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상주시

상주...안양군,완원군 태실

임병기(선과) 2020. 5. 24.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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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봉

모동면 상판리 산 51에서 바라본 태봉

 

태봉 주변에 민가에 주차

향 좌측 인삼 밭 옆 능선을 타야하며, 다소 가파릅니다.

 

안양군(安陽君), 완원군(完原君) 태실(胎室) 태실

애기비 등의 석물은 보이지 않으며, 민묘 가장자리에 태함이 노출된 상태입니다.

 

태함 1개. 태함 덮개돌 2개

 

 

안양군安陽君은 성종과 숙용 정 씨사이에 출생한 3 남, 완원군完原君은 숙용 홍씨 사이에서 태어난 4남입니다.

1928년 태항아리는 서삼릉으로 반출되었으며 현재는 고궁박물관에 보관 중이라고 합니다.

 

안양군 태지석

황명 성화16년 정월 초 5일 생 왕자수담아기태, 성화 20년10월 초십일 자시 장

皇明 成化十六年 正月 初五日生, 王子壽聃阿只氏胎, 成化二十年 十月 初十日 子時藏

아명은 수담
1,480년 출생, 1,484년 태를 매장하였습니다.

 

안양군 이항(安陽君 李㤚.1480~1505)

"이름은 이항(李㤚). 성종의 셋째 아들로, 어머니는 후궁인 귀인(貴人) 정씨(鄭氏)이다. 부인은 능천군(綾川君) 구수영(具壽永)의 딸이다. 동생은 봉안군(鳳安君) 이봉(李㦀)이다. 1504년(연산군 10) 연산군이 생모 윤씨(尹氏)가 폐위되고 죽은 원인이 성종의 후궁인 엄씨(嚴氏)와 정씨의 참소(讒訴)에 있다고 판단하여 두 사람을 대궐 뜰에 묶어 놓고 손수 때렸다. 그러다가 정씨 소생인 안양군과 봉안군을 불러 때리도록 하였는데, 봉안군은 자기 어머니인 줄을 알아 때리지 못하였으나 안양군은 한밤중에 끌려나온 터라 어두워 누구인 줄 모르고 어명대로 하였다.

 

같은 해 제천에 안치되었다가 1505년(연산군 11)에 절도(絶島)에 이배(移配)되었으며, 가재는 적몰(籍沒)되었다. 그리고 노비전토사채(奴婢田土私債)는 추쇄(推刷)되고 처는 견성군(甄城君)에게 사여(賜與)되었으며, 이봉과 함께 사사되었다. 중종이 즉위하면서 생모인 정씨에게는 삼년제물이 내려지고 이항과 이봉에게는 쌀·종이·정포(正布)·목면 등이 내려짐과 동시에, 관리를 파견하여 제사지내도록 하였다. 1520년(중종 15)에 부인의 상소에 따라 택지(擇地)하여 개장하도록 교지가 내렸다. 시호는 공회(恭懷)이다."(다음 백과사전)

 

완원군 태지석

황명 성화 16년 12월 29일생 왕자수석아기태, 성화 20년10월 초십일 자시 장

皇明 成化十六年 十二月 二十九日生, 王子壽石阿只氏胎, 成化二十年 十月 初十日 子時藏

아명 수석

안양군과 출생 연도가 같으며, 1,484년 함께 매장하였습니다.

 

완원군 이수(完原君 李?. 1480~1509)

"성종의 4남으로 모친은 숙의남양홍씨(淑儀南陽洪氏)이다. 1489년(성종 20) 10세 때 완원군(完原君)으로 봉군(封君)되었다.
1492년(성종 23) 13세 때 면천군부인(沔川郡夫人) 전주최씨(全州崔氏)와 결혼하였다. 최씨는 시집온 지 9년만에 어린 딸을 남겨둔 채 1500년(연산군 6) 12월 11일 죽자 1502년(연산군 8) 23세 되던 해 여름, 정선군부인(旌善郡夫人) 양천허씨(陽川許氏)를 맞아 이듬해 9월 3일 이성군(伊城君)을 낳았다. 그러나 1504년(연산군 10) 3월에 폐비윤씨의 복위문제를 배경으로 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충청도 부여현으로 유배되었다가 1506년(중종 1)에 중종반정으로 유배에서 풀려났다. 1,509년 병사하였다.시호는 소도(昭悼)이다."(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2020.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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