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탁, 고령신씨 합장묘
노원구 상계동에 위치
새로 세운 묘갈과 문인석이 있으며, 앞쪽 비각 안에 한글 영비가 자리합니다
원래 묘는 1535년에 태릉 자리에 있었으나, 왕릉이 들어서게 되어 어머니가 계신 이곳에 합장하였습니다.
이윤탁(1462~1501년)
자는 탁지(濯之)이다.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증조부는 이사후(李師厚)이고, 조부는 이계녕(李繼寧)이며, 생가 조부는 이함녕(李咸寧)이다.
부친은 이숙생(李叔生)이고, 모친은 경주 김씨 김일지(金日知)의 딸이다. 부인은 고령 신씨 신회(申澮)의 딸이다.
1483년(성종 14) 식년시 진사 3등 39위로 합격하였고. 1501년(연산군 7) 식년시 문과에 3등 5위로 급제하였다. 문과 급제한 해에 병으로 작고하여, 벼슬은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에 그쳤다.
묵재(默齋) 이문건(1494~1567)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자발(子發), 호는 묵재(默齋)·휴수(休叟). 증조부는 이함녕(李咸寧)[생증조부는 이계령(李繼寧)], 할아버지는 이숙생(李叔生)이다. 아버지는 승문원정자 이윤탁(李允濯)이며, 어머니는 신회(申澮)의 딸이다.
일찍이 중형 이충건(李忠楗)과 더불어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고, 1513년(중종 8) 중형과 함께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화를 입자, 문인들이 화를 염려해 조상하는 자가 없었으나 이문건의 형제는 상례(喪禮)를 다했다 한다. 이에 남곤(南袞)·심정(沈貞)의 미움을 받아, 1521년 안처겸(安處謙)의 옥사에 연루되어 이충건은 청파역(靑坡驛)에 정배되었다가 사사되고, 이문건은 낙안(樂安)에 유배되었다.
1527년(중종 23) 사면되어 이듬해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정원주서에 발탁되었고, 이어서 승문원박사를 거쳐 정언·이조좌랑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때 전날의 혐의로 대간으로부터 서경(署經)이 거부되었으나, 김안로(金安老)의 협조로 관로는 순탄하였다. 1539년 장령을 역임하며 관기 확립에 힘썼고, 그 뒤 통례원우통례(通禮院右通禮)를 거쳐 승문원판교가 되어, 중종의 국상을 맞아 빈전도감(殯殿都監) 낭관으로서 대사를 무난히 처리하였다. 1546년 명종이 즉위하면서 윤원형(尹元衡) 등에 의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족친 이휘(李輝)가 화를 입었고, 이에 연루되어 성주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성품이 근후했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23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면서 오로지 경사(經史)에 탐닉하고 시문에 힘쓰니, 뒤에 이황(李滉)·조식(曺植)·성수침(成守琛)·이이(李珥) 등이 이문건의 시문을 즐겨 읊었다 한다.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인물정보는 한국인물종합정보시스템에서 발췌
권지승문원부정자이공휘윤탁(權知承文院副正字李公諱允濯)
안인신씨적고령(安人申氏籍高靈)
합장지묘(合葬之墓)
문인석(1)
문인석(2)
비각
묘갈. 1536년
한글이 반포된 지 90년 후에 새겨진 최초의 한글 비석입니다
묵재(黙齋) 이문건(李文楗)이 아버지 이윤탁(李允濯)의 묘와 어머니 고령(高靈) 신씨(申氏)의 묘와 합장하면서 묘 앞에 세웠습니다. 전, 후면에는 묘주와 행장이 새겨져 있고, 왼쪽과 오른쪽에도 한글과 한문으로 경계문을 새겼습니다.
서측면.
동측면. 불인갈(不忍碣)
(서측면)
(靈碑)
녕ᄒᆞᆫ비라거운사ᄅᆞᄆᆞᆫᄌᆡ화ᄅᆞᆯ니브리라
이ᄂᆞᆫ글모ᄅᆞᄂᆞᆫ사ᄅᆞᆷᄃᆞ려알위노라
‘영(靈)한 비(碑)라. 거운 사람은 재화(災禍)를 입으리라. 이는 글(한문) 모르는 사람더러 알리노라.’
신령한 비라 쓰러뜨리는 사람은 재화를 입으리다. 이를 글 모르는 사람에게 알리노라'
(동측면)
불인갈(不忍碣)
위부모입차수무부모하인훼지석불인범칙묘불인능명의만세지하가지면부
(爲父母立此誰無父母何忍毁之石不忍犯則墓不忍凌明矣萬世之下可知免夫)
"부모를 위하여 이 비석을 세운다. 누가 부모 없는 사람이 있어서 어찌 차마 이 비석을 훼손할 것인가?
비를 차마 깨지 못하리니 묘도 또한 능멸당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만세를 내려가도 가히 화를 면할진저.”
***불인갈(不忍碣)
《맹자 孟子》의 공손추장구(公孫丑章句) 상(上)에 나오는 불인지심(不忍之心)에서 유래
사진, 글 출처. 문화재청
한글 영비의 가치
첫째, 중종 31년(1536) 당시 한글이 얼마나 널리 알려져 있는가를 증명해주는 자료이다.
둘째, ‘한글영비’에 새겨진 한글의 서체는 훈민정음이 창제된 직후의 서체, 즉 <훈민정음 해례본>의 서체와 <용비어천가> 서체의 중간형의 성격을 지닌다.
셋째, 이 비석의 글은 비석의 이름인 ‘영비(靈碑)’를 제외하고는 국한 혼용이 아닌 순 국문으로 쓰여 있다. 본격적으로 한글로만 쓴 문헌은 18세기에나 등장하나 이 ‘한글영비’는 16세기에 이미 순국문으로만 쓰인 문장이라 할 수 있다.
넷째, ‘한글영비’는 언해문이 아닌 원 국문 문장이다. 15세기 이후 한문 원문을 번역한 언해문이 한글자료의 주종을 이루었으나 이 ‘한글영비’는 짧은 문장이긴 하나 처음부터 우리말로 쓰인 문장으로, 한글이 한문 번역 도구가 아닌 우리의 생각과 느낌을 직접 전달하는 도구로 변화하였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다섯째, ‘한글영비’에 쓰인 국어 현상은 이 당시의 언어를 잘 반영하여 당시 국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윤탁 영비
근자에까지 주민들이 금줄을 치고 보호하였다고 전합니다.
얼마 전에도 도로를 개설하는 작업자들이 이건을 거부하여 공사가 지체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문건의 경계비는 영비가 분명해 보입니다.
참고로
우리나라에는 인흥권 묘비, 문경새재 산불조심 비석, 진주 의곡사에 한글비석이 전합니다.
포천 인흥군 묘계비
https://blog.daum.net/12977705/8726936
문경새재 불조심 비석
진주 의곡사 한글비
https://blog.daum.net/12977705/8726743
2022.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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