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서울특별시

서울...국립고궁박물관 궁중 현판 전展(2)

임병기(선과) 2022. 7. 27. 06:02
728x90

(1) 편에 이어

 

궁중 현판 전

아래의 내용은 전시도록을 참조하였습니다

 

프롤로그

조선시대(1392~1910년) 궁중 현판은 궁궐을 세울 때, 화재나 전쟁 등으로 궁궐을 보수할 때, 다른 궁궐의 건물을 헐어 옮겨지을 때 제작·수리되어 궁궐 건축에 걸렸다. 제작 과정에서 당대의 상황을 반영하여 이름을 바꾸고 새로운 뜻과 소망을 담기도 했다. 그 예로, 고종高宗 (재위 1863~1907년)은 나라가 위태하던 1906년, 화재로 덕수궁을 수리하면서 본래 있던 대 안문 현판을 내리고 대한문으로 이름을 바꿔 달도록 했다. ‘큰 하늘’이라는 뜻의 ‘대한大漢’에 ‘한양이 창대해진다’는 대한제국의 소망을 담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1910~1945년) 때 조선 왕실의 권위를 상징했던 다섯 궁궐이 관광지, 오락시설, 박람회장으로 전락·훼손되면서 현판 대다수는 제자리를 잃고 떠돌아야 했다. 건물에서 내려온 현판은 원래의 기능을 잃고, 제실帝室박물관(이후 이왕가李王家박물관) 전시실로 사용됐던 창경궁昌慶宮의 명정전明政殿과 명정전 회랑, 경춘전景春殿, 환경전歡慶殿 등에 진열되었다. 해방 이후 1963년에는 624점의 현판이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 회랑에 전시되었다. 경복궁에 보관되던 700점이 넘는 현판은 1982년 창경궁에, 1986년 창덕궁昌德宮에 보관되다가 1992년 덕수궁德壽宮에 궁중유물전시관을 개관하면서 옮겨졌고, 이후 2005년 국립고궁박물관이 이전 개관하면서 다시 이동되었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궁중 현판 775점은 조선 왕실 문화를 담은 소중한 유물로서 의미를 되찾았다

 

형태와 장식

궁중 현판은 가로로 긴 네모난 형태가 일반적이나 세로로 긴 형태와 특수한 형태도 남아 있다. 현판의 종류는 현판을 걸 궁궐 건물의 등급에 따라 정해졌고, 건물은 역할과 성격에 따라 위계에 차등이 있었다. 왕과 왕비, 대비 등이 공식적으로 쓰는 건물처럼 가장 격식이 높은 건물은 전殿, 다음은 당堂, 그 아래로 합閤이나 각閣, 또는 헌軒, 루樓, 실室 등이 뒤따랐다. 현판은 건물 규모와의 조화를 고려해 그에 걸맞은 크기로 제작되었다.

현판의 위계는 사용되는 나무 종류, 테두리 유무, 장식 무늬, 바탕판 및 글씨 색상과 기법 등에 따라 달라졌다. 위계가 높은 건물의 현판은 17~18세기에는 피나무가, 19~20세기에는 잣나무가 주로 쓰였다. 바탕판의 네 가장자리에 테두리를 만들고 구름・용머리・봉황 머리 모양 등 봉 조각을 장식한 현판은 위계가 높으며, 테두리가 없는 널판형 현판은 위계가 낮다.

테두리에 는 길상吉祥 의미를 담은 칠보七寶 무늬, 연화蓮花[육화六花・肉花] 무늬가 많이 그려졌으며, 봉황, 박쥐, 물고기, 과실, 문자 등 다양한 무늬가 장식되었다.

바탕판은 옻을 여러 번 칠한 칠질漆質을 최고로 하고 먹을 입힌 묵질墨質, 정분丁粉 등을 사용해 흰색으로 칠한 분질粉質 순으로 등급이 낮아졌다. 글씨 색은 금박을 붙인 금색을 최고로 하고 안료를 칠한 황색, 흰색, 검은색 순으로 위계가 낮아졌으며, 청색과 녹색이 사용되기도 했다. 글씨를 새기는 방식은 여백을 모두 깎아내 글씨가 도드라지게 하는 양각, 글씨 주변 윤곽만 파내는 반양각, 글씨 부분만 안으로 파서 움푹 들어가게 하는 음각이 있다. 이 밖에 글씨에 금박, 금속, 나무 등 재료를 부착하거나 동으로 만든 글자를 도금해 고정하는 방식도 있다.

