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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국립고궁박물관. 궁중 현판 전展(1)

임병기(선과) 2022. 7. 26. 0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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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현판전

청와대 석불좌상 배관과 더불어 보고 싶었던 전시었습니다.

 

아래의 내용은 전시도록을 참조하였습니다

 

프롤로그

조선시대(1392~1910년) 궁중 현판은 궁궐을 세울 때, 화재나 전쟁 등으로 궁궐을 보수할 때, 다른 궁궐의 건물을 헐어 옮겨지을 때 제작·수리되어 궁궐 건축에 걸렸다. 제작 과정에서 당대의 상황을 반영하여 이름을 바꾸고 새로운 뜻과 소망을 담기도 했다. 그 예로, 고종高宗 (재위 1863~1907년)은 나라가 위태하던 1906년, 화재로 덕수궁을 수리하면서 본래 있던 대 안문 현판을 내리고 대한문으로 이름을 바꿔 달도록 했다. ‘큰 하늘’이라는 뜻의 ‘대한大漢’에 ‘한양이 창대해진다’는 대한제국의 소망을 담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1910~1945년) 때 조선 왕실의 권위를 상징했던 다섯 궁궐이 관광지, 오 락시설, 박람회장으로 전락·훼손되면서 현판 대다수는 제자리를 잃고 떠돌아야 했다. 건물에서 내려온 현판은 원래의 기능을 잃고, 제실帝室박물관(이후 이왕가李王家박물관) 전시실로 사용됐던 창경궁昌慶宮의 명정전明政殿과 명정전 회랑, 경춘전景春殿, 환경전歡慶殿 등에 진열되었다. 해방 이후 1963년에는 624점의 현판이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 회랑에 전시되었다. 경복궁에 보관되던 700점이 넘는 현판은 1982년 창경궁에, 1986년 창덕궁昌德宮에 보관되다가 1992년 덕수궁德壽宮에 궁중유물전시관을 개관하면서 옮겨졌고, 이후 2005년 국립고궁박물관이 이전 개관하면서 다시 이동되었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궁중 현판 775점은 조선 왕실 문화를 담은 소중한 유물로서 의미를 되찾았다

 

형태와 장식

궁중 현판은 가로로 긴 네모난 형태가 일반적이나 세로로 긴 형태와 특수한 형태도 남아 있다. 현판의 종류는 현판을 걸 궁궐 건물의 등급에 따라 정해졌고, 건물은 역할과 성격에 따라 위계에 차등이 있었다. 왕과 왕비, 대비 등이 공식적으로 쓰는 건물처럼 가장 격식이 높은 건물은 전殿, 다음은 당堂, 그 아래로 합閤이나 각閣, 또는 헌軒, 루樓, 실室 등이 뒤따랐다. 현판은 건물 규모와의 조화를 고려해 그에 걸맞은 크기로 제작되었다.

현판의 위계는 사용되는 나무 종류, 테두리 유무, 장식 무늬, 바탕판 및 글씨 색상과 기법 등에 따라 달라졌다. 위계가 높은 건물의 현판은 17~18세기에는 피나무가, 19~20세기에는 잣나 무가 주로 쓰였다. 바탕판의 네 가장자리에 테두리를 만들고 구름・용머리・봉황 머리 모양 등 봉 조각을 장식한 현판은 위계가 높으며, 테두리가 없는 널판형 현판은 위계가 낮다.

테두리에 는 길상吉祥 의미를 담은 칠보七寶 무늬, 연화蓮花[육화六花・肉花] 무늬가 많이 그려졌으며, 봉황, 박쥐, 물고기, 과실, 문자 등 다양한 무늬가 장식되었다.

바탕판은 옻을 여러 번 칠한 칠질漆質을 최고로 하고 먹을 입힌 묵질墨質, 정분丁粉 등을 사용해 흰색으로 칠한 분질粉質 순으로 등급이 낮아졌다. 글씨 색은 금박을 붙인 금색을 최고로 하고 안료를 칠한 황색, 흰색, 검은색 순으로 위계가 낮아졌으며, 청색과 녹색이 사용되기도 했다. 글씨를 새기는 방식은 여백을 모두 깎아내 글씨가 도드라지게 하는 양각, 글씨 주변 윤곽만 파 내는 반양각, 글씨 부분만 안으로 파서 움푹 들어가게 하는 음각이 있다. 이 밖에 글씨에 금박, 금속, 나무 등 재료를 부착하거나 동으로 만든 글자를 도금해 고정하는 방식도 있다.

