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현단(五賢壇)
사화, 당쟁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귀양 온 선비, 관리로 파견된 사람 중에 다섯 사람을 기리기 위해 마련한 제단으로, 이들의 위패를 모시던 귤림서원의 옛 터에 세워져 있습니다. 고종 8년(1871) 서원 철폐령으로 서원이 훼철되어 오현단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오현은 중종 15년(1520)에 유배된 충암 김정 선생, 중종 29년(1534)에 제주목사로 부임해 온 규암 송인수선생, 선조 34(1601)에 안무사로 왔던 청음 김상헌선생, 광해군 6년(1614)에 유배된 동계 정온 선생, 숙종 15년(1689)에 유배된 우암 송시열 선생 등 다섯 분입니다.
오현단에는 오현의 위패를 상징하는 조두석과, 묘정비, 김정 선생과 송시열 선생의 적려유허비, 송시열선생의 글씨가 남아 있으며, 근자에 복원된 귤림서원과 향현사 장수당이 있습니다.
귤림서원 묘정비(橘林書院廟庭碑)’
묘정비는 1850년(철종 1) 제주목사 장인식이 귤림서원의 내력을 기록하여 세운 비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귤림서원과 함께 철거되었으며, 1892년 ‘오현단’과 함께 다시 세웠다고합니다.
">탐라성의 남쪽에 예부터 충암의 사당이 있어 평정공 이약동과 함께 배향하였는데, 평정공은 바로 이 제주에서 목사를 지내면서 청백리로 이름이 드러났었다. 숙종 1년 을묘년(1675)에 지호 이선이 순무하는 길에 충암 선생의 도학과 절의로 볼 때 한 사당에 같이 배향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여 옆에 향사를 별도로 짓고 평정공을 옮겨 봉안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영해사’이다. 숙종 8년 임술년(1682)에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세 선생을 함께 배향하여 서원을 세우고 편액을 하사하여 ‘귤림서원’이라고 하였다.
>그로부터 11년 뒤인 을해년(1695)에 우암 송시열 선생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다섯 선생은 학문은 비록 길을 달리했으나 도의 귀착점은 서로 같았으니, 대개 인의를 성으로 삼고 충효를 행으로 삼으며, 성현을 법으로 삼고 사설을 물리치는 것을 공으로 삼았다. 충암 김 선생은 휘가 정이요, 호는 충암이며, 시호는 문간공이다. 중종 때에 요순시대와 같은 다스림에 뜻을 두어서 정암 조광조 선생과 마음을 합하여 도와서 삼대처럼 성인의 교화가 회복되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남곤과 심정의 무리들이 하룻밤 사이에 신무문으로 몰래 들어와 기묘년(1519)의 측량할 수 없는 사화를 빚어냈다……."(디지털 제주문화대전)
조두석(俎豆石), 오현의 위패
충암 김정(沖菴 金淨, 1486~1520),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 1570~1652), 동계 정온(桐溪 鄭蘊, 1569~1641), 규암 송인수(圭庵 宋麟壽, 1487~1547),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
충암김선생적려유허비(冲菴金先生謫廬遺墟碑)
"당시 목사로 재직하던 백희수가 1852년 11월에 김정이 살았던 집터에 유허비를 세웠다는 내용이 쓰여 있다. 글을 쓴 사람은 판관 임백연이다.김정은 1520년(중종 15) 8월 지금의 오현단 부근 금강사에 유배되었다. 이곳에서 사사될 때까지 거의 1년여 동안 적거하면서 제주 유림들에게 학문과 제사의 예법을 가르쳐 주었고, 음사를 숭배하는 악풍을 교도하였다. 또한 「한라산 기우제문」과 「수정사 중수기」 등의 제문과 많은 시 작품을 남겼는데, 특히 김정이 저술한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을 남겼다"(디지털 제주문화대전)
향현사유허비(鄕賢祠遺墟碑)
향현사는 1843년(헌종 9)에 이원조 제주목사가 세종 때 한성판윤을 지낸 영곡(靈谷) 고득종(高得宗)을 추향(追享)하기 위해 귤림서원 옆에 세운 사당으로, 비석은 제주목사 이규원(李奎遠)이 1893년(고종 30) 정월에 향현사의 유허지에 세웠다고 합니다.
노봉 김선생흥학비(蘆峯金先生興學碑)
제주 목사를 지낸 김정의 흥학비
앞면에는 “노봉김선생흥학비(蘆峯金先生興學碑)”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선생의 이름은 정이다. 영조 10년(1735)에 본주에 부임하였는데 청백한 덕이 있었다. 학문을 진흥시키는 것으로 자기의 책임을 삼아 삼천서당을 창건하였다. 여러 수석에 품평한 제시는 모두 선생께서 직접 쓴 글씨들이다. 아, 선생이 을묘년(1735 : 을사년이 아님) 9월 3일에 화북관에서 졸하니 영혜사에 추가로 배향되었다. 신미년에 사당이 훼철된 후 계사년에 이르러 이에 조그만 빗돌을 세워 추모하는 뜻을 붙이니 저 을묘년으로부터는 159년이 지난 10월 일이다.