 

양덕당. 영조 또는 정조 어필로 추정. 18C

경희궁慶熙宮의 양덕당에 걸었던 현판이다. 양덕당은 ‘덕을 기르는 곳’이라는 뜻으로, 경희궁에서 왕세자가 공식 행사를 치르던 정궁正宮인 경현당景賢堂 북쪽에 위치했다. 성리학 기본 서인 『근사록近思錄』의 해석본 『근사록집해近思錄集解』 「존양存養」의 ‘예법에 맞는 몸가짐과 의를 행함이 덕을 기르는 것이다 [威儀行義 以養德也]’라는 구절에서 이름을 따왔다. 조선은 덕으로 하는 정치[德治]를 이상으로 여겨 왕은 자신의 덕을 수양해야 했다. 왕세자의 공간에 걸렸던 현판의 이름을 통해서 왕위 계승자인 세자는 성군의 덕목을 길러야 할 의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계인문. 19C

경복궁 정전인 근정전 동행각의 계인문에 걸었던 현판이다. 계인문은 ‘어짊을 여는 문’이라 는 뜻이다. 근정전은 경복궁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정치 공간으로 문의 이름에도 성군의 기본 도리인 ‘인仁’을 담았다. 경복궁의 주요 전각뿐 아니라 공간의 곳곳에 정치적 이상을 내재해 우러러보며 되새기도록 했다.

 

융무루. 신관호. 19C 후반

‘문文이 융성하다’는 의미의 현판과 ‘무武가 융성하다’는 의미의 현판이다. 각각 경복궁景福宮 정전正殿인 근정전勤政殿의 동행각과 서행각의 루樓에 걸었다. 융무루 현판은 고종 대 훈련대장인 신관호申觀浩(1810~1884년)가 썼다. 정치 공간의 중심인 정전의 양편에 걸어 문과 무가 균형을 이루어야 함을 보였다. 주요 건물 외의 부속 건물의 이름에도 중요한 의미를 담아 구역 전체에 정치적 이상을 구현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경연학사지서.19C

경연經筵에 참여하는 학사學士가 근무하는 관청에 걸었던 현판이다. 경연은 왕이 성인 군주가 되기 위해 신하 중 덕망이 높은 사람을 불러 유교 경전을 공부하는 제도이자 자리이다. 왕의 자문 역할을 했던 홍문관 관원이 대개 경연에 참여했다. 조선의 왕은 어진 마음과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성군이 되어야 했다. 이를 위해 스스로 수양하고 연마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틈틈이 경연을 열어 자신의 학습 상태를 확인했다. 경연 때는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중심으로 강론하는 한편 신하와 정책을 의논하고 토론하기도 하였다.

 

춘방.효명세자 예필

왕세자의 교육 기관인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에 걸었던 현판이다. 조선은 유교적 도리가 체화된 성군을 기르기 위해 세자를 어려서부터 교육했다. 세자시강원은 세자를 뜻하는 ‘춘春’ 자를 붙여 춘방春坊이라고도 불렸다. 현판에 는 ‘보도계옥輔導啓沃’이라는 문구도 새겨져 있는데 계옥啓沃은 중국 고대 정치 문서를 모은 유교 경전인 『서경書經』 「열명상說命上」에 ‘그대 마음을 열어서 내 마음을 넉넉하게 하라 [啓乃心沃朕心]’는 글에서 따온 것으로, 신하가 충성스러운 의견을 아뢰어 왕에게 도움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즉, 춘방 현판에 적힌 보도계 옥은 좋은 말로써 세자를 잘 보필해 성군이 되도록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예필(睿筆). 왕세자의 글씨

 

효명세자 예필. 1829년

 

예필 천지장남궁첩(睿筆天地長男宮帖)