 

곤영합(坤寧閤)고종 어필

경복궁 건청궁 안 곤녕합에 걸었던 고종의 어필 현판이다. 곤녕합은 ‘왕비가 편안한 곳’이라는 뜻으로 명성황후明成皇后(1851~1895년)의 처소로 사용된 곳이다. 현판의 네 모서리는 활[弓] 모양이며, 테두리에 연화당초蓮花唐草 무늬를 그려 장식했다. 검은색 바탕에 금색 글씨로, 고 종이 쓴 현판 글씨를 모은 『어필현판첩』(1885년)에 이 현판의 글씨가 실려 있다

 

영훈당. 19C 후반

경복궁 흥복전興福殿 북쪽에 위치한 영훈당永薫堂에 걸었던 현판이다. 영훈당은 ‘향기가 영원히 이어지는 집’이라는 뜻이다. 왕실과 관청에 그릇을 납품하던 지규식池圭植(1851~1911년 이후)이 쓴 『하재일기荷齋日記』에 영훈당이 ‘대전 곳간’이라고 되어 있어, 왕을 위한 곳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테두리가 없는 널판 형태로 흰색 바탕에 글씨를 반양각한 뒤 파란색으로 칠했다. 영훈당은 1917년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의 내전을 복구한다는 명목으로 경복궁의 주요 전각이 철거될 때 함께 없어져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필수문. 19C 후반

경복궁 사정전의 동행각과 자선당의 서행각 사이에 있는 담장문인 필수문에 걸었던 현판이다. 필수문은 ‘반드시 필요한 문’이라는 뜻이다. 네 모서리는 활[弓] 모양 형태로 깎았고, 흰색 바탕에 글씨를 양각한 뒤 검은색으로 칠했다. 테두리가 없는 단순한 형태, 바탕판과 글자색으로 보아 위계가 낮은 건물에 걸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가애죽림(可愛竹林). 숙종 어필

창덕궁 후원 영화당에 걸었던 숙종肅宗(재위 1674~1720년)의 어필 현판이다. 가애죽림은 ‘사랑할 만한 대나무 숲’이란 뜻으로, 1692년(숙종 18)에 영화당을 중수한 후 제작되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빗각으로 넓은 테두리를 달았고 봉황과 구름 등 무늬를 단청으로 장식하였다. 검은색 바탕에 글씨를 양각한 후 금박金箔을 붙였는데, 금색 글씨를 사용하는 경우 바탕판은 대부분 옻칠을 칠해 마감했다. 현판 뒷면 모서리에는 어필 현판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었던 여닫이문의 흔적인 경첩 일부가 남아 있다.

 

경운궁. 고종 어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하였을 때 사용한 임시 정전인 즉조당卽阼堂에 걸었던 현판이다. 경운궁은 ‘경사스러운 운수가 가득한 궁’이라는 뜻이다. 위계가 높은 건물에 달았던 현판으로, 구름 모양 봉을 달았고 테두리에 길상吉祥 의미를 담은 칠보七寶 무늬를 장식했다. 『경운궁중건도감의궤』(1905년)에 현판을 만드는 데 사용된 재료가 나와 있어, 바 탕판의 검은 칠에 각각 진칠眞漆 1승 4홉과 매칠毎漆 3홉, 금색 글자에는 금박金箔 3속씩 사 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건물의 위계에 따라 사용하는 금박의 양에도 차이를 두었다. 현판 테두리를 따라 얇은 띠 모양 철물이 남아 있는데 어필 현판을 보호하기 위해 씌웠던 비단인 사롱紗籠을 고정했던 흔적으로 보인다.

