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건 묘갈. 경기도 문화재 자료
고삼면 삼은리 산 2-1 고삼저수지에 인접해 있습니다.
묘 답산은 관심 분야가 아니지만 특이한 비머리를 찾아왔습니다.
유명건 묘갈
유명건의 조카 유척기가 영의정으로 재직 때인 1758년에 세웠다고합니다.
(문화재청 자료. 묘갈은 1758년에 건립했으나 개석이 비신과 크기가 맞지 않는다. 개석의 양식은 1720년대로 추정된다.)
영조 때 유학자 도암 이재 (李縡:1680~1746 )가 찬하고, 장인 곡운 김수증( 金壽增:1624~1701) 글을 집자하였으며, 제액은 유척기(兪拓基:1691~1767)의 글씨입니다.
유명건
1664년(현종 5)∼1724년(경종 4). 조선 중기 문신‧유학자. 자는 중강(仲强)이다. 본관은 기계(杞溪)이다.
예조판서(禮曹判書) 유여림(兪汝霖)의 후손으로, 고조는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 유강(兪絳)이고, 증조부는 증이조참판(贈吏曹參判) 유대의(兪大儀)이며, 조부는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유성증(兪省曾)이다. 부친 가의대부(嘉義大夫) 대사헌(大司憲) 유철(兪㯙)과 모친 봉사(奉事) 한전(韓甸)의 딸 청주한씨(淸州韓氏) 사이에서 3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 유명순(兪命舜)과 동생 유명악(兪命岳)이 있다. 부인은 두 명을 두었는데, 첫째 부인 안동김씨(安東金氏)이고, 둘째 부인은 사인(士人) 안후선(安後宣)의 딸 순흥안씨(順興安氏)이다.
8세 때 부친을 잃었고, 뒤이어 모친까지 여의었다.
어려서는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경전(經典)을 두루 익히고, 명유(名儒)들을 찾아가 배움을 구하는 등 학문 연구에 매진하였다. 장성하여서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에게서 학문을 익히고 있었는데, 스승 송시열이 화를 당하는 것을 보고 과거에 뜻을 접었다.
1702년(숙종 28) 식년시 생원 3등 46위로 합격하였고, 이후 음사(蔭仕)로 관직에 나아가 나주(羅州)‧해주(海州)‧안악(安岳)‧한산(韓山)‧담양(潭陽) 등지에서 목사를 지냈다.학문을 좋아하였고, 지우(知友)와만 교유하였다. 평소 거처할 때에는 자기 수양에 매진하였다.슬하에 2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교리(校理) 유최기(兪最基)‧봉사(奉事) 유직기(兪直基)이다.
(출처.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이재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35774&cid=46622&categoryId=46622
김수증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45854&cid=62132&categoryId=62132.
유척기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39694&cid=46622&categoryId=46622
방형 기단위에 비신을 올리고 이수는 한옥의 팔작지붕 형태이며, 두 마리 용이 중앙에서 여의주를 움켜 쥐고 있으며, 나머지 다리는 추녀를 붙잡고 있습니다.
