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남서원
"1791년(정조 15)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황보 인(皇甫仁)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831년(순조 31)에 ‘광남’이라 사액되어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 훼철되었다가 그 뒤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다음)
전학후묘 배치로 외삼문, 강당인 숭의당과 동서재. 내삼문 황보인을 모신 사당인 세덕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황보인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65157
復陽門
외삼문
충정공 신도비
영의정 충정공 지봉 황보 선생 신도비
崇義堂. 동서재
내삼문
忠定廟
사당입니다
追遠壇. 忠婢丹良碑閣
숭의당 향우 측에 다른 서원에서는 볼 수 없는 두 전각이 있습니다
추원단
무덤이 없는 황보인, 아들 황보서, 손자 황보강을 추모하는 추원각을 세우고 매년 10월에 봉향한다고 합니다.
충비단랑비각
황보인의 여종 단랑을 기리는 비석이 있습니다.
忠婢丹良之碑
후면
비문
우리카페 회원인 장두강 선생님의 글을 옮겨왔습니다.
"광남서원 안 담벼락 밑에 충비단량지비(忠婢丹良之碑, 충성스러운 노비 단량의 비)라고 새긴 자그마한 비석하나가 오랜 풍상을 간직한 채 쓸쓸히 서있다. 서원 안에 노비를 기리는 비석이 있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황보인과 노비 단량에 얽힌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계유정난을 계획하던 수양은 어느 날 황보인을 찾아간다. 수양은 황보인에게 같이 함께 정권을 바꿔보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황보인은 이를 거절한다. 그 거절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계유정난, 그러니까 수양대군이 왕위를 노려 난을 일으켰던 단종 1년(1453) 10월에 당시 영의정을 지내던 황보인
(皇甫仁)은 좌의정 김종서와 함께 어린 단종을 보필하다가 수양대군의 칼날에 무참히 살해되었다.
또한 왕명이란 전갈을 받고 한밤중에 궁궐에 모여든 수십 명의 대신 역시 수양대군 군사들의 손에 피를 뿌리며 죽어
갔다.
계유정난으로 황보인과 함께 세 아들 참판공(參判公)석(錫)과 직장공(直長公) 흠(欽), 그리고 참판공(參判公) 석(錫)의 아들 원(源)과 문(汶) 등 다섯 사람 역시 모두 화를 당하였다.
화를 당하기 전, 이 소식을 전해 들은 황보인의 차남 흠은 곧 황보 가문에 멸문의 화가 닥쳐올 것임을 알았다.
달아날 길은 없었다. 도성을 에워싼 성문은 이미 수양대군의 군사들이 장악하고, 오가는 사람들을 엄중히 검색하고 있을 게 자명했다. 다급한 궁리 끝에 흠은 노비 단량을 불렀다. 집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심지가 깊고 충절을 지닌 노비였다.
“물동이에 넣으면 될 듯합니다.”
100일도 안된 아들 단(湍)을 몰래 도성 밖으로 데려가야 한다는 말에 단량이 순간적으로 궁리해 낸 방안이었다.
황보흠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다시 볼지도 모르는 먼 길에 사용하도록 금붙이 몇 개를 물동이 안에 넣어준 사람은 흠의 처였다.
새벽녘, 물을 길으러 가는 아녀자처럼 행색을 꾸민 그녀는 파루소리가 들리자 곧장 아기를 숨긴 물동이를 이고 경비가 삼엄한 성문을 통과해 도성을 빠져나왔고, 멀고 먼 팔백 리 길을 걸어서 도착한 곳은 경상도의 북쪽 봉화의 달실마을
이었다. 황보인의 막내사위 윤당이 사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곳 역시 마음 놓고 머물 수 있는 장소는 아니었다. 언제 한양에서 첩보를 받은 수양대군의 군사들이 들이닥칠
지 모를 일이었다.
윤당은 노자를 주면서 "여기도 안전한 곳이 아니니 어디론지 땅끝까지 가서 안전한 곳에서 살되 어미처럼 이 아이를 키워서 조상에 대한 내력을 일러주라"라고 당부한다.
노비 단량은 단을 데리고 또다시 홀로 피신길에 나섰다.
그렇게 불령계곡을 넘어 태백산맥을 넘고넘어 무작정 물설고 낯선 지방을 걸인처럼 떠돌길 수개월, 마침내 아기를 업은 단량이 도착한 곳은 동해안의 한적한 바닷가, 경상북도 포항의 대보면 구만리의 짚신골이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단을 자식처럼 애지중지 키워 성년이 되었을 때 조상에 대한 내력을 일러주었다.
단(湍)의 아들은 서(瑞)이며, 단(湍)의 손자(孫子)는 강(剛)이고, 단(湍)의 증손(曾孫)은 억(億)이다. 나중에 증손 억 이 포항시 구룡포 성동 3리로 이주하여 새로운 세거지를 이루었다. 참으로 충직하고 의로운 여인이었다.
후일, 충비 단량의 충절과 희생으로 멸문지화를 피한 황보 가문은 4대째 숨어 살다가 290년이 지난 숙종대에 와서 역적 누명이 풀렸고, 황보인과 두 아들인 황보석, 황보흠은 관적을 회복했다.
290년만에 누명이 풀려 충신으로 추앙받게 되자 황보 씨 가문이 다시 되살아나 오늘에 이른 것이다.
정조 15년(1791년)에 뜻있는 지방의 선비들이 황보 인과 그의 두 아들 황보 석, 황보 흠을 제사 지내기 위해 광남서원
을 세웠고, 황보씨의 후손들은 황보인의 손자 황보단을 살려서 키워준 가문의 은인인 단량에 대한 고마움과 뜻을 기려
서 비석을 세웠다.
그 비석이 지금 구룡포의 광남서원(廣南書院)에 있는 것이다."
충보비
https://cafe.daum.net/moonhawje/MebK/363
2024.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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