 

均貢愛民 節用蓄力(균공애민 절용축력)

영조가 호조에 내린 어필. 1744

육조 중 하나로 국가 재정을 관리한 관청인 호조에 걸었던 영조의 어제어필 현판이다. ‘조세를 고르게 하여 백성을 사랑하고, 씀씀이를 절약하여 힘을 축적하라[均貢愛民 節用蓄力]’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갑자년(1744년) 11월[甲子十一月日]’이라는 묵서가 있어 제작 시기를 알 수 있다. 현판의 네 모서리에 용머리와 봉황 머리 모양 조각을 달았고, 테두리에는 꽃무늬 단청으로 장식했다. 검은색 바탕에 금박을 붙인 금색 글자로 만들었다

수라간. 19C 후반

왕실 가족 음식을 준비하던 공간인 수라간의 현판으로, 경복궁 안에 있던 여러 수라 간 중 한 곳에 걸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가로로 네모난 형태가 일반적이나 이 현판과 같이 세로로 긴 형태도 드물게 남아 있다. 테두리 없는 형태와 흰색 바탕에 검은색 글씨로 보아, 수라간이 낮은 위계의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춘장대 어사(春塘臺御射)

정조正祖(재위 1776~1800년)가 임자년(1792년) 6월 30일에 창덕궁 후원의 춘당대에서 화살 [유엽전柳葉箭]을 쏘았던 일과 그것을 칭송한 내용을 새긴 현판이다. 춘당대는 영화당 앞 넓은 빈 터로 왕과 신하가 함께 잔치를 열거나 문·무과 시험을 개최하던 곳이다. 가로 형태 두루 마리를 펼친 모양으로 독특한 모습이다. 칠이 많이 벗겨져 본래 바탕색은 확인하기 어렵다. 음각으로 파낸 글씨 부분에 파란색 안료가 남아 있다.

 

현판 뒷면

 

현판 뒷면

 

주자감동제신제명록(鑄字監董諸臣題名錄). 최응하

태종太宗(재위 1400~1418년) 대부터 철종哲宗(재위 1849~1863년) 대까지 활자 주조를 감독한 신하의 이름, 생년, 본관을 음각한 현판이다. 1857년(철종 8) 화재로 소실된 주자소를 다시 세울 때 제작되었다. 현판의 뒷면에는 여러 장의 나무판으로 구성한 것을 보강하기 위해 별도로 띠장을 대기도 하였다. 뒷면에 사자관 최응하 필[寫字官崔應夏筆], 소목장 송흥룡, 각수 이 동욱, 고윤진[小木匠宋興龍 刻手李東郁高崙鎭]이라는 묵서가 있어, 현판의 글씨를 쓴 사람과 제작에 참여한 장인의 이름을 밝혔다

 

일심재. 순조 어필. 

수빈 박씨의 사당인 경우궁景祐宮의 일심재에 걸었던 순조의 어필 현판이다. 원래의 사당은 창경궁 안 도총부에 있던 현사궁이었으나, 사친私親의 혼궁魂宮이라는 이유로 1824년(순조 4) 궁궐 밖 한성 북부로 옮겨져 경우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경우궁은 ‘큰 복을 받는 궁’이라는 뜻이며 일심재는 ‘한결같은 마음의 집’이라는 의미이다. 현판에 빗각으로 넓은 테두리를 달았으며 칠보 무늬를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현재 글씨의 색은 거의 다 날아갔으나, 『현목수빈입묘도감의궤』를 통해 옻칠 바탕에 글씨는 금박을 붙였고 바탕판은 잣나무가, 테두리판은 피나무가 사용되었음이 확인된다. 현판 테두리 뒷면에는 어 필 현판을 보호하기 위해 씌웠던 사롱의 홍색 직물 조각이 남아 있는데, 이는 의궤에 수록된 홍운문사紅雲紋紗, 즉 구름 무늬가 있는 홍색 비단 직물임을 알 수 있다. 일심재와 낙유당 현판은 을유년인 1825년 정월 24일에 걸었다

 

현사궁(顯思宮).순조 어필.1823

창경궁 현사궁에 걸었던 순조의 어필 현판이 다. 현사궁은 ‘생각을 떠올리면 환하게 나타나는 궁’이라는 뜻이며, 1824년(순조 24)까지 순 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신주를 모신 사당으로 이용되었다. 현판 테두리에는 구름 모양 봉을 달았고 칠보 무늬를 세밀하게 묘사했다. 무늬의 윤곽선에 니금泥金을 사용한 가는 금선을 둘러, 위계가 높은 현판으로서 상당한 공을 들여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검은색 바탕에 글씨를 양각한 후 금박을 붙였다.

