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전주시

전주...예종대왕 태실

임병기(선과) 2020. 3. 15. 06:39
728x90
728x90

경기전 홍살문

 

얼마 전 우리나라의 태실, 태비를 정리하면서 경기전 옆 예종대왕 태실 사진이 없어 의아했습니다.

그렇게 여러차례 지나다녔음에도 2004년 답사기가 마지막 글이어서 남도 답사길에 잠시 들렸습니다..

 

아직

매표소는 문 열지 않았지만 전주시민을 위해 아침 일찍 개방한 듯 출입 통제는 없었지만, 경기전은 개방 전이어서 참배하지 못했습니다.

 

눈에 담고 예종 태실로 향합니다

 

2004년 글

http://cafe.daum.net/moonhawje/DjZP/164

 

하마비

쌍귀부가 아니었군요.

문화재청 홈페이지를 비롯 사자 혹은 해태로 기록되어 있으며, 경기전 수호, 벽사의 상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암수 한쌍으로 묘사하며, 음양의 조화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

계급의 높고 낮음, 신분의 귀천을 떠나 모두 말에서 내리고, 잡인들의 출입을 금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태조 어진을 모신 경기전 다운(?) 글귀입니다.

 

측면

함풍 병진 지월 일 중각( 咸豊  丙辰 至月 日 重刻)

1856년 음력 11월 글을 다시 새겼습니다.

 

후면

만력 42년 4월(萬曆 四十二年 四月)

1614년 경기전 중수 시에 처음 세운 것 같습니다.

 

 

예종대왕 태실과 태비

산책하는 사람 한 명 없는 시간

혼자서 독차지하고 호사를 누립니다.

 

예종

"휘() 황(). 자 명조(: ). 시호 양도(). 1450년(세종 32년) 수양대군(세조)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해양대군()에 봉해졌다가 첫째 아들 의경세자()가 사망하자 1457년(세조 3) 왕세자에 책봉되었고, 1468년에 즉위하였으나 재위 13개월 만에 사망했다. 첫 번째 부인으로 한명회의 딸인 한 씨를 맞이했으나 첫 원자를 출산하고 사망했으며, 얼마 후 원자마저 사망하였다. 둘째 부인으로 한백륜()의 딸을 둘째 부인(안순왕후 )으로 맞이하였다.

재위 중 직전수조법()을 제 정하여 둔전(屯田)의 민경()을 허락하였다. 또한 세조의 총애를 받았던 무관이자 병조판서였던 남이()를 겸사복장으로 강등시키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를 단행했다. 하지만 남이와 강순() 등이 연루된 역모사건이 일어나자 이들을 처형하였고 이를 남이의 옥사()라 불렀다. 그 외 민수()의 사옥() 등이 있다. 예종은 비록 어린 나이에 등극하였지만 법치주의에 입각한 강력한 왕권을 만들고자 매우 엄격한 통치를 지향했으며 선왕의 치적에 힘입은 훈구파 세력과 대립하여 개혁정책을 펼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런 그의 의도는 신숙주(), 한명회()를 중심으로 한 훈구파의 견제를 받았으며 더구나 모친인 정희왕후 마저 예종을 지지하지 않았다. 원손으로 제안대군을 두었으나 어린 나이 때문에 예종을 이어 왕위에 오르지 못했고 의경세자의 아들 자을 산군(성종)이 보위에 올랐다. 갑작스러운 예종의 죽음을 두고 훈구파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설이 제기되었다. 능은 경기 고양시 덕양구에 소재하는 창릉()이다."(네이브 백과사전)

 

1578년 완주군 구이면에 처음 조성, 1734년 중수, 1970년 현 위치로 옮겨왔다고 합니다.

 

예종대왕태실(王胎)

 

만력 6년 10월초 2일건( )

1578년 10월 세움

 

후 156년 갑인 8월 26일 개석립( 寅八 )

1734년 다시 세움

 

귀부 정면

 

귀부 측면

 

귀부 후면

 

이수 정면

 

이수 후면

 

 

태실

석난간을 두르고 봉안

태실의 조성 목적과 봉안 의례는 생략합니다.

크게는 동기 감응으로 장수와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며 풍수형국의 길지에 조성합니다.

 

기단부 위에 부도를 닮은 중동석을 올리고

그 위에 개첨석과 보주는 일석으로 조성하였습니다

 

기단부(사방석)

 

개첨석,보주

 

왜 완주 구이에서 옮겼을까요?

일제강점기 서삼릉으로 옮겨 가면서, 남겨진 부재를 수습하여 구이초교에 모신 후에, 다시 경기전 옆에 봉안하였습니다

 

날이 밝아 옵니다.

하지만, 코로나의 여파인지 산책하는 시민은 보이지 않습니다.

 

경기전

다시 올 날이 언제일지, 아쉬움만 남기고 떠납니다.

 

2020.03,12

 

728x90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