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남원시

남원...만복사지

임병기(선과) 2026. 4. 1.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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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복사지. 사적

몇 차례를 다녀왔는지 가물가물, 정비된 후에는 스쳐만 지났습니다.

 

답사기는 2번(2008년, 2013년) 포스팅했군요, 한 번은 사진만 올렸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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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복사

"고려~조선시대 남원 지역의 거찰이다. 창건과 관련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姜希孟의 글과 『新增東國輿地勝覽』에 고려 文宗 때 창건되었다고 언급되어 있다. 한편 『龍城誌』에는 통일신라 후기 道詵國 師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설을 기록하고 있으나 구전에 의한 것이어서 근거는 명확하지 않다.

 

만복사의 창건과 연혁을 알 수 있는 고려시대의 문헌은 확인되지 않으나, 조선시대 이후에는 문헌을 통해 만복사가 대가람의 면모를 지니고 있던 지역의 대표 사찰이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앞서 언급한 『新增東國輿地勝覽』과 함께 『世宗實錄 地理志』, 그리고 강희맹의 글에는 만복사에 ‘五層殿, 서 쪽에 二層殿이 있으며 長 35尺의 鐵佛(銅佛)이 있다.’고 적혀 있다. 또한 金宗直의 시 「南源萬福寺」 중 ‘구름 위에 솟은 上刹이 단청도 찬란하여라.’라는 구절을 통해서 단청이 화려한 높은 건물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성종 14년(1483)의 기록에서는 선왕이 특별히 보호하였던 사찰 중 하나로 꼽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만복사는 조선전기 왕실의 비호까지 입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기록들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長 35尺의 동불’이 있었다는 것으로서, 김시습의 「萬福寺樗蒲記」에 등장하는 佛 殿의 부처님이 바로 이를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萬福寺樗蒲記」는 남원 출신의 서생 梁生의 사랑을 그린 소설로서 그 배경이 되는 곳이 바로 남원 만복사이 다. 특히 내용 중에는 만복사의 모습이 다소 쇄락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15세기 후반에 다소 사세 가 축소되고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만복사가 15세 기 전반에 비해 다소 쇄락해가고 있었다는 것은 다른 문헌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1477년(성종 8)에는 만복사 승려가 비리에 연루된 일이 있었고, 1516년(중종 11)에는 만복사의 佛腹藏을 유생이 훔쳐가는 사건도 발 생하였다. 또한 金齊閔, 鄭士龍 등의 글에서도 다소 황 폐한 만복사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이로 보아, 15세 기 후반 무렵부터 만복사의 사세는 다소 축소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정유재란의 기록인 『亂中雜錄』에는 왜적이 만복사 나한상을 녹여 구리쇠로 만들어 가져가고, 사천왕상을 싣고 와 성 밖에서 시위하였던 일이 기록되어 있다. 즉 정유재란으로 인해 만복사는 전각이 소 실되고 불상을 약탈당하는 등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정유재란으로 인한 만복사의 피해는 龍城誌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사찰은 ‘정유재란으로 모두 탕진되고 다만 1칸의 팔작건물과 불전 내의 석불만 남았으며, 대웅전, 약사전, 장육전, 영산전, 보응전, 종 각, 천불전, 나한전, 명부전 등의 전각은 다만 터로 남아 있었다.’ 한다. 이 기록에서는 1678년 南原府使 鄭東卨 이 僧房을 짓고 스님을 상주케 하면서 만복사가 명맥을 이어갔다고 하였다.

 

그러나 1656년에 간행된 『東國輿地 志』에는 ‘정유재란으로 병화를 입었으나 지금은 작은 사찰로 중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들로 미루어, 만복사는 정유재란의 폐해를 극복하지 못하고 중건과 폐사를 거듭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거대한 규모의 건물과 동불은 사라지고 석불만 남은 채 소규모의 사 찰로서 법등을 이어가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예전의 사세를 잃은 만복사의 사격에 또 한 차례 타격을 입힌 사건이 발생하는데, 1733년(영조 9)에 발생한 ‘萬福寺 掛書 사건’이 그것이다. 조선후기 무신 난의 과정에서 등장한 ‘掛書’는 亂의 전조 형태로 인식되었으며, 이미 영조 4년 이인좌의 난을 겪은 후였기에 만복사에 걸린 괘서는 또 한 차례 큰 파장을 일으켰다고 한다. 사건의 내용은 남원 만복사 석불상에 영조를 무함하는 말이 포함된 凶書가 걸리게 되었다는 것인데, 이를 남원 부사가 서보로 보고하면서 조정에 한 차례 파란을 불러왔고 여러 인물들이 처벌을 받게 되었다.