 

규정각. 영종 어필 추정

경희궁 규정각에 걸었던 현판이다. 규정각은 경희궁의 편전 역할을 하던 흥정당興政堂 권역에 위치했고, 천문을 관측하는 기구인 선기옥형璿璣玉衡[혼천의]을 보관하던 곳이다. 규정揆政 은 중국 송나라 학자 진덕수眞德秀가 말한 ‘칠정七政을 헤아린다[以揆七政]’에서 따온 이름이며 칠정은 해와 달을 비롯한 일곱 개 행성을 말한다. 조선 왕조는 별의 운행이 왕이 행해야 하는 정치 원리를 담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천문기구를 두어 하늘의 뜻을 살펴 정사를 보았다. 규정각 현판의 글씨는 영조의 어필로 추정되며 중 국 고대 서체인 전서篆書를 사용하였다. 전서는 석각石刻이나 전각篆刻에 주로 쓰였는데 글 자 획의 두께가 균일하고 형태가 정사각형에 가까우며 곧은 느낌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선원록 아문. 조선 후기

왕족의 예우를 담당한 종친부宗親府의 내삼문內三門에 걸었던 현판이다. 1864년(고종 1) 종 부시宗簿寺가 종친부에 통합되면서 종부시에서 편찬한 왕실 족보인 『선원록璿源錄』의 관리를 종친부가 맡게 되었다. 이에 『선원록』을 관리하는 관청이라는 뜻의 선원록아문 현판이 종친부 안에 걸리게 되었다. 현판은 전서에서 발전한 서체인 예서隸書로 쓰였는데 전서체보다 획이 유려하고 단순한 특징을 보인다. 글자의 형태는 정사각형에 가까운 모양이다

 

면복각.조선 후기

국왕의 면복을 보관하던 건물인 면복각에 걸었던 현판이다. 면복은 면류관과 구장복을 통칭하는 것으로 왕이 즉위식이나 가례, 제사와 같은 중요한 의례 때 입었던 최고 예복이다. 따라 서 왕실의 복식을 담당하던 상의원에 부속 전각을 두고 소중하게 보관・관리하게 하였다. 현 판은 경복궁 면복각에 걸렸던 것으로 추정되며 글씨는 해서楷書로 쓰였다. 해서는 궁궐 현판에 가장 많이 사용된 글씨로 글자의 획이 반듯하고 깔끔하며 알아보기 쉬운 것이 특징이다.

 

복수당. 영조 어필 추정

경희궁 복수당에 걸었던 현판이다. 복수당은 ‘복을 받아 편안한 곳’이라는 뜻이다. 전각이 있었던 정확한 위치와 성격은 알 수 없으나, 현판 뒷면에 묵서가 남아 있어 1741년(신유년辛酉 年) 4월 23일에 만들었음[辛酉四月二十三日造作]을 확인할 수 있다. 글씨는 영조의 어필로 추 정되며 행서行書로 쓰였다. 행서는 반듯함이 특징인 해서보다 획을 흘려 쓴 느낌이 강하고 해서의 보완적 서체로, 궁궐 현판 글씨 중 해서와 더불어 많이 쓰인 서체이다

 

윤집권중(允執厥中).어필

창덕궁 취운정翠雲亭에 걸었던 현판으로, ‘진실로 중도를 지키라’는 뜻의 어필이 새겨져 있다. 중국의 고대 성군인 순舜 임금이 우禹 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도에 어긋날 수 있는 약한 마음을 경계하라는 뜻으로 내린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성군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조선의 역대 왕도 이 구절을 자주 신하와 논하며 중요하게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어필로 제작한 현판이지만 어떤 왕의 글씨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글씨의 획을 생략적이고 자유롭게 표현한 초서草書로 기록되었다.