(제액.전)牧使贈判書
글씨가 없는 전액, 겹처마, 다포계 공포
(제액. 후) 兪公墓碣銘
비신(전)
비문 .한국 금석문. 국가지식 이음에서 옮겨 옴
朝鮮國通訓大夫羅州牧使羅州鎭兵馬僉節制使 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兪公墓碣銘幷序
資憲大夫議政府左叅賛兼 世子右賓客李縡撰
從子大匡輔國崇祿大夫領中樞府事 拓基謹篆
宋儒榮蔭襲而賤科名漢時公卿多由循良進東俗則反是然徃徃出於常格之外者猶可數也兪公命健在蔭仕中蔚有公輔望遭時不幸不 克究厥施識者恨之公字仲强杞溪人有新羅阿飡三宰者始見于&A5012;入 國朝景安公諱汝霖肅敏公諱絳仍父子判書其曾孫諱省曾江原 道觀察使生諱㯙司憲府大司憲尤菴先生銘其墓公其仲子也母夫人淸州韓氏奉事甸女公生而岐嶷弱不好弄大憲公常撫愛之曰吾家 宰相臾也甫學方名己就外侍寢大憲公出入能扶持問所食飮而敬進之八歲大憲公捐館纔免喪而韓夫人繼逝拜跪哭泣哀動旁人己巳 好黨請黜栗牛兩先生從祀公與同志上章辨誣至 聖后遜位尤菴受後 命公義不赴擧甲戌改紀復就公車中壬午生員是冬除典設司 別檢仕滿陞司宰監主簿丙戌以司憲府監察出爲陽城縣監陽畿內小縣又蕩敗公不生狷避意一以當官盡職爲心百廢盡擧未久成一完 邑爪遆民立碑恩之又相與語曰脫有兵革而兪俁蒙難者吾等當拚死奔救云會 朝家命道臣薦進管下於是寒圃李公健命諸人齊擧公 庚寅北咨示警公又登於別剡辛卯由宗簿寺主簿出而通判海州州自詳定以後受弊滋甚公痛加爬櫛弛張得宜民賴以蘇俗又健訟而剖 決如流案無停牘人稱之以爲百年來無此賢太守癸巳移韓山郡宇尋因微嫌即辭遆卜居于扶餘之隱山搆溪亭扁之以覺今擬爲休官經 老計俄因事還京拜江華府經歷辭不赴歷司僕寺判官乙未爲安岳郡守公一以治海者治之民皆悅服郡兼營將戎政克擧器械一新且於 十八坊坊置社倉爲安民永久利繡衣以治最一道 聞戊戌陞潭陽府使公不以家累自隨廉明有威豪猾戢息人目之爲廉虎庚子量田之 役經界得正民無怨者旋陞羅州牧使州號煩劇而沛然若無事寬嚴相濟治化大行逮壬寅士禍之作公棄官不歸京師寓居藍浦之藍田村 杜門却掃書史自娛甲辰九月偶感疾以是月二十一日卒年僅周甲返葬于楊州龜沼谷前媲金淑人墓右後移卜陽智古東三隱里坐癸之 原兩淑人同祔焉金淑人叅判谷雲諱壽增之女生一女爲叅奉李晋聖妻安淑人士人後宣女有二男冣基文科大司諫直基進士縣令側出 男在基冣基一男幼三女壻金漢奉李春彬進士洪在漢直基四男彥鏶彥䥧彥鋐彥鎬李壻子揆文縣監女適黃處浩公風儀&A5541;偉姿性貞介 平居不事矜持而無怠慢之容恬於財利謹於辭受內和甚篤伯兄夫婦早世公攝主祀克致誠禮撫養孤姪以至成立及其取婦一以宗事選 之其喪難艱棘之際善處家事多有人所不及者兄弟叔姪同處一室餘二十年而庭無間言大憲公之喪取遺衣一領寢處其中以卒三年終 身孺慕不衰於奉先之節無所不用其誠遠近丘墓遍行省拜隨加封築無表刻則爲之經紀立石又採摭闕遺以成杞溪世&A2889;重修宗契四時 講信以叙敦親之義推而至於朋交官守之際各當其理與人不爾女未嘗持被卜夜而情好無甘壤善善多於惡惡橫送不咎人而好反己雖 處談諧之場而辭氣簡穆或値滾&A5012;之頃而容止整暇治民以不擾爲本寬樂雍容而濟之以剛明周詳縝密而不失於刻核務爲遠圖不事少 惠議獄必盡心而當檢尸則親自手按日人命所關不可不謹也跡公事行盖古所稱廊廟之具者而局於常塗利澤所及止於州郡嗚呼豈非 命耶公雖浮沈祿仕而常翛然有塵外&A5542;觀於晚節可知風流篤厚志尙儒素不失故家詩禮之傳足以貽後昆於無窮其可敬也已銘曰 觀人有術維德爲大身不離俗中實耿介寬栗溫理即見于外發爲政事仁澤旁沛通才偉器時望攸載埋彼山北賢嗟之會世氣衰薄風韻莫 逮我銘其行庸勅稚昧
유명건묘갈
조선국 통훈대부 나주목사 나주진병마첨절제사 증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유공묘갈명 병서 자헌대부 의정부 좌참찬 세자우빈객 이재는 글을 짓고,
종자 대광보국 숭록대부 영중추부사 척기는 삼가 전액을 하다.