순조의 왕세자인 효명세자孝明世子(1809~1830년)가 쓴 춘방 현판 글씨를 탁본한 서첩이다. 춘방 현판 내용 그대로 춘방春坊, 보도계옥輔導啓沃, 천지장남궁天地長男宮 등의 글씨가 첩에 실려 있다. 천지장남궁은 효명세자 처소인 연영합延英閤의 동쪽 방에 붙인 당호堂號로 창덕궁의 모습을 그린 《동궐도》에서 천지장남궁 현판을 확인할 수 있다. 효명세자는 4세의 어린 나이에 세자로 책봉되어 순조의 기대를 받으며 교육받았다. 유교 경전이나 역대 국왕의 모범적 사례를 담은 서적 등을 공부하며 성군으로서의 자질을 길렀다

 

서연회 강식(書筵會講式). 조선 후기

왕세자가 한 달에 두 번 배웠던 내용을 시험하는 회강會講 때의 규칙을 새긴 현판이다. 강론 講論을 담당한 문관인 강관講官과 세자가 번갈아 가면서 음을 읽고 해석하는 방식으로 회강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회강은 모든 시강원 관원이 참석한 가운데 세자의 학문을 시험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세자가 질문을 받고 대답할 만한 능력을 갖추었을 때 행할 수 있었다.

 

하춘방윤음(下春坊綸音). 영조 어제, 조명정 글씨. 1747년

영조가 세자 교육 기관인 세자시강원[춘방]에 내린 명을 새긴 현판이다. 영조는 세자를 철저히 교육할 것을 신하에게 당부하면서 세자가 강독할 때 지켜야 할 규칙을 만들어 춘방에 걸도록 하였다. 세자가 오전과 오후에 각각 공부할 내용과 횟수 등 세세한 규칙까지 지시하고 있다. 10일마다 돌아오는 휴일이나 경연 중지일과 같은 휴식 시간에도 복습하고 강론할 것 을 명하고 있어, 영조가 세자의 교육에 각별히 신경 썼음을 알 수 있다

 

유수원신치부로민인(諭水原新治父老民人). 정조 어제. 1790년

정조가 수원의 새 고을 백성을 배려한 내용을 담은 현판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을 참배하고 돌아오다 근처에 새로 생긴 고을로 이사 온 백성의 생활이 넉넉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리고 기존의 조세 면제가 살림이 미천한 백성에게까지 미치지 못하는 실정을 파악해, 10년 동안 조세가 면제되는 토지 500 결을 하사하고 부족한 곡식을 나 누어주도록 명하였다. 백성에게 식량이 하늘 같이 중요함을 인지하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고자 한 정조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서하 호조(書下戶曹). 영조 어필. 1734년

영조가 재정을 담당한 호조에 내린 현판이다. 절약하며 힘을 비축하고 공물과 조세를 고르게 하여 백성을 사랑하라는 내용으로 영조가 직접 글을 짓고 쓴 것이다. 국가가 백성에게 세금을 공평히 거두고 부담을 덜어주는 것은 백성의 삶에 중요한 부분이었다. 영조는 백성 이 조세에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다각도로 노력했다. 현재 국세청 앞에도 공물과 조세를 고르게 하여 백성을 사랑하라는 현판의 내용을 발췌해 만든 비석이 놓여 있다.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세금이 국민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친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념자보민. 철종 어필. 1860년

‘백성을 보호하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는 뜻을 새긴 철종哲宗(재위 1849~1863년)의 어필 현판이다. 조선이 정치 철학으로 삼았던 성리학에서는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고 백성이 안정되어야 나라가 평안하다고 보아 백성의 존재를 가장 중시했다. 따라서 영토나 재물을 위해 전쟁을 벌여 백성을 희생시키고 보호하지 못하는 것을 경계했다. 이 현판을 통해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것이 백성에 대한 사랑의 기본임을 강조한 왕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정본당(政本堂). 고종 어필. 1865년

조선의 최고 행정 기관인 의정부議政府의 삼정승三政丞이 근무한 정본당에 걸었던 현판이다. 의정부는 시대에 따라 역할이 확대 혹은 축소되기도 하였으나 조선 말기까지 조선의 최고 행정기관으로 존재했다. 삼정승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일컫는 말로 의정부의 우두머리, 곧 조선 백관의 우두머리다. 이들이 근무하는 건물의 이름에 ‘정치의 근본’이라는 의미를 담아 의정부 삼정승의 역할, 즉 조선 정치에서 신하의 역할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서의 정부직(敍議政府之職). 어필. 조선후기