또한 이 일을 계기로, 만복사의 사명은 ‘百福寺’로 강등된다. 실제로 『英祖實錄』에는 만복사를 ‘百福寺’로 칭한 기록이 여 러 차례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 사건 이후 만복사가 폐사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伽藍考』, 『梵宇攷』를 비롯, 『南原邑誌』, 『輿地圖書』, 《海東地圖》 등을 통해 사찰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大東地 志』에 “今廢”로 기록되어 있고, 1872년 『湖南邑誌』에 “萬北寺”로 표기되어 있으며, 1895년 「南原府邑誌」에서는 사명마저도 보이지 않아, 19세기 후반에는 명맥이 끊긴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만복사지의 모습은 『朝鮮古蹟圖譜』에 수록된 사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사역 내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초가에 둘러싸인 석탑과 당간지주, 석인상 등이 반쯤 매몰된 상태로 드러나 있었다. 사역 내의 석탑, 당 간지주, 석불입상, 대좌는 1933년 제정된 「朝鮮寶物古蹟 名勝天然記念物 保存令」에 의거하여 보물로 지정되었고, 『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 사지의 현황이 간략히 기록되었다. 만복사지는 일제강점기 조사 및 보물 지정 이후 그중 요성이 지속적으로 인식되어, 1963년 사역 내의 유물이 모두 보물로 지정되었고 1991년에는 사적 제349호로 지정되었다. 만복사지는 남원 지역의 주요 유적으로서 문화유적총람에 석조유물의 현황과 함께 보고되어 있으며, 사역과 사역 내의 석조유물에 대한 보고·조사·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한편 1979~1985년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중심 사역의 가람배치를 확인하였어며, 2015년에는 사역 남쪽 일원의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한국의 사지. 국가유산청)

당간지주. 석조인왕상

오층 석탑과 함께 그즈음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2008년. 당간지주와 불두만 1기 도로변에 위치

2013년. 당간지주는 도로변, 인왕석주는 1구만 사지 경내로 이건

인왕상1

3면만 표현, 고개를 돌린 모습, 완천, 팔찌. 요포(腰布)

인왕상 2

자료에는 불두와 불신이 별도로 조성, 인왕상 석주는 당간지주였을는지.

당간지주

간구. 간공 2

당좌

중문지

당간지주 뒤편

중문지에서 바라본 목탑지. 오층석탑

석등 하대석

중문지와 목탑지 사이에 조성

목탑지

목탑지

돌계단, 소맷돌

서금당지

연화대좌. 보물

육각, 지대석, 상중하대석이 일석

하대석 각 면에는 2구씩의 안상을 마련하고 그 내부에 귀꽃문 조식, 하대석 상단은 앙련의 연화문으로 장식, 중대석에 우주,  탱주를 새겼습니다. 상대석은 앙련의 연화좌로 추정되나 훼손이 심하여 확인되지 않습니다. 였을 것으로 판단되나 외연이 모두 파손되어 조각 이 확인되지 않는다. 대좌 상면에는 불상이 안치되었던 방형 홈이 남아 있습니다.

방형 홈

중앙 본존불 대좌, 좌우 협시보살 대좌

연화대좌

문헌에 기록된  이층전(二層殿) 장삼십오척 동불(長三十五尺 銅佛)의 대좌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동금당지

북금당지

북금당지 앞 석등대좌

북금당지 불상대좌

석탑부재

지대석 2매, 기단갑석 2매. 옥개석 3매

옥개석 찰주공

낙수면 물매가 급하고, 1단 각형 탑신받침

층급받침 4*4*3. 절수구 생략

3층 석탑부재로 추정되며 오층석탑과 동시대, 또는 그 이전에 조성된 석탑으로 추정

오층석탑. 고려. 보물

지대석. 단층기단. 탑신. 상륜부 망실

기단

갑석 하부 부연 생략, 면석에는 우주 모각(북쪽면 생략), 민흘림처럼 느껴집니다.

평박한 기단갑석

갑석과 초층 옥개석 너비가 비슷

초층탑신석에 비해 상층 탑신석이 체감 급격. 초층 탑신석에 사리장치가 있다고 합니다.

옥개석의 1단 석탑받침과 별석의 석탑받침. 

