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청도군

청도...하평리 은행나무

임병기(선과) 2021. 6. 28.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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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전면 하평리 1323

시도기념물 제109호로 1509년 낙안당 김세중 선생이 심었다고 합니다.

 

월강재(月岡齋)

하평리 은행나무를 심은 낙안당 김세중(1484~1553) 선생을 제향 하는 재실입니다

 

김세중(金世仲)
"휘는 세중(世仲)이오 자는 군승(君承)이며 호는 낙안당(樂安堂)이고 본관은 김해로 삼중대광 김녕군 김 목경 (三重大匡 金寧君 金牧卿)선생의 8세손이며 돈령부사 안정공 김 효득(敦寧府事 安靖公 金 孝得)선생의 증손이고. 승지 김양(承旨 金양)선생의 아들로 1484년 (성종 15년)에 영산 교촌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천품이 명철하여 어릴때 부터 근면하고 나이 7세에 응대하고 진퇴함이 어졌했고 절의를 중히 여겼으며 8세때 이미 소학을 정통하였으며 학사 (學士)로 그 이름이 높았으며 명암 이 중(明巖 率 中), 임천 배 학(林泉 裵鶴) 두 선생과 더불어 보림 (寶林)에 정각 (亭閣 )을 세워 그 이름을 청암(靑巖) , 명암(明巖)이라 하고 도의로서 교우하며 성리학(性理學)을 탐구(探究)하다 동천 김식(東泉 金湜)선생 문하에서 수학하고 되에 명암 이 중(明巖 李 中)선생과 같이 망헌 이주(忘軒 李胄)선생의 문하에서 철리를 탐구하였는데 그때 망헌 이주(忘軒 李胄)탁영 김 일손(濯纓 金馹孫), 한훤당 김 굉필(寒暄堂 金 宏弼), 일두 정 여창(一두 鄭 汝昌 )등 여러 선생들이 선생의 풍도(風度)를 극구 칭찬하였다 하며 무오사화에 망헌(忘軒)과 여러 선생이 피화되자 그 애통함에 식음을 전폐하고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현자(賢者)를 사모하였다 한다. 1535년(중종 30년)에 사림의 천거로 호군(護軍)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었다 한다.

선생의 선대는 경기도 장단 사동에 살다가 창녕군 영산 교촌리(지금의 계성면 광계리)에 이거 하였다 한다. 1509년 (중종 4년)에 운문사를 역방할 때 청도의 광월리(지금의 매전면 하평동 광월리)에 들려 살피니 지세(地勢)가 아름답고 심오하며 민속이 순후(醇厚)함을 보고 후손들에게 복거(卜居 :살곳을 가려서 정함)할 것을 타이르고 은행나무를 손수 심었는데 지금도 울울창창하게 자라고 있다. 1553년(명종 8년)에 향년 70에 졸 하였다. (참고문헌 :낙안당문집, 명암문집, 국사대사전)"(김해 김씨 인물정보)

 

월강재명 병서

 

제단 표석 같습니다.

낙안당 선생 김공 수식 행수(樂安堂 先生 金公 手植 杏樹)

 

유자문행 유풍유존 (維兹文杏 遺風猶存)

낙옹소식 과자필식(樂翁所植  過者必式)

 

단기 3843년 중종 기사 식수(檀紀 3843年 中宗 己巳 植樹)

 

자료에 의하면 높이 27m, 가슴 높이의 줄기 둘레는 7.6m이며 유주가 많이 달려있습니다

마을의 동신목(洞神木)으로 매년 대보름날에는 동제를 지냈다고 합니다. 은행나무의 잎이 낙엽이 질 때 보통은 10일 정도가 걸리는데 짧은 기간에 일시에 떨어지면 풍년이 들고 10일 이상이 걸리면 흉년이 든다는 전설이 전합니다.

 

유주(乳柱)

석회 동굴의 종유석을 연상시킵니다.

 

유주(乳柱)

 

청도읍에서 운문사 방향으로 진행하면 동산리 처진 소나무 가기 전에 있습니다.

은행잎이 노랗게 물든 가을날 장연사지, 운문사, 답시 기회가 되면 들려보길 권합니다. 

 

2021.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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