 

독포도덕(獨抱道德). 선조 어필

창덕궁의 후원 안에 있는 존덕정에 걸었던 현판으로 ‘홀로 도와 덕을 안고 있다’는 뜻이 새겨져 있다. 오른쪽 상단에 ‘선묘어필宣廟御筆’이라고 새겨져 있어 선조宣祖(재위 1567~1608년)의 어필임을 알 수 있다. 선조는 서예에 뛰어나 당대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해서, 행서, 초 서에 두루 능했다. 독포도덕 네 글자는 해서로 단정하게 쓰였다. 왼쪽 하단에는 ‘을유년 9월 만들고[乙酉九月 日] 숙종 계유년(1693년) 여름에 보수하였으며[肅廟癸酉夏重補], 당저 병오년 겨울 수리하였다[當宁丙午冬重修]’는 내용이 있어, 어필 현판에 문제가 생기면 고치면서 소중히 보관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관문각(觀文閣).고종 어필

경복궁 북쪽에 위치한 관문각에 걸었던 고종의 어필 현판이다. 관문각은 수정전에서 옮겨온 어진, 교명, 어필 등을 보관한 곳이다. 현판에는 관문각이 반듯한 해서로 쓰였고, 고종의 인장인 ‘일천성두환문장弌天星斗煥文章[온 하늘의 별들이 문장으로 빛나다]’, ‘주연지보珠淵之寶’, ‘만기 지가萬幾之暇[온갖 나랏일을 살피는 틈]’를 함께 새겼다. 관문각 글씨는 현판 글씨를 탁본하여 모은 첩인 『어필현판첩』(1885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어전친막(御前親幕). 정조 어필

국왕의 친위조직인 별군직別軍職 청사에 걸었던 정조의 어필 현판이다. 어전친막은 ‘임금 가까이에 있는 군막’이라는 뜻으로, 당당한 느낌의 행서로 쓰였다. 별군직은 병자호란 때 봉림대 군(효종)을 호위하여 심양에 다녀온 여덟 명의 군관[팔장사八壯士]을 대우하기 위해 설치한 친 위조직으로 왕의 신변 보호를 담당하였고 정조 대에는 장용영壯勇營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정조는 글씨에 조예가 깊었는데, 글씨를 한 사람의 성품을 나타내는 척도로 여겨 기교적이거나 미적인 글씨보다는 기풍氣風을 드러낼 수 있는 글씨를 추구하였다. 정조는 전서, 초서, 행 서, 해서에 두루 능했으며 특히 행서에 뛰어났다.

 

양화당. 순조 어필

창경궁 양화당에 걸었던 순조의 어필 현판이다. 양화당은 ‘화기和氣를 기르는 곳’이라는 뜻으 로, 왕이 신하를 접견하는 편전, 또는 비빈妃嬪의 거처로 이용되었다. 테두리에 구름 모양 봉을 달았으며 칠보 무늬를 단청으로 장식했다. 글씨 부분에는 작고 네모난 금박(약 6.0×6.0cm) 을 이어 붙여 만든 자국이 반복적으로 보인다. 『창덕궁영건도감의궤』를 통해 옻칠로 바탕을 검게 칠하고 글씨에는 금박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어, 현재 전하는 현판과 함께 살펴볼 수 있다. 현판에는 사롱 흔적과 사롱을 고정했던 띠 모양 철물 일부가 남아 있다.

 

영추문. 허계. 1865년

경복궁의 서문西門인 영추문에 걸었던 현판이다. 영추迎秋는 ‘가을을 맞이하여 하늘에 제사를 준비한다’는 의미이다. 경복궁은 임진왜란(1592~1598년) 때 모두 소실되어 고종 대에 다 시 세워졌다. 현판도 이때 다시 제작되었는데 영추문 글씨는 무신인 허계許棨(1798~1866년) 가 썼다. 궁궐 현판의 글씨를 쓴 신하는 대부분 문신으로 무신은 드문데, 경복궁의 4개 대문인 광화문光化門, 건춘문建春門, 영추문, 신무문神武門 현판은 모두 무신이 글씨를 썼다. 궁궐을 감싸고 있는 바깥 궁장의 문에 무신의 글씨로 만든 현판을 달도록 하여, 궁궐과 왕실을 안전하게 지킨다는 상징적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계유와(皆有窩).홍국영

