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박물관. 특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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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랑대사상
해인사 성보박물관, 국립 중앙박물관 대고려 전에 이어 다시 뵈었습니다.
희랑대사(1988년 4월. 월간 해인)
신라 말과 고려초 두 개의 왕조에 걸쳐서 생존했던 희랑대사의 정확한 생존 기록은 아무 곳에서도 그 자료를 찾을 수가 없다. 다만 희랑대사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나타나 있는 고려 화엄불교의 대가 균여(均如 ; 917-973) 대사의 기록에서 희랑대사의 사상적 시대적 편린을 구할 수 있다.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희랑대사의 생존 연대가 한 왕조가 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일어나던 시대인 것으로 미루어보아 극도로 혼란했을 것임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희랑대사의 개인사적 문제는 사상사적 또는 시대사적인 문제에 비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관점에 도달할 수 있거니와 더욱이 기록다운 기록이 없는 절집안의 기록으로는 그 개인사적인 소상한 내력을 알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자연 희랑대사에 대한 이 글은 희랑스님의 개인적인 일화를 중심으로 하는 글이 아니라 신라 말기부터 치열하게 대두되었던 화엄철학의 이론적 대립과 화엄철학의 영향으로 일어난 선종의 흥기, 양 왕조의 흥망에 따르는 정치와 사상의 밀착과 갈등, 그 커다란 역사적 질곡 속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었던 희랑대사의 역사적 고뇌와 진실을 이야기해 가겠다.
대체로 신라시대의 불교는 중국불교가 이룩해 놓은 다양하고도 찬란했던 종파 불교의 유입과 수용의 시기였지만 통일신라 이후 교종 중심의 이론 불교로 성숙되면서 화엄사상이 그 주류를 이루게 되었음을 전호에서 살펴보았다.
희랑대사가 살았던 신라 하대에는 중앙 집권층의 문란과 정치적인 무능력으로 말미암아 지방 호족들의 세력이 대두되면서 왕실 내지 귀족 중심의 교종 대신에 선종이 크게 유행하였다. 그러나 선승(禪僧)이라 할지라도 그 교학적 지반이 화엄사상에 있었으며 그 이후 조계종의 성립에 이통현(李通玄)의 화엄사상이 그 이론적 바탕이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대체로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화엄 철학의 사상가로는 의상대사말고도 원효대사와 자장율사 둥이 있으나 여기에서는 그들의 이론이나 사상적인 차이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하는 것을 생략하기로 한다.
실질적으로 신라 하대에서 가장 대립이 극심하여 고려의 국가 성립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화엄철학의 두 분파(分派)로서 희랑스님을 중심으로 하는 북악파(北岳派)와 관혜(觀惠)스님을 중심으로 하는 남악파(南岳派)가 해인사에 있는데, 북악파의 희랑스님은 고려 태조 왕건의 복전(福田)이었으며 남악파의 관혜스님은 후백제 견훤의 복전이었다. 그리고 1977년 신라 화엄경사경(華嚴經寫經)인 두루마리가 학계에 알려졌는데 여기에서 지금까지 전설적인 인물로 알려졌던 화엄사의 창건주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실제의 인물로 밝혀졌다. 이로 말미암아 최근 의상대사의 화엄사상과 연기조사와의 관계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신라 화엄학의 주류가 의상스님이 있다면 연기조사를 비주류로 생각하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화엄종 내의 남악파와 북악파의 대립으로 연결시켜서 북악파는 태백산의 부석사를 중심으로 했던 의상대사의 화엄종으로, 남악파는 지리산의 화엄사를 근거로 했던 연기조사의 화엄종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을 더 잘 파악하기 위해서는 자료상으로 연기조사의 화엄종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남악파의 관혜스님과 관계하고 있는 문제에 대한 확실한 맥락을 찾을 수 없으므로 앞으로 깊이 연구해 볼 대상이라고 하겠다.
그러면 북악파의 화엄종파 남악파의 화엄종이 대립한 이론적 근거는 무엇일까?
현재 이 시점에서 남악파와 북악파의 화엄사상이 어떻게 달랐는지는 정확하게 알기 어려우며 다만 고려시대의 화엄교학의 저술인 법계도기총수록(法界圖記叢髓錄)에 남악파의 관혜스님의 수전법사상(數錢法思想)이 인용되어 있으며, 균여전(均如傳)에는 선공초삼십여의기(先公鈔三十餘義記)에 희랑대사의 화엄사상이 간단히 소개되어 있다.
