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경산시

경산...금호서원.유허비.하마비

임병기(선과) 2021. 1. 15.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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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서원(琴湖書院)

하양읍 부호리 114

1684년(숙종 10)에 지방유림이 허조(許稠)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하양읍 금락동에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서사동으로 이건 하고, 1790년(정조 14)에 ‘금호’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 하여 많은 후학을 배출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어 그곳에 유허비를 세우고 단향(壇享)으로 배향하여왔으며, 1923년 유림의 공의로 현재의 위치에 복원되었다.(다음)

1.922년부터 예조판서를 지낸 아들 허후(許珝)와 후손 허조(許造)를 추가 배향하였습니다

 

허조(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63144

 

 

배치도

본래 모습인지는 알 수 없지만 독특한 구성입니다.

외삼문인 준도문을 들어서면 강학공간인 수교당이 정면에 있고, 동, 서재 없이 향 좌측에 성경재가 자리하고, 뒤편에 관리사와 부속 건물이 위치합니다. 사당인 경덕사는 수교당 향 우측 축대 위 내삼문 안쪽에 명륜당과 좌향을 달리하여 자리 잡고 있습니다.

 

향교, 서원 배치에 있어

전학후묘를 일(日) 자 배치. 간혹  병렬(一) 배치는 보았지만, 강학공간과 사당의 좌향을 달리 한 경우는 기억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러한 독특한 배치는 지형 때문에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준도문((遵道門)
금호서원 외삼문입니다.

 

 

遵道門

 

 

수교당(修敎堂)
금호서원의 강학공간이며 중당협실 구조로 협실 전면에는 툇마루를 걸었습니다.

 

 

금호서원(琴湖書院)

 

 

정종 경술(正宗 庚戌) 사액(賜額)

1,790년 정조 임금으로부터 사액 받은 금호서원 현판

 

정종은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 2대 왕 정종이 아니라 정조대왕입니다

 

그렇다면 왜 정종正宗이 정조正祖로 묘호가 바뀌어 추존되었을까요?

 

본래 시호는 '문성무열성인장효대왕(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이고 묘호는정종(正宗)이었으나, 1899년 대한제국 선포 후 고종의 4대조를 추존할 때 고종의 증조부가 된다는 이유로 정조로 변경되었으며, 동시에 선황제(宣皇帝)로 추존되어 바뀐 이후 정식 시호는 '정조경천명도홍덕현모문성무열성인장효선황제(正祖敬天明道洪德顯謨文成武烈聖仁莊孝宣皇帝)'가 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역시 정조대왕실록이 아니라 정종대왕 실록입니다.

 

 

수교당(修敎堂)

금호서원 강당입니다.

 

 

선액시에 정조 임금이 내린 어제문

 

 

성경재(誠敬齋)
동, 서재가 없는 금호서원의 유생들의 주거 공간

건물 위계인 전당합각재헌루정(殿堂閤閣齋軒樓亭)으로 추정하면 성경재(誠敬齋)가 동재, 구인헌(求仁軒)이 서재로  생각됩니다.

 

 

구인헌(求仁軒)

 

 

성경재(誠敬齋)

 

 

내삼문

 

 

내삼문 홍살 문양

 

 

경덕사(景德祠)
금호서원의 사당

 

 

景德祠

 

 

금호서원을 나와

서사동 옛 서원 터를 찾아갑니다.

 

 

금호서원 유허비, 하마비, 사이동 각자

 

 

사이동(四而洞)

서사리의 옛 지명이며, 1724년 금호서원을 옮겨올 당시 도내 유림에서 평화로운 농촌 풍경을 시로 읊으며 지은 지명으로 전합니다.

 

일출이작(日出作 : 해가 뜨면 작업하고)

일입이식(日入息 : 해가 지면 쉬며)

착정이음(鑿井飮 : 우물물 길러 마시고)

경전이식(耕田食 : 밭을 갈아 먹는다)

 

 

하마비

1,684년 하양 금락리 금호서원 창건 시에 세웠던 비로 추정하며, 서사리로 옮겨 올 때 이건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

자연 암반 위에 세웠으며, 비신, 비갓, 보주가 일석입니다.

 

 

비머리(전)

문양과 보주, 보주는 훼손된 상태입니다

 

 

비신

 

 

후면

 

 

비머리(후)

문양이 없습니다

 

 

금호서원 유허비각

시건장치가 있어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유허비각 기문(출처.하양 어씨 문경공파 종친회 카페)

현(縣)의 금호서원은 오직 우리 선조이신 경암선생(敬庵先生)을 제향하는 곳이다. 무진년에 첩원(疊院)은 훼철하라는 거사가 있었는데 본 서원도 그 때에 역시 원통하게 훼철에 들어갔으니 다만 자손된 사람의 아픔이 될 뿐아니라 어찌 유학계(儒學界)의 한결점이 되는 일이 아니겠는가?

 

세월이 흘러서 지금까지 거의 삼십년이 가까워지는데 공허해진 산을 상상해보니 집과 담장이 어느 곳에 있었는지 초목만 거칠게 무성하고 물이 흐르고 구름이 떠돌던 고을이 적막해졌으니 그 빈터를 가 볼 때 마다 스스로 나도 모르게 두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하여 사사롭게 생각하니 선생의 남기신 은택을 함께 입고 있는 동국(東國)사람이라면 반드시 장차 사람이 지닐 떳떳한 도

리는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니 그 도덕이 후세에 오래 전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이와 같은 밝음과 어두움에 관계되지 않겠지만 다만 서원이 있어서 높이 봉향(奉享)하던 자취가 장차 세월이 오래됨에 따라서 기록도 없이 사라지게 된다면 선왕께서 편액을 하사하시며 높이 보답한 뜻이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드디어 종족과 향중 유림(儒林)과 의논하여 한 조각 짧은 비를 세우고 비각집을 지어서 비를 보호케하여 유허(遺墟)임을 나타내어 복원하기 전까지 잊지 않겠다는 생각을 붙인다는 말이다.

 

辛丑年(1901) 九月 九日 후손 정(楨)이 삼가 기하다.

 

 

금호서원유허비(琴湖書院遺墟碑)

1,901년 세움

 

 

귀부

 

 

 

결혼식 참석 후 귀갓길에 둘러본 자인향교, 하양향교, 마지막으로 금호서원과 유허지

두서없는 글로 마무리하며, 세운 연도와 주체를 새긴 자인향교 하마비, 세운 연도를 새긴 하양향교 하마비, 옛터에 자리한 금호서원 하마비를 찾아보았고, 또한 향교와 서원의 정형에서 벗어난 배치를 살펴본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2021.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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