송유들은 음사나 습사를 영광스럽게 여기고 과병은 천시하였으며, 한나라 때의 공경들은 순리나 양리에서 승진하는 가람이 많았는데 동국의 풍습은 이와는 반대였다. 그러나 종종 상격에서 벗어난 사람들도 셀만큼은 되었다. 유공 명건은 음서 중에서도 울연히 공보의 중망이 있었으나 불행한 때를 만나 그 포부를 다 베풀지 못하였으니, 식자들은 한스럽게 여겼다.
공의 자는 중강이고 본관은 기계이다. 신라의 아찬 삼재란 사람 있어 맨 처음에 보첩에 나타나는데 국조에 들어와서는 경안공 휘 여림과 숙민공 휘 강의 부자가 연해 판서가 되었고, 그 증손 휘 성증은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관찰사가 휘철을 낳으니, 사헌부대사헌이요, 우암선생이 그의 묘에 명을 하였는데 공은 그분의 중자이다. 모부인 청주한씨는 봉사 전의 따님이다. 공은 낳으면서부터 기억하여 어려서도 희롱을 좋아하지 않으니, 대헌공이 항상 사랑하고 아끼시며 말씀하시기를 “우리집 재상감이로다.”하였다.
겨우 행방과 이름을 배울 때부터 사랑채에 나와 대헌공은 시침하였는데, 출입할 때는 능히 부축을 하였고 드시고 싶은 것을 물어서 올리곤 하였다. 8세 때에 대헌공이 연관하고 겨우 복을 벗자 부인마저 서거하니, 배궤 곡읍에 그 슬퍼함이 곁의 사람들을 감동케 하였다. 기사년에 간당들이 율우 양 선생을 종사에서 내쫒기를 청하니, 공은 동지들과 더불어 소장을 올려 변무하였고 성후의 손위와 우암이 후명을 받음에 이르러서는 공은 의리상 과거에 응하지 않았었다.
갑술년에 다시 공거에 나가 임오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그해 겨울에는 전설사별검에 제직되었으며, 임기가 차지 사재감주부로 올랐다. 병술년에는 사헌부감찰에서 양성현감으로 나갔는데, 양성은 기내의 작은 고을로 탕패도 심했지만 공은 싫어하거나 마다하지 않고 한결같이 자리에 임하여 직분을 다하기로 마음먹고 백폐를 다 회복하니, 미구에 완읍이 되었으며 과만되어 체직하니 백성들이 비를 세워 은혜를 기리며 서로 말하기를, “설사 난리가 나서 유후가 난을 입게 된다면 우리들은 목숨을 내걸 달려가 구원해야 한다.”하였다.
마침 그 때 조정에서는 도신에게 명하여 관하에서 유망한 사람을 천거하라 하였는데, 한포 이건명 등 제인은 나란히 공을 천거하였고, 경인년 북자에서 경계할 내용이 비치자 공은 다시 별염이 되기도 하였다. 신묘년에 종부시주부에서 해주판관으로 나갔는데, 해주는 상정 이후로 폐해를 봄이 극심하여 공은 통렬하게 사찰을 하여 강약의 조화가 적절하니 백성들이 이를 힘입어 소생하게 되었고, 풍속이 또 건송하였는데 부결이 물 흐르듯 하여 탁상에 정독이 없으니, 사람들이 일컫기를 백년이래로는 이러한 태수가 없었다 하였다.
계사년에는 한산군수로 옮겼다가 얼마 후에 사소한 혐의로 사직하고 부여의 은산에 자리잡아 계정을 짓고 각금이라 현액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노경을 보낼 계책을 꾸몄다. 그런데 갑자기 일이 있어 서울로 돌아갔다가 강화부경력을 제배하였으나 부임치 않고, 사복시에 판관을 거처 을미년에 안악군수가 되었는데, 공은 한결같이 해주를 다스린 것처럼 잘 다스리니 백성들은 열복하였다. 또 본군은 영장도 경하고 있었는데 군정도 잘 다스려지고 군기도 새것으로 바꾸었다. 일팔방에는 방마다 사창을 두어 안민과 영구리에 힘쓰니 수의는 일도에서 치적이 제일이라고 계문하였다.
