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라남도/구례군

구례...지리산 화엄사

by 임병기(선과) 2021. 5. 14.
728x90
728x90

화엄사

중간 중간 다녀왔지만, 2008년 글을 가져 옵니다.

 

https://blog.daum.net/12977705/4802806?category=5198

 

https://blog.daum.net/12977705/4802816

 

https://blog.daum.net/12977705/4802821

 

성보박물관(2019년)

https://blog.daum.net/12977705/8727261

 

지리산화엄사 현판.선조의 네 번째 부인의 아들인 왕자 의창군 글씨

皇明崇禎九年嵗舍丙子仲秋義昌君珖書. 인조 14년(1636년)

 

수조

 

벽암(碧巖) 각성(覺性)대사(1575~1660년)비

 

벽암당 각성碧岩堂覺性(1575~1660)

법명은 각성(覺性)이고, 자는 징원(澄圓)이며, 호는 벽암(碧巖)이다. 호서(湖西) 보은(報恩) 사람으로 속성은 김해 김씨이다.대사에 관한 기록은 구례 화엄사에 있는 <구례 화엄사 벽암대사비(求禮華嚴寺碧巖大師碑, 1663년)>와 보은 법주사에 있는 <법주사벽암대사비(法住寺碧巖大師碑, 1664년)>에 남아있다.

 

벽암 각성대사는 부휴(浮休)대사의 수제자로 선(禪) 수행과 계율 실천에 투철하였다. 남한산성 축성의 책임자로 활동하였으며, 병자호란 때는 승군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후 적상산 사고(史庫)를 지키는 임무를 맡는 등의 국가적 소임과 함께 종단의 승풍을 진작하였다.저술로는 『선원집도중결의(禪源集圖中決疑)』 1권, 『간화결의(看話決疑)』 1편, 『석문상의초(釋門喪儀抄)』 1권 등이 있다. 벽암대사는 송광사 중창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송광사에서 입적하였다. 송광사와 화엄사에 승탑이 있고, 해인사 국일암에는 진영이 남아있다.

 

화엄사 부도전의 벽암대사 부도

 

금강문

2008년 글에는 언급이 없습니다

놓쳤는제, 최근에 세웠는지.

 

아금강인지

흄금강인지...

 

천왕문

 

당간지주

 

보제루

 

화엄사 동서 오층석탑

각황전이 주금당이면, 석탑은 동서삼층석탑이 아니며 동시대에 세원진 탑도 아닐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대웅전앞 동서오층탑?

하지만 동서탑은 대웅전 정면도 아닙니다.

 

궁금하지만 저는 결론을 못 내립니다.

2008년 글에 인용했던 김봉렬교수의 해석입니다.

 

김봉렬 교수의 재미진 이야기를 들어보자. "화엄사 본 마당에 오르려면, 보제루의 동쪽 끝을 돌아 마당에 오르게 되는데, 여기서 보여지는 광경이 바로 화엄사의 주된 표정으로, 이상한 현상을 목격하게 된다. 커다란 각황전과 작은 대웅전의 크기와 높이가 거의 같게 보인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약간의 트릭이 있다.

 

즉, 본 마당의 입구로부터 각황전은 멀리 떨어져 있고, 대웅전은 가깝다. 또한, 본 마당은 가자의 석단을 둘러 조성하고, 석단 위에 건물들이 배치되는데, 각황전은 석단에서 멀리 물러 앉았고, 대웅전은 가깝게 다가 앉았다. 이러한 건축적 장치를 통해서 각황전과 대웅전은, 그 절대적 크기와는 무관하게, 상대적으로 같은 크기로 보이며, 두 개의 동등한 중심 전각의 위상을 같게 된다."

 

또한 의견이 분분하지만 탑에 관련되는 부분도 가져온다. 물론 두탑을 동시대에 조성한 탑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왜 이처럼 의도했을까? 화엄사의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면 해답을 구할 수 없다. 원래 화엄사는 절 이름과 같이 화엄종의 중심 사찰로 창건되었다. 그리고 현 각황전 자리에 장육전을 짓고 중심 전각으로 삼았다. 이때만 해도 아직 대웅전은 세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장육전 앞에는 一자 석축만 쌓고, 그 아래 마당에 하나의 탑을 세웠다. 지금의 화엄사 서탑이다. 이처럼 창건시에는 1금당 1탑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는 가람의 구조를 후삼국 통일과 연관하여 해석하고 있다. " 후삼국시기에 화엄종은 두 파로 갈리게 된다. 해인사를 중심으로 한 북악파는 왕건의 편에 서서 고려 건국의 승리자가 되고, 화엄사를 중심으로 한 남악파는 견훤의 편에 섰다가 패배자가 되고 만다. 남악파의 중심이었던 화엄사는 이 때 주인이 바뀌어, 더 이상 화엄종의 사찰이 아니라 법화신앙 계열 (혹은 선종계열)의 사찰로 소속이 변화한다.

 

법화신앙계 가람은 흔히 쌍탑식 형식을 선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컨대, 불국사 대웅전 앞 마당의 다보탑과 석가탑은 <묘법연화경>에 나오는 석가모니불과 다보여래를 형상화 한 것으로, 법화신앙의 중요한 장면을 재현한 것이다. 따라서, 기존의 서탑과 나란히 동탑을 세워 쌍탑 형식을 완성했다. 현재 본 마당에 있는 쌍탑은 동시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서탑이 단독으로 세워진 후, 150년 후 쯤에 동탑이 추가된 것이다. 자세히 비교하면 두 탑의 차이를 알 수 있다."