"(先生諱정 英廟乙卯 莅州有淸德 以興學爲己任 創三泉齋 凡水石品題 皆手澤也 嗚呼先生乙巳 九月三日 卒于禾北館 追享永惠祠 申未撤祀後 癸巳爰竪短碣 以寓追慕 距乙卯 一百五十九年 十月日也)”라고 새겨져 있다. 건립 연대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김정이 제주 목사로 부임했던 을묘년(乙卯年)이 1735년(영조 11)인데, 159년 만이라고 했으므로 1893년(고종 30) 10월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디지털제주 문화대전)
우암 적려유허비, 충암 적려유허비(사진 출처/다음 카페. 제주문화곳간 바람이 머무는 숲)
우암송선생 적려유허비(尤菴宋先生 謫廬遺墟碑). 1771년
김량행(金亮行) 찬, 이극생(李克生) 서
“제주성 내의 삼지동은 우암 선생이 귀양살이하던 옛 터이다. 선생은 1689년 3월 이 고장에 들어와 불과 달포 만에 다시 잡혀 서울로 올라가다가 도중에 사약을 받고 돌아가셨다. 그 옛집은 처음 제주 관리 김환심(金煥心)의 집이었는데, 1724년의 화재로 없어져 지금은 밭이 되고 말았다. 1771년 봄 권진응이 선생의 뜻한 일을 상소하였다가 대정에 유배되었는데 이미 풀려났으므로 주인의 안내를 받고 선생의 적소 터를 찾았다. 그는 ‘선생은 성덕과 대업을 이루신 분인데 아직 백 년도 되지 않아 그 유적마저 찾아볼 수 없게 되었으니 선비들의 수치가 아니겠는가.’ 하고 개탄하였다.
그리하여 세 고을의 선비들과 협의하여 드디어 조그만 비를 세우게 되어 글을 지었는데, 이는 양세현 목사의 협조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노인들이 서로 전하는 말에 따르면 선생은 귀양살이하는 동안 별로 할일이 없었으므로 오직 향교의 서적을 가져다 읽었으며, 이따금 외출하게 되면 행낭에 포나 과일을 준비하여 술을 마시며 시문을 짓곤 하였다. 또 손자 주석(畴錫)으로 하여금 귤림서원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매일같이 지팡이를 짚고 뜰을 산책하기도 하였으며, 빈 터를 손수 갈고 씨를 뿌리기도 하였다. 이것은 모두 고사(故事)로 보존할 필요가 있어 보태어 쓰는 바이다.”(디자털 제주 문화대전)
병풍 바위
증주벽립(曾朱壁立)
송시열 글씨. 1856(철종 7)년 제주목사 채동건과 판관 홍경섭(洪敬燮)이 각자.
송시열의 한양 집 근처에 있었던 글씨를 모사하여 새겼으며, 증자와 주자를 공경하고 배우자는 의미 같습니다.
후학 채동건 후학 홍경섭(後學 蔡東健 後學 洪敬燮)
숭정 사 병진 모각(崇禎 四 丙辰 模刻)
사진이 선명하지 않아 개인적인 해석입니다
광풍대(光風臺)
새겨진 시기와, 주체는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광풍은 광풍제월(光風霽月)에서 가져왔습니다
황정견이 주돈이의 인품을 가리킨 말로 인품이 고상하고 마음이 대범한 것이 마치 "맑은 날의 바람과 비 갠 날의 달과 같다"라는 의미입니다
장수당(藏修堂)
유생들의 강학 공간
향현사鄕賢祠(사진 출처/다음 카페. 제주문화곳간 바람이 머무는 숲)
오현비
귤림서원
"1576년(선조 9)에 제주판관 조인후(趙仁後)를 중심으로 한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정(金淨)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충암묘(冲菴廟)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66년에 판관 최남진(崔南鎭)이 제주시 이도동으로 이건 하였으며, 1683년에 정온(鄭蘊)·김상헌(金尙憲)·이약동(李約東), 1678년에 송인수(宋麟壽)를 추가배향하였고, 1682년(숙종 8)에 ‘귤림’이라고 사액되어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1695년에 송시열(宋時烈)·이회(李檜)를 추가로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 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어 복원하지 못하였으며, 1892년에 지방유림이 오현단(五賢壇)과 단비(壇碑)를 쌓아 매년 향사를 지내오다가, 1910년부터 중단되었다. 오현(五賢)은 김정, 송인수, 김상헌, 정온, 송시열이며, 현재 오현단은 제주도 기념물 제1호(1971.08.26.지정)로 지정되어 있다."(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
오현단
제주로 유배 온 선비, 파견된 관리들이 제주민들에게 끼친 공을 기리기 위하여 마련한 제단입니다.
저는 네비의 안내로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서 귤림서원에서 진입하였지만, 혹 기회가 된다면 정문으로 출입하여 제가 놓친 우암의 적려비, 향현사, 더불어 병풍바위에 새겨진 암각을 둘러보기를 권합니다.
2021.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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