무술년에는 담양부사로 올랐는데 가족을 데리고 가지 않고 청렴결백함으로 위엄을 보이니, 호민활리가 자취를 감췄으므로 사람들이 염호라 지목하였고, 경자년 양전 때는 경계를 재대로 바루니 백성들이 원망한 자가 없었다. 직후에 나주목사로 올랐는데 나주는 번극하다고 이름이 있는 고을이었으나 씻은 듯이 일이 없어지고 관엄을 갖추어 쓰니 치화가 크게 행해졌다.
임인년에 사화가 일어나니 공은 벼슬을 버리고 서울로 돌아가지 않은 채 남포의 남전촌에 우거하여 두문불출하고 서사에 낙을 붙였다. 갑진년 9월에 우연히 병에 걸려 이달 13일에 졸하니 나이 겨우 60세였다. 양주 구소곡 전배 김숙인의 묘 우측에 반장하였다가 뒤에 양지의 고동 삼은리 계좌원에 이장하였는데 두 숙인도 부장하였다.
김숙인은 참판 곡운 수증의 따님인데 1녀를 두어 참봉 이진성의 처가 되었다. 안숙인은 사인 후선의 따님인데, 2남을 두어 최기는 문과 대사간이요, 직기는 진사 현령이며, 측출에서 낳은 아들은 재기이다. 최기의 1남은 어리고 3녀의 사위는 김한봉, 이춘빈, 진사 홍재한이며, 직기의 4남은 언집, 언선, 언횡, 헌호이다.
이서의 아들 규문, 딸은 황처호에게 출가하였다. 공은 풍의가 준위하고 품성이 곧아서 평거에도 자긍하거나 태만한 기색이 없었으며 재리에 관심이 없어 사수에 극히 조심하였다. 내행도 매우 독실하여 백형 내외가 일찍 세상을 뜨니 공이 주사하면서 성과 예를 다하였으며, 고질을 무양하여 자립할 수 있게 하였고, 아내를 맞아줄 때에는 오직 종사를 염두에 두고 가렸기 때문에 상난이 극심할 때를 당하여서도 집안일을 잘 처리하여 남들이 따르지 못할 바가 많았으며, 형제 숙질이 20여년을 한집에서 살았으나 집안에 군말이 없었다.
대헌공의 상에는 유의 한 벌을 가져다가 그것을 덮고 삼년을 마쳤으며, 종신토록 유모가 쇠함이 없었고, 선영을 받드는 일에도 정성을 다하지 않는 바가 없어 원근의 묘소를 두루 돌며 전성하고 수시로 봉축을 손질하였으며, 묘표가 없는 곳은 경기하여 돌을 세웠고, 궐실한 곳을 수습하여 기계 세보를 꾸몄으며, 종계를 중수하고 사시로 강신하여 돈친의 의리를 폈다.
또 나아가 붕우 교제나 관수의 일에 있어서도 각기 도리에 알맞게 처신했다. 사람들과 네것 내것을 따지지 않아 일찍이 이불을 가지고 숙직하러 간 일이 없었으나 정리는 가감없이 항상 좋았으며, 선을 좋아함이 악을 미워함보다 더하였고 횡역이 닥쳐도 남을 탓하지 않고 자기반성을 하였으며, 비록 담소 해학한 자리에 처하여서도 사기는 간목하였고, 혹 골몰하거나 급작스러운 때를 당하여서도 행동거지는 정제되고 안한하였다. 백성을 다스림에는 번요하지 않은 것을 근본을 삼고, 관인 옹용에 강명과 주상을 겸하였으며, 진밀하면서도 각핵에 기우는 일이 없었고, 원도를 세우기에 힘쓰고 소혜를 일삼지는 않았다.
옥사를 다스림에는 반드시 성의를 다하였고 검시를 할 때에는 몸소 손으로 만지며, “인명에 관한 일이니,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하였는데 공의 사행을 더듬어보면 아마도 옛 사람들의 이른바 낭묘지구인데 상도에 억매여 이택의 미친 바가 주군에 그치고 말았으니, 오호라! 어찌 명운이 아니겠는가? 공은 비록 녹사중에서 부침하였으나 마음속엔 항상 소연한 진의의 지취를 간직했었음을 만절을 보면 가히 알 수가 있을 것이다.