규장각의 부속 전각인 중국 도서를 보관하던 개유와의 현판이다. 개유와는 ‘모든 것이 있는 집’이라는 뜻으로 호방한 느낌의 행서로 쓰였다. 『규장각지奎章閣志』의 기록을 통해 정조 대 문신인 홍국영洪國榮(1748~1781년)이 글씨를 썼음을 알 수 있다. 홍국영은 정조의 조력자 역할을 하며 신임을 얻었으나, 정조가 왕위에 오른 뒤 권력에 심취하여 왕위 계승까지 관여하려 하는 등 부패한 모습을 보였다. 이후 홍국영은 정계에서 실각하고 젊은 나이에 쓸쓸한 죽 음을 맞이하였다. 그는 자유분방한 성격의 야심가였던 것으로 보이며 개유와 글씨에서도 자신감 있는 풍모가 느껴진다

 

건구고궁(乾九古宮). 영조 어필. 1730년

영조는 왕이 된 자신을 날아오르는 용이라 보았다. 1730년(영조 6) 힘찬 필체로 써나간 ‘건구고궁乾九古宮’ 네 글자는 잠저 시절과 왕이 된 자신을, 각각 잠룡潛龍과 비룡飛龍으로 비유했다. 이 글귀에서는 막 왕이 된 자신의 포부와 미래에 대한 야심을 보여준다

 

억석회만(憶昔懷萬). 영조 어필.1774

1774년(영조 50) 여든한 살이 된 영조는 풀어진 필체로 ‘억석회만憶昔懷萬’ 네 글자를 남기고 있다. 말년의 영조는 ‘옛일을 추억하니 만 가지가 그립기’만 했다. 영조는 즉위부터 재위 기간 동안 많은 일을 겪었다. 오십여 년이나 왕위에 있었던 영조가 품은 말년의 심정은 그리움으로 남아 있었다. 영조가 노년에 남긴 어필 중에는 옛일을 추억한다는 ‘억석憶昔’이라는 문구가 빈번히 보인다

 

81세

영조 임금 81세 글씨

사직단 재전에서 지은 시를 새긴 현판. 영조 어필.1775년

1702년(숙종 28) 2월 ‘초2일’에 숙종이 봉행한 춘향春享과 영조가 1775년(영조 51) 8월 ‘초 2일’에 봉행한 추향秋享의 날짜가 같은 것에 의미를 부여하여 지은 시를 새긴 현판이다

 

계석행(繼昔幸).영조 어필. 1750년

‘옛날의 행차를 계승한다’는 뜻을 새긴 현판이다[도 3]. 이는 1750년(영조 26) 영조가 온양온천 행차를 위해 수원부에 머물렀을 때 어목헌禦牧軒을 침실로 삼았는데, 숙종의 온천 행차 시 어목헌을 침실로 삼았던 선례를 계승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드러낸 것이다

 

인화문.조선 후기

경운궁慶運宮(현 덕수궁德壽宮)의 남쪽에 있던 정문인 인화문에 걸었던 현판이다. 인화문은 ‘어진 마음[인仁]으로 백성을 교화한다’는 뜻이다. 궁궐의 정문에 조선에서 중시했던 도덕적 가 치인 ‘인’을 담아 그 뜻을 되새기고자 했다. 궁궐의 바깥 정문 이름에는 광화문光化門, 돈화문 敦化門, 홍화문弘化門, 흥화문興化門과 같이 ‘될 화化’라는 글자를 사용하였다. 이는 각각 빛이 나라를 덮듯이 교화가 사방에 미치기를, 교화를 돈독히 하기를, 널리 교화하기를, 교화를 북돋기를 바라는 내용을 문에 담아 백성을 유교적 가치로 교화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인 화문은 1902년(광무 6) 정전正殿인 중화전中和殿과 중화문中和門을 건립하기 위해 궁의 영역을 확장하면서 철거되었다.

 

융문루. 김병학. 19C 후반

‘문文이 융성하다’는 의미의 현판과 ‘무武가 융성하다’는 의미의 현판이다. 각각 경복궁景福宮 정전正殿인 근정전勤政殿의 동행각과 서행각의 루樓에 걸었다. 융 문루 현판은 고종 대 영의정인 김병학金炳學(1821~1879년)이, 융무루 현판은 고 종 대 훈련대장인 신관호申觀浩(1810~1884년)가 썼다. 정치 공간의 중심인 정전의 양편에 걸어 문과 무가 균형을 이루어야 함을 보였다. 주요 건물 외의 부속 건 물의 이름에도 중요한 의미를 담아 구역 전체에 정치적 이상을 구현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022.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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