가 절로 녹았도다
법을 말하는 말씀마다 (결락)
담론이 일어나 강물을 기울였고, 덕이 높아 산을 우러러보았다
자주 궁궐의 법좌에 올라가 앉았으며
선교(禪敎)를 훼방하는 이들을 꺾고, (결락)기(期)를 (결락) 깎았다
(결락) 물러났다.
세상이 쇠락하니 선방[禪室]도 적막하네
심오한 불도에 들어가는 입구인 법요(法要)를 만고에 누구에게 의지할 것인가
남겨진 초상화를 보며 살아계실 때의 얼굴을 생각하며 눈물 흘리네
바위와 나무 처량하고, 구름과 산도 쓸쓸하도다
큰 비(碑)가 (결락)

대당(大唐) 광계(光啓) 2년 병오(丙午, 886) 10월 9일 세우다. (결락) 차성(車城)〔현령〕註 014 최경(崔敻)이 전액(篆額)을 썼다. (결락) 보덕사(報德寺) 사문(沙門) 신 혜강(慧江)이 글자를 새겼다.
(출처.한국고대사료 DB)

선림원지에 가서... 이상국
 
선림(禪林)으로 가는 길은 멀다
미천골 물소리 엄하다고
초입부터 허리 구부리고 선 나무들 따라
마음의 오랜 폐허를 지나가면
거기에 정말 선림이 있는지
 
영덕, 서림만 지나도 벌써 세상은 보이지 않는데
닭죽지 비틀어 쥐고 양양장 버스 기다리는
파마머리 촌부들은 선림 쪽에서 나오네
천년이 가고 다시 남은 세월이
몇 번이나 세상을 뒤엎었음에도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근 농가 몇 채는
아직 면산(面山)하고 용맹정진하는구나
 
좋다야, 이 아름다운 물감 같은 가을에
어지러운 나라와 마음 하나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소처럼 선림에 눕다
절 이름에 깔려 죽은 말들의 혼인지 꽃들이 지천인데
경전(經典)이 무거웠던가 중동이 부러진 비석 하나가
불편한 몸으로 햇빛을 가려준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여기까지 오는데 마흔아홉 해가 걸렸구나
선승들도 그랬을 것이다
남설악이 다 들어가고도 남는 그리움 때문에
이 큰 잣나무 밑동에 기대어 서캐를 잡듯 마음을 죽이거나
저 물소리 서러워 용두질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슬픔엔들 등급이 없으랴
 
말이 많았구나 돌아가자
여기서 백날을 뒹군들 니 마음이 절간이라고
선림은 등을 떼밀며 문을 닫는데
깨어진 부도(浮屠)에서 떨어지는
뼛가루 같은 햇살이나 몇 됫박 얻어 쓰고
나는 저 세간의 무림(武林)으로 돌아가네 

 
2026.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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