이를 교학적 입장에서 설명해 보면 남악파의 수전법사상이란 중국 화엄철학의 거봉(巨峰) 법장현수(法藏玄首)대사의 저서(著書) 오교장(五敎章)에서 십현연기(十玄緣起)를 설명하기 위해 1에서 10까지의 십수를 끄집어내어 십전(十錢)을 비유로 삼아 상즉상입(相卽相入)을 해명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며, 이 사상은 역시 법장대사의 설(說)인 3성(三性) 즉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의타기성(依他起性) 원성실성(圓成實性) 등의 이론적 근거인 연기론적(緣起論的) 입장을 중시(重視)하는 데 비해 북악파는 연기론적 입장보다는 성기론적(性起論的) 입장을 강조한다. 연기론적 이론이 시간적인 입장을 강조한다면 성기론적 이론은 공간적인 입장을 강조하는데 이러한 이론들은 모두 화엄교학의 가장 근원적인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십현연기(十玄緣起)와 육상원융(六相圓融)에 대한 사장적 대립이었다.
이러한 사상적인 대립이 순수한 학문적 대립으로 남았다면 그 뒤에 나타난 고려조의 탁월한 화엄철학의 대가 균여대사 대에 와서는 새로운 이론적인 통합을 거쳐서 양파의 화엄사상을 더욱 완벽하고 원융한 사상으로 발전되어 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이러한 이념적이고 학문적인 대립이 정치권력과 함께 결탁되어 있었다면 결국 훨씬 더 야비하고 속된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정치권력의 의지는 언제나 그냥 학문적 귀결처럼 원융하게 해결되지는 않는다. 피 비린내 나는 칼부림과 이것이냐 아니면 저것이냐를 강요하는 선택적 자유로서 역사의 시간 위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후삼국시대 정치적 권력에서 패한 후백제의 우두머리 견훤의 복전이었던 남악파의 이론은 학문적 입장을 지키지 못하고 정치적 권력에서 승리한 왕건에 의해서 권력적 혐의 논리와 이데올로기로 퇴락하여 결국 도태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희랑대사가 주도했던 북악파의 사상은 그 뒤 균여대사에게서 더욱 계승 발전되어 법상종(法相宗)의 이론과 융합하여 성상융합(性相融合)의 새로운 사상적 지반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살피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그 당시 해인사의 지리적 환경적 요인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대체로 후삼국시대의 해인사의 위치가 신라와 후백제의 중간에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자연히 해인사는 전략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해인사의 전략적인 중요성 때문에 왕건과 견훤은 그 당시 화염 이론의 두 대가였던 북악파의 희랑스님과 남악파의 관혜스님의 이론적 대립을 정치적 세력 속으로 끌어들여 극대화시켰으며 결국 고도한 불교사상인 화엄철학은 정치척 이데올로기화 되지 않을 수 없는 역사적 운명이었다. 더구나 신라 말기에서 가장 탁월한 지식인이며 당나라에서 오래 유학했던 석학 최치원이 가야산에 은둔하고 있었으므로 그를 포섭하여 당시의 사상계에서나 국제 외교상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도 왕건과 견훤은 해인사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최치원과 교분이 깊던 희랑스님을 복전으로 삼았던 왕건의 승리는 미리 예고된 것이었다.
희랑스님의 인간됨이 어떤 유형이었느냐 하는 것을 짐작해 보건대 상당히 용의주도하며 권력지향적인 인물이고 따라서 순수하게 학문 연구에만 일생을 바친 학승이라기보다는 이판(理判l)과 사판(事判)을 겸한 권승(權僧)이었을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짐작된다. 그가 당시 얼마나 영향력이 있었던 스님이었나 하는 것은 희랑스님의 수행처였던 희랑대(希郞臺)라고 하는 암자가 지금도 해인사에 남아 있으며 승려의 사적인 이름 즉 사명대사의 호를 딴 홍제암이 있다는 사실로 충분히 증명될 수 있다. 또한 회랑대사가 해인사의 졸고 있는 수행승을 위해 모기가 날아 다니도록 했다는 전설과 함께 희랑스님 자신이 목조로 만든 희랑조사상(希郞祖師像)의 조사(祖師)라는 명칭에서도 그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 같습니다
이마, 눈, 볼의 주름은
연륜, 도력의 상징이겠지만, 영롱한 눈동자는 세상을 관조하는 노승의 눈이 아닌 듯합니다
장삼은 흰색 바탕에 붉은색 점과 녹색 점이 어울려 화문을 이룹니다
천을 기워 만든 분소의(糞掃衣)의 가사
가사를 맨 연꽃 매듭
높은 코
이방인 느낌도 있습니다
희랑대사좌상
실존 인물상은 흔하지 않습니다.
제 글은 사족일 것 같아
우리 카페 하늘사랑님 포스팅을 가져왔습니다.
http://cafe.daum.net/moonhawje/DjXU/15753?q=%ED%9D%AC%EB%9E%91%EB%8C%80%EC%82%AC&re=1
전율이 일면서도,
친근한...
2022.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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