의정부의 역할과 중요성을 새긴 현판이다. ‘백관을 통솔하고 정사를 바로잡고 음양을 다스리고 나라를 경영하니 국정과 관계됨이 가장 긴요하다’는 내용이다. 성종成宗(재위 1469~1494년) 대에 완성된 조선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 중 관리官吏 제도와 규범을 모은 「이전吏典」의 의정부 역할을 규정한 항목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 항목은 『송사宋史』 「직관지職官志」에서 재상의 역할에 대해 ‘재상의 직분은 천자를 보좌하고 백관을 총괄하며 서정庶政을 고르게 하여 정사가 통합되지 않음이 없게 한다 [宰相之職 佐天子 總百官 平庶政 事無不統]’에서 인용하였다.

 

옥당. 이정영. 1652년

왕에게 자문하는 역할을 했던 홍문관弘文館의 현판이다. 홍문관은 ‘옥과 같이 귀중한 집’이라는 뜻의 옥당玉堂이라고도 불렸다. 또한 왕의 각종 자문에 응하고 왕실의 서적을 관리하는 역할을 하였다. 홍문관에 소속된 관원은 왕과 학문을 논하는 한편 경연 준비를 겸하기도 하여 왕과 각별한 관계를 맺었다. 세로 모양 현판은 효종 대에 제작된 것으로 홍문관 관원이 었던 이정영李正英(1616~1686년)이 쓴 것이다. 전해지는 옥당 현판 중에서는 유일한 세로 형태이다. 가로 모양 현판은 숙종 대에 제작된 것으로 역시 홍문관 관원이었던 김진규金鎭圭 (1658~1716년)가 쓴 것이다.

 

1652년. 이정영

 

옥당. 김진규

왕에게 자문하는 역할을 했던 홍문관弘文館의 현판이다. 홍문관은 ‘옥과 같이 귀중한 집’이라는 뜻의 옥당玉堂이라고도 불렸다. 또한 왕의 각종 자문에 응하고 왕실의 서적을 관리하는 역할을 하였다. 홍문관에 소속된 관원은 왕과 학문을 논하는 한편 경연 준비를 겸하기도 하여 왕과 각별한 관계를 맺었다. 세로 모양 현판은 효종 대에 제작된 것으로 홍문관 관원이 었던 이정영李正英(1616~1686년)이 쓴 것이다. 전해지는 옥당 현판 중에서는 유일한 세로 형태이다. 가로 모양 현판은 숙종 대에 제작된 것으로 역시 홍문관 관원이었던 김진규金鎭圭 (1658~1716년)가 쓴 것이다.

 

김진규. 1699년

 

임옥서유감(臨玉署有感).영조 어제어필. 1760년

영조가 홍문관 관원에게 학문에 힘쓸 것을 당부한 글을 새긴 현판이다. 밤늦도록 글을 강론하는 것을 즐거워한 중국 한나라 광무제光武帝(재위 25~57년)의 일화와 당나라 태종太宗(재위 626~649년)이 문학을 존중하고 뛰어난 인재를 얻은 일화, 세종 때 세자가 홍문관에서 밤낮으로 학문을 연마했던 일화를 언급하여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영조는 직접 지은 글을 인쇄하여 첩으로 만들어 홍문관 관원에게 내려주면서 1건을 홍문관에 보관하게 하고 현판으로도 새기도록 하였다. 성리학을 정치 철학으로 삼았던 조선에서 신하도 지속적으로 학문을 연마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규장각학사지서(奎章閣學士之署).정조 어제. 김종수 글씨

규장각의 관원인 각신閣臣의 근무처에 걸었던 현판이다. 규장각은 처음에는 창덕궁 후원에 위치했으나 여러 차례 이동하여 궁궐 내 관청이 모여 있는 궐내각사 권역에 자리하게 되었다. 정조는 규장각 학사의 관청, ‘규장각학사지서’라는 이름을 짓고 현판을 만들 때 형태까지 상세히 지시하여 규장각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현재 바탕칠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나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1781년(정조 5) 내용을 통해, 흰색 바탕에 파란색 글씨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정조의 규장각에 대한 깊은 관심은 지위가 높은 관리라도 함부로 출입할 수 없도록 하고, 규장각 학사가 독자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하는 등의 지침을 마련해 현판으로 제작했던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규장각은 도서를 수집하고 보관하는 기본 기능 외에 백성의 어려움을 해결할 방안을 고심하고 정조와 경연을 통해 교류하는 등 왕의 보좌 기관 역할을 했다