1~2층 탑신석에만 우주 모각?, 오층 옥개석 상부의 찰주공, 오층탑신석은 후보 하였습니다.

강당지 옆 탑신석이 본래 오층탑신석은 아닐는지.

금당지 옆 탑신석으로 추정되는 부재

옥개석

평박, 전층 2단 층급받침, 절수구, 상하처마의 반전

오층석탑

단층기단, 세장한 느낌. 기단부, 평박한 옥개석, 옥개석의 상. 하처마선의 희미한 반전 등의 백제계 석탑의 특징을 가진 고려전기에 조성된 석탑으로 추정됩니다.

강당지에서 바라본 뷰

석불입상 보호각

석불입상. 보물

대좌

팔각 상하 2매석

하대석은 저석중석갑석이 일석, 중대석에 안상 조식, 상대석은 복련으로 장식하였습니다.

대좌 위에 불신을 끼웠으며, 두 발은 별석으로 조성되었으나 망실

불신 광배 일석, 두 손은 별석

소발, 높은 육계(육계 상부 중앙에는 원형 홈), 타원형 상호, 백호공, 눈과 코는 훼손, 도톰한 입술, 귀는 길어 목에 닿았습니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며 두 손이 망실되었지만 시무외인, 여원인 수인으로 추정. 허리는 가늡니다. 통견, U자형 승각기, 가슴 옷자락은 U자형, 양다리 사이에서 Y자형으로 갈라지며, 무릎은 우전왕식 U자형 주름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거신광으로 두광과 신광을 각각 2줄 겹동선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두광. 상호

연화문이 새겨진 두원광. 신광 내부의 당초문, 외부 화염문, 거신광에는 좌우에 각각 1구의 화불을 새겼으며, 잘려나간 상부에도 화불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거신광의 당초문, 화염문

거신광의 당초문, 화염문

석불입상

고려전기 작품으로 추정하며, 서향을 하고 있어 아미타불로 추정됩니다.

석불입상

배면에도 선각으로 불상을 새겼습니다.

연화좌가 마치 상대석처럼 느껴집니다.

선각

통견, 승각기, 군의 띠매듭, 대의자락은 복부에서 크게 ‘U’ 자형을 그리며 드리워 있습니다. 하반신의 옷주름은 양다리에 각각 타원 형이 대칭으로 흘러내리고, 군의에도 양다리에 각각 ‘U’ 자형의 주름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오른손. 가슴 앞에 엄지 검지를 맞대고 있으며, 왼손에는 정병을 들고 있습니다.

소발, 높은 육계, 반달형 눈썹, 반쯤 뜬 눈, 훼손된 코, 긴 귀, 삼도가 뚜렷합니다.

거신광 두광 2줄로 표현, 내부에는 장식 없으며, 외연에 염화문을 새겼습니다.

전면처럼 두광 좌우에 화불을 각각 1구 새겼습니다.

석불입상

11세기로 추정되는 만복사 창건 시에 조성한 불상으로 전합니다.

또한 정면 불상의 존명을 아미타여래로 보면 배면의 선각여래입상은 약사여래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나라의 양면불

https://cafe.daum.net/moonhawje/MebK/235

건물지

강당지 동쪽 건물지

강당지

강당지 옆 석조부재

강당지 서편 건물지

만복사지

고려전기에 창건되어 조선말까지 향화를 피웠던 만복사는 몇 번의 발굴을 통하여 고구려 가람배치인 3금당 1탑이 확인되었으며, 오층석탑에는 백제계 석탑의 특징을 찾을 수 있습니다. 문헌에 기록된 오척의 동조여래입상, 동조 5백 나한이 봉안되었던 그 시절엔 가람배치가 어떠했을지?, 어디로 만행을 떠났는지?  현재 사지에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오층석탑, 석불입상, 석조대좌, 당간지주와 전북 유형문화유산인 인왕형 석주, 석탑재 4매 등의 유물이 남아 있습니다.

 

김종직(1431~1492). 점필재집

천실풍연고고룡 千室風煙古古龍 일천 가호 바람 연기 자욱한 옛 고룡에
참운상찰란청홍 劖雲上刹爛靑紅 구름 위에 솟은 상찰이 단청도 찬란하여라
수재만억탄공교 搜材萬億殫工巧 만억을 들여 재목 구하고 극도로 꾸몄으니
필의난심호읍공 畢竟難尋護邑功 끝내 이 고을 보호한 공은 찾기가 어렵구나

 

2026.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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