풍류도 넉넉하였고 유소를 숭상하여 고가의 시례의 전통을 실추함이 없이 족히 후손들에게 무궁한 규범을 남긴 일등은 존경할 만한 일들이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사람의 경술을 봄에는, 덕이 가장 으뜸이로다. 몸은 비록 세속을 떠나진 못했으나, 중심만은 참으로 경개했도다. 너그럽고 굳세고 따습고 조리있음이, 바로 밖으로 품겼도다. 간직한 바 발휘하여 정사를 하니, 시망을 지고 있었도다. 저 산북에 묻혀지니, 현인들의 자차 할 계제가 되었도다. 세상 풍기는 쇠박해졌나니, 그 풍운 이을 수 없구려. 나는 그 행실 명함으로써, 어리고 어리석은 자들을 신칙코자 하노라.
비신(후)
(전략)
冣基屢陞爲判尹 贈公至吏曹判書兩淑人從 贈貞夫人一男幼者名彥錥有一女金漢奉有四男一女李春彬佐郎有三女洪在漢 都事有一男直基今牧使彥鏶男漢寬女適尹思東彥䥧叅奉有一女彥鋐夭彥鎬有一男李揆文有三男一女黃處浩文正郎有二男
崇禎紀元後三戊寅六月 日
集 谷雲金壽增 筆
(전략)
최기가 여러 차례 승진하여 판윤이 되니 공에게 이조판서를 증직하게 되었고, 양숙인도 따라서 정부인에 증질되었다. 1남은 어리다. 언육은 1녀를 두었다. 김한봉은 4남 1녀를 두었다. 이춘빈은 좌랑이 되고, 3녀를 두었다.
홍재섭은 도사가 되고, 1남을 두었다. 직기는 지금 목사로 있다. 언잡의 아들은 환관이요, 딸은 윤사동에게 시집갔다. 언선은 참봉인데, 1녀를 두었다. 언횡은 일찍 죽었다. 언호는 1남을 두었다. 이규문은 3남 1녀를 두었다. 황처호는 문과 정랑이 되고, 2남을 두었다.
숭정기원후 세 번째 무인년(영조 34, 1758년) 6월 일 곡운 김수증의 글씨를 집자한다.
우리 카페 이계재 님은 이러한 유형을 용뉴형개석(龍鈕形蓋石) 또는 투공형 비수(透孔形碑首)라고 하였습니다.
더불어 우리나라에 11기 정도가 확인 된다고 합니다.
https://cafe.daum.net/moonhawje/MebK/508
유명건 묘갈의 개석은 이른바 용뉴형개석중에서도 가장 사실적이고 아름다운 작품으로 전합니다.
유명건 묘
묘갈 뒤편에 있습니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양주 선산에 안장되었다가 1744년 이곳으로 이장하였다고 합니다.
나주 목사 유명건
배 숙부인 안동 김씨
배 숙부인 순흥 안씨
유명건 묘갈 중에 두 부인에 관한 내용입니다.
"임인년에 사화가 일어나니 공은 벼슬을 버리고 서울로 돌아가지 않은 채 남포의 남전촌에 우거하여 두문불출하고 서사에 낙을 붙였다. 갑진년 9월에 우연히 병에 걸려 이달 13일에 졸하니 나이 겨우 60세였다. 양주 구소곡 전배 김숙인의 묘 우측에 반장하였다가 뒤에 양지의 고동 삼은리 계좌원에 이장하였는데 두 숙인도 부장하였다.
김숙인은 참판 곡운 수증의 따님인데 1녀를 두어 참봉 이진성의 처가 되었다. 안숙인은 사인 후선의 따님인데, 2남을 두어 최기는 문과 대사간이요, 직기는 진사 현령이며, 측출에서 낳은 아들은 재기이다. 최기의 1남은 어리고 3녀의 사위는 김한봉, 이춘빈, 진사 홍재한이며, 직기의 4남은 언집, 언선, 언횡, 헌호이다."
상석
유명건(1664년∼1724년) 묘
1724년 사망하여 경기 양주 선산에 안장되었다가 두 부인과 함께 1744년 이곳으로 이장하였습니다.
이후 1758년 조카인 유척기가 영의정 역임 중에 묘갈을 세웠습니다.
국가문화유산청 자료에는 묘갈의 옥개과 비신이 맞지 않으며 옥개는 1720년 대에 유행했던 양식으로 추정합니다.
그렇다면 1758년에 옛 비신을 폐기하고 비문을 새롭게 새겼다는 의미인지.
2024.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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