 

봉수당(奉壽堂).조윤형 글씨. 1795년 추정

화성행궁의 정당인 봉수당에 걸었던 현판이 다. 1789년(정조 13) 처음에는 정조가 한양 남쪽에 위치한 수원을 장엄하게 하라는 의미로 장남헌張南軒이라는 이름을 짓고 글씨를 써서 현판으로 새겼다. 이후 1795년 윤 2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수원 장남헌에서 회갑연을 열었는데, 정조는 어머니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뜻을 담아 정당의 이름을 봉수당으로 고쳐 효심을 드러냈다.

 

추억임신개국(追億壬申開國).영조 어제. 어필. 1754년

영조가 조선을 개국한 태조의 능에서 개국한 해를 되돌아보며 지은 시를 새긴 현판이다. 영조는 1392년 건국한 조선이 지금까지 이어져 태조의 능에 있을 수 있음을 감사하며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조선의 왕들은 태조의 능을 찾아 조선의 역사에 대한 감회를 읊곤 했다. 조선의 시작이자 뿌리인 태조를 찾아 왕실의 정통성을 되새기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국기판(國忌板). 대한제국

조선 왕과 왕비의 제삿날, 능의 이름과 위치 등을 새긴 현판이다. 태조의 조상부터 시작해 왕은 철종까지, 왕비는 순종비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1872~ 1904년)까지 기록하였다. 종묘의 관리가 머무는 건물에 걸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왕과 왕비의 제삿날은 국가의 기일로 여겨 유흥이나 도살 등이 금지되었다. 조선 왕실은 종묘, 왕릉과 같이 왕과 왕비를 모신 곳을 비롯해 관청에도 국기판을 걸어 신하가 국가 제사를 기억하도록 하였다. 국기판이 걸린 곳에서는 언행과 행실을 바로 하여 현판 앞에서도 조상에 대한 예를 다하도록 하였다.

 

이런 현판이 있었다는 것을 알리고자 보이지도 않는 사진을 올립니다

 

등세심대상화점구(登洗心臺賞花口占).정조 어제, 이만수 글씨 추정. 1791년

정조가 3월에 세심대에 올라 풍경을 감상하고 지은 시를 새긴 현판이다. 정조는 왕실의 사당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세심대에 올라 신하와 쉬면서 술과 음식을 내렸다. 왕이 시를 지은 뒤 신하에게 답하는 시를 짓도록 했는데 차를 다 끓일 때까지 시를 완성해야 했다. 세심대 는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사당을 세울 때 처음 염두에 두었던 장소이다. 사도세자의 사 당인 경모궁景慕宮은 결국 다른 곳에 세워졌지만 정조는 신하와 세심대에 들러 아버지를 여읜 마음을 달랬다. 시에서 정조는 봄날 세심대에서 세속의 소란을 씻고 같이 오른 연로한 신하가 내년에도 함께 하기를 기원하고 있다. 아버지를 떠올리는 장소에서 신하와 꽃구경, 활쏘기 등 다양한 놀이를 즐기며 각별한 관계를 맺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친림경현당기로제신석향일작(親臨景賢堂耆老諸臣錫宴日作).숙종 어제, 신임 글·글씨. 1720년

숙종이 1719년(숙종 45) 59세의 나이로 기로소에 들어가 원로대신과 잔치를 즐기며 읊은 시를 새긴 현판이다. 또한 신임申銋(1639~1725년)이 숙종이 승하한 뒤 숙종의 글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 시를 발견한 감회도 새겨져 있다. 기로소에는 관원은 2품 이상, 70세 이상, 왕은 60세 이상이 되어야 들어갈 수 있었다. 숙종 역시 60세가 되는 이듬해에 들어갈 예정이었으나 준비 과정에서 59세가 되는 해에 들어가기로 변경했다. 기로소는 본래 신하만을 대상으로 하였으나 조선 후기에 는 왕이 몸을 낮추어 기로소에 들어가 신하에 대한 예우를 표했다. 숙종은 아픈 몸을 이끌고 잔치에 참여해 신하에게 특별히 사기로소賜耆老所가 새겨진 은잔에 술을 내렸다.

