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포천시

포천...화완옹주 태함.태비

임병기(선과) 2020. 7. 31.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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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완옹주 태실

대원사(신북면 만세교리 29-1 뒤편 태봉에 위치

 

정상

산신각을 경유 소로를 올라가면 이릅니다.

 

향우편 능선길로 내려옵니다.

 

태비가 눈에 들어옵니다.

 

태비. 태함

 

태비. 태함

 

화완옹주 태비

(전)건융 삼년 정월십구일 축시 생 옹주아지씨 태실(乾隆三年正月十九日丑時生翁主阿只氏胎室)

(후)건융 삼년 삼월이십육일 오시 입(乾隆三年三月二十六日午時立

 

1,738년 1월 출생

1,738년 3월 세움

 

1,738년은 영조 14년 입니다.

 

화완옹주和緩翁主(1,738~1,808)

영조와 영빈 이씨 소생의 옹주, 사도세자의 친동생,정조의 고모

"사도세자의 친누이동생으로 10세에 천연두에 걸려 목숨을 잃을 뻔했으나 살아났다. 13세인 1749년 일성위 정치달과 혼인했다. 1756년 화완옹주가 해산하자 영조는 즉시 화완옹주의 집으로 달려가 경사를 축하해주었다. 그러나 다음 해 1월에 화완옹주가 낳은 딸이 죽고, 2월에는 부마 정치달마저 죽었다. 이 소식을 듣고 잠시 뒤 정비 정성왕후도 눈을 감았다. 영조가 남편의 죽음을 당한 화완옹주의 집으로 달려가려고 하자 신하들이 말렸다. 부인의 상을 당한 영조가 부마의 상에 먼저 가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조는 신하들을 물리치고 화완옹주의 집으로 갔다가 밤늦게 궁궐로 돌아왔다. 영조는 부인의 상보다 딸의 안위를 더 걱정한 것이다.

이후 화완옹주는 친오라비인 사도세자와 조카 정조를 위협하고, 양아들 정후겸을 보위에 올리려는 역모를 꾸몄다. 그러나 정조는 등극 후 정후겸만을 사사했다. 화완옹주는 서인으로 강등당하여 ‘정치달의 처’ 또는 ‘정처’로 불렸고, 봉작한 교지(敎旨)는 영조의 어필이므로 불태워버리지 말도록 했다. 화완옹주는 처음에는 강화도 교동으로, 나중에는 파주로 유배되었다가 1799년 풀려났다. 그러나 순조 때 다시 탄핵당했고, 1808년 물고(物故)되었다."(조선의 숨겨진 왕가 이야기)

 

명문(전)

건융 삼년 정월십구일 축시 생 옹주아지씨 태실(乾隆三年正月十九日丑時生翁主阿只氏胎室)

 

비머리

 

 

태비(후)

목련이 조식된 장방형 대좌. 비신과 화문이 표현된 비머리,연봉형 보주가 일석입니다.

 

명문(후)

건융 삼년 삼월이십육일 오시 입(乾隆三年三月二十六日午時立

 

 

 

태봉등록(胎峰謄錄)

"포천현 북면 만세교리 동변 을좌(乙坐) 신향(辛向) 소재의 봉우리가 같은 해 2월 16일에 태봉으로 낙점되어 장태 길일(藏胎吉日)인 그해 3월 26일에 안태사(安胎使)로 임명된 우승지 유건기(兪健基)의 책임 아래 공사를 마친 내용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태함

덮게돌입니다.

상부의 보주는 영조 자녀 태함에서 많이 보입니다.

 

 

 

 

더없이 명당인데

화완옹주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갔으니...

 

2020.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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