또한, 법화신앙의 상징 불전인 대웅전을 세워서 가람의 중심 전각으로 삼을 필요가 있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기존의 장육전을 없애고 그 자리에 대웅전을 신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육전은 없애기에는 너무나 장중하고 중요한 전각이었다. 따라서 보존할 필요가 있었고, 장육전의 자리를 피해 새로운 자리에 대웅전을 세울 필요가 있어서, 현재의 자리를 골랐고, 가람의 주 진입 방향도 현재와 같이 바꾸었다. 원래는 현재 승방이 있는 동쪽 계곡에서 올라오던 것을, 지금과 같이 계곡을 타고 남쪽에서 오르도록 변경했다.

이렇게 되면, 위치상으로 대웅전이 가람의 중심이 되게 된다. 또한, 대웅전 앞에 새로 추가된 동탑은 자연스럽게 대웅전 소속이 되어, 각황전-서탑 / 대웅전-동탑의 구도가 완성되고, 기존의 1탑1금당제의 화엄사찰의 건축적 형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대웅전+쌍탑제라는 법화신앙의 가람형식을 성공적으로 구현할 수 있었다. 종파와 교리가 바뀌었지만, 과거의 형식을 존중하여 보존하고, 그 위에 새로운 형식을 추가했던 옛 스님들의 겸손과 지혜야 말로, 한국 불교의 역사를 아직도 지속시키고 있는 근본적인 힘이 아닐까? 화엄사 앞 마당에 설 때마다 감사할 수밖에 없는 건축적 장면이요, 역사의 증명이며, 교리적 화합이다."

 

동오층석탑

 

어?

우주에 면석이 물린 유형이군요?

예전에는 몰랐는데.

 

서오층석탑

 

배례석

배례석도 각황전이 아니라 대웅전을 향하고 있습니다.

 

석주

석축

 

석축

 

석등

 

우리나라의 고복형 석등

https://blog.daum.net/12977705/8726985

 

원통전앞 사사자 석탑

 

현판

형조판서 이진휴.1703년

 

3불 4보살.

관세음보살, 아미타불, 보현보살, 석가모니불, 문수보살, 다보여래, 지적보살

 

목조 석가여래

 

아미타 여래

 

다보여래

 

삭황전 후벽 천장

 

각황전 후불단

아미타여래입상

 

원통전 관음보살

 

나한전

목조석가여래

 

대웅전

일주문 편액과 더불어 의창군이 쓴 글씨입니다

 

 대웅전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노사나불 석가여래,

인조 10년(1632년). 금어 청헌, 인균

 

후불탱. 삼신불화

영조 33년(1757년), 금어 정인왕사

 

목조 비로자나불

 

목조 석가여래

 

목조 노사나불

보관을 쓴 노사나불은 흔치않습니다.

 

 

명부전

목조지장보살

 

목조 시왕

 

목조 시왕

 

사사자석탑

해체 보수 중

 

공양상

 

이번에 들리지 읺은 남악사

아래는 2008년 글

 

 

지리산은 신라 때부터 五岳의 하나인 남악(南岳)으로 신성하게 여기던 산으로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지리산 산신께 제사를 지내던 곳이 남악사이다. 산신제는 국가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신라 때에는 천왕봉에서 고려 때에는 노고단에서 제사를 지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나라에서 파견된 제관(祭官)에 의해 갈뫼봉 아래인 광의면 온당리 당동에서 중사(中祀)의 예를 갖추어 제사를 지냈으며, 영조 13년(1737년) 남원부사의 주도로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침탈이 노골화되던 순종 2년(1908년)에 일본의 민족정기 말살정책에 의해 제사는 강제로 폐지되었다. 1969년에 들어와 구례군민의 뜻으로 이곳에 현재의 남악사를 세우고 매년 곡우절을 기해 약수제라는 이름으로 지리산 산신제를 거해아고 있다.

 

남악사는 신축 일주문을 지나 계곡을 끼고 화엄사로 오르는 길에서 계곡을 건넌 곳 한적한 곳에 따로 떨어져 위치하고 있다. 도리통 3간, 양통 2간의 이익공식 겹처마,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정면 3간에는 모두 쌍여닫이문을 달았고, 양 측면에는 출입을 위한 외여닫이문을 달았는데, 모두 아래에 궁창부 한 단이 있는 교살의 창호이다. 건물 외부는 가칠과 긋기단청을 하여 수수하게 꾸몄다. 내부에는 ‘智異山之神’이라 쓴 위패(位牌)를 모시고 있다...한국전통사찰정보

 

화엄사 부도전

https://blog.daum.net/12977705/8725510

게으름

옛글의 오류도 그냥 둡니다.

 

오히려

넘쳐나는 화엄사 글에 사족 같아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2021.04.09

728x90
728x90

'전라남도 > 구례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례...사도리 석불좌상. 삼층석탑  (0) 2021.05.15
구례...화엄사 구층암  (0) 2021.05.14
구례...화엄사 성보박물관  (0) 2021.05.11
구례...지리산 천은사  (0) 2021.05.10
구례...천은사 부도전  (0) 2021.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