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서울특별시

서울...목멱산 봉수터지

임병기(선과) 2022. 3. 7.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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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멱산 봉수터지

한양을 그렇게 오르내렸으면서 막상 남산은 처음 올랐습니다.

견민 님 설명으로 한양의 동. 서. 남. 북 형국을 한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북악. 북한산.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

 

종묘도 눈에 들어옵니다

 

청와대도 보입니다

 

인왕산. 북악산

 

목멱산 봉수사터

봉수대는 1394년(태조 3)에 처음 만들어져 1895년(고종 32)까지 사용되었으며, 옛 문헌을 참고하여 목멱산에 있었던 봉수대 5개소 중 1개소를 1993년에 복원한 것이라고 합니다. 아쉽게도 나머지 4개소의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목멱산 봉수는 서울 남산에 있다고 하여 일명 (京烽燧)라고 하며, 조선 시대 전국 각지의  봉수를 매일 받아 병조(兵曹)에 보고하는 중앙 봉수소였습니다

 

봉수 제도는 해상은 평상시에는 1거, 왜적이 해중에 나타나면 2거, 해안에 가까이 오면 3거, 접전 시에는 4거, 육지로 침입하면 5거로 하였습니다. 육지는 적이 국경 밖에 나타나면 2거, 변경에 가까이 오면 3거, 국경을 침범하면 4거, 접전 시에는 5거를 올리도록 하였습니다

 

국사당(國師堂)

서울을 수호하는 신당으로 원래 지금의 남산 팔각정 부근에 있었으나, 일제가 남산에 신궁(神宮)을 지으면서 신궁보다 높은 곳에 사당이 있을 수 없다 하여 인왕산 기슭의 선바위 밑으로 이전시켰다. 사당 안에는 여러 신이 모셔져 있는데, 그중 무학대사가 있어 국사당이라 불렀다는 이야기와 함께 또 다른 흥미로운 설화가 전해진다.


함경도 영흥(永興) 어느 마을에 노파가 살았는데, 슬하에 딸이 있었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아직 어렸을 때 그 집을 지나는데, 노파가 몰래 말하기를, 장차 임금이 될 몸이니 항상 조심하고 무언가 의심 나는 일이 있거든 찾아올 것을 부탁하였다.
그러던 중, 하루는 태조가 노파의 집 근처를 지나는데, 비가 몹시 내려 그 집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다. 노파는 마침 조용히 할 말이 있다며 태조를 반겼다. 저녁이 되어 태조는 아랫목에 눕고, 노파의 딸은 윗목에 누웠다. 밤이 깊어지자 노파는 태조에게 앞으로의 일과 임금이 되거든 도읍을 한양에 정할 것 등의 여러 가지 일을 말하는데, 갑자기 딸이 말참견을 하였다. 노파가 딸을 꾸짖고는, 태조에게 딸을 때리라고 하였다. 이에 태조는 비밀이 누설되면 큰일이라는 생각에 딸을 세게 쳤다. 그러자 노파의 딸은 사지를 떨더니 죽고 말았다.


당황한 태조가 사람을 죽였으니 관에 자신을 고발하여 죄를 받게 하라고 하였으나, 노파는 태연한 얼굴로 이 일은 자신의 잘못이고 운명이니 아이를 묻어야 한다고 하였다. 뒷산에 올라 딸의 시체를 묻은 노파는 그제야 태조의 소매를 잡고 울면서, 태조가 큰일을 이루는 데에 누가 될까 두려워 딸이 죽을 줄 알면서도 때리라 하였다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곧장 이 길로 가서 대업을 이룰 것을 당부하였다.


이후, 태조는 노파를 찾기 위해 함경도 전역으로 수소문했으나 영영 찾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조선을 세우고 한양에 도읍을 정한 태조는, 남산 중턱에 집을 지어 모녀의 초상을 그려 달고서 국사당이라 칭하고, 봄과 가을에 무당을 시켜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였다고 한다.(서울 중구청 홈)

 

2022.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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