 

수진지만(守眞志滿). 영친왕 글씨. 1902년

영친왕英親王(1897~1970년)이 여섯 살 때 쓴 글씨를 새긴 현판이다. 영친왕이 공부하며 쓴  씨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참됨을 지키면 의지가 충만해진다. 

 

영왕 육 세

 

만수무강(萬壽無疆). 영친왕. 1904년

영친왕이 여덟 살 때 쓴 글씨를 새긴 현판이다. 영친왕이 공부하며 쓴 글씨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과남린화원(雍陶 過南隣花園詩). 선조 어필

중국 당나라 시인인 옹도雍陶(805~?)가 지은 ‘남린의 화원을 지나가며’라는 시를 새긴 선조의 어필 현판이다. 봄이 빠르게 지나감을 아쉬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주막에 자주 가는 것을 괴이하다 말라.                              莫恠頻過有酒家

정이 많아 오래도록 좋은 시절이 안타깝네.                      多情長是惜年華

봄바람이 불어 감상할 만하고 도리어 한스럽기도 한데, 春風堪賞還堪恨

겨우 꽃이 피는 것을 보았더니 또 꽃이 지는구나.             纔見花開又落花

 

임소당흠감시臨小溏興感詩).숙종 어제어필. 1694년

숙종肅宗(재위 1667~1674년)이 1694년(숙종 20)에 연못을 바라보며 느낀 감상을 읊은 시이다.

 

웃으며 단청 입힌 난간에 기대어 작은 연못에 임하니,    笑倚畫欄臨小溏

조용한 정원에서 일없이 맑은 햇살을 즐기네.                   閑庭無事玩澄光

옥빛 섬돌에는 한 쌍의 채색된 오리가 느릿느릿 거닐고, 玉砌緩行雙彩鴨

어린 물고기들은 절로 득의得意하여 양양하게 노니네.   魚兒自得意洋洋

 

대안문.민병석 글씨, 1899년

덕수궁 동쪽에 위치한 정문에 걸렸던 현판이다. ‘크게 편안한 문’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본래는 경운궁(1907년 덕수궁으로 개칭)을 건설했을 당시 남쪽에 있던 인화문仁化門이 정문이었다. 그러나 1902년(광무 6)에 인화문이 철거되면서 대안문이 정문 역할을 하였다. 1904년 경운 궁에 큰 화재가 난 후 고종의 명에 따라 1906년 4월 대안문을 수리했는데, 이 때 이름을 ‘큰 하늘’이라는 뜻의 대한문大漢門으로 바꾸고 현판 또한 새롭게 달았다. ‘큰 하늘’이라는 의미에는 ‘한양이 창대해진다’는 소망이 들어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현판 중 가장 크기가 큰 현판이다

 

에필로그

오늘날 전통 현판 제작의 명맥은 우리 문화유산의 전통기술을 계승하고 있는 장인을 통해 이어지고 있다. 현판이 만들어지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장인 간 협업이 중요하다. 하나의 현 판은 글씨를 쓰는 서예가書藝家, 현판 골격을 만들기 위해 나무 재료를 다듬고 조립하는 소목장小木匠, 나무판에 글씨를 새기는 각자장刻字匠, 현판에 문양을 그리고 채색하는 단청장丹 靑匠, 현판 설치에 필요한 철못, 걸쇠 등 철물을 제작하는 두석장豆錫匠 등 숙련된 장인의 손길이 모여야 완성될 수 있다. 소목장, 각자장, 단청장, 두석장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요즘에는 각자장이 현판 형태까지 만들기도 한다. 궁궐 등 전통 건축물에 걸린 현판은 이처럼 전통을 지켜온 장인의 손길에 의해 제작・보존・복원되며 유지되고 있다.

 

2022.06.13

 

주지하듯

저는 사진과 별로 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현판 글씨, 정확히는 내용과 글씨를 쓴 인물에 관심이 많은 탓에, 과문하지만 궁중현판전을 관람했습니다.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바라며, 읽은 분의 혜안으로 안광(眼光)이 사진(寫眞)을 철(徹)하기를 기대합니다

 

 

 

.

728x90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