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천사 마지막 순례가 10년이 되었군요. 출입금지 구역이어서 들리지 못햇던 천불전을 가슴에 품고 있었기에 다시 인연 지을 날을 학수고대하였습니다.
아래는 2010년 글 http://cafe.daum.net/moonhawje/DjZP/1446
바람의 무늬...길상호 산길 숨차게 내려와 제 발자국마다 단풍잎 붉게 물들이는 잎들뿐 아니라 오래도록 위태롭던 내 마음의 끝가지도 툭툭 부러뜨리는 바람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향천사香川寺 깊은 좌선坐禪 속에서 풍경은 맑은 소리로 바람을 따르고 나의 생각들도 좇아갔다가 이내 지쳐 돌아오고 마네 이 골짜기 전설傳說만큼이나 아득하여서 마음을 접고 서 있네 그랬더니 아주 떠난 줄 알았던 바람 다시 돌아와 이제는 은행나무를 붙잡고 흔들며 노란 쪽지들을 나에게 보내네 그 쪽지들을 펴 읽으며 나는 바람과 나무가 나누는 사랑을 알게 되었네, 가을마다 잎을 버리고 바람을 맞이하는 나무의 흔적, 나무는 깊은 살 속에 바람의 무늬 새겨 넣고 있었네 그 무늬로 제 몸 동여매고서 추운 겨울 단단히 버틴 것이네 풍경 소리가 내 마음의 골짜기에서 다시 한 번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네
향설루 香雪樓
극락전. 향천사 금당이며 현판 글씨는 탄허呑虛스님 작품입니다.
목조아미타삼존 2016년 본존불에서 발견된 묵서에 의하면 순치 16년(順治 16년,1659년) 조각승 신원, 운혜 등 7명에 의해 봉안되었습니다. 그러나 충남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지만 문화재청에는 제목만 등재, 예산군청에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운혜스님...최선일/향기로운 불교에서 발췌(2016.10.03)
17세기 중반에 불교 조각계를 대표하는 조각승은 승일 스님, 무염 스님, 계훈 스님, 명준 스님, 사인 스님 등으로 30여명에 이른다. 이 시기에 많은 조각승이 활동한 것은 그만큼 사찰 내에 전각의 건립과 중건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조각승들은 17세기 전반에 활동한 스승을 따라 불상 제작을 배운 후, 스승의 계보를 잇는 스님들로, 대표적인 조각승이 운혜(雲惠, 雲慧, 云惠) 스님이다.
조각승 영철 스님과 선후배 관계공주 마곡사 거주, 전국을 무대로 활동 判事와 大禪師의 지위에 오름
운혜 스님은 수연 스님과 불상을 같이 제작한 영철 스님과 활동하는데, 수연 스님과 직접 불상을 작업한 내용이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1650년대에 충남 공주 마곡사에 주지를 맡은 것으로 보아서 1640년대 활동이 밝혀진다면 수연 스님과 관련성이 발견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제까지 운혜 스님이 수화승으로 참여한 불상은 7건 40여 점이 조사되었다.
운혜(雲惠) 스님은 생몰년이라든가, 그가 승려장인(僧侶匠人)이 된 배경에 대해 남아있는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스님이 제작한 불상에서 발견된 발원문(發願文)과 사찰의 연혁을 적은 사적비(寺蹟碑)를 통하여 활동시기에 대한 접근이 가능하다. 운혜 스님은 1649년에 영철 스님이 수화승으로 제작한 황해도 배천 강서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현재 서울 화계사 봉안) 제작에 참여한 12명 가운데 4번째로 적혀 있어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인 1650년에 수화승으로 전남 해남 서동사 대웅전 목조석가삼세불좌상을 제작하였고, 1650년에서 1659년 사이에 전판사(前判事) 승연(勝衍) 스님, 운익(雲益) 스님, 운일(雲日) 스님 등과 번갈아 가며 공주 마곡사 주지를 맡았으며, 박야외(朴野外) 거사(居士)와 각순(覺淳) 스님이 재산을 시주하여 탁일(卓一) 스님 등과 함께 묘수장사(竗手匠師)로 추대되어 승당(僧堂)을 건립하였다.
이후 운혜 스님은 수화승으로 1661년에 전남 장성 백양사 약사암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아미타불만 제주 월계사 봉안), 1665년에 전남 곡성 도림사 목조아미타불좌상을, 1667년에 전남 화순 쌍봉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을, 1672년에 전남 순천 동화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 등을, 1675년에 고흥 능가사 불상(조성발원문만 존재)을 제작하였다. 당시 능가사 불상 조성은 중창주인 벽천정현(碧川正玄) 스님이 공주 출신(公州錦江子)이라 그 인연으로 운혜 스님이 충남 공주 마곡사에서 전남 고흥까지 내려와 불상을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운혜 스님은 1678년에 영철 스님 등과 전남 순천 송광사 사적비 건립에 후원인으로 참여하였다. 스님이 만든 마지막 불상은 1680년에 도림사 목조보살좌상이다.
운혜 스님은 1654년에 마곡사에 조성된 범종의 명문에 산인(山人)으로 언급되어 충남 공주 태화산(泰華山)에 거주한 스님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675년에 고흥 능가사 불상을 제작할 때, 대선사(大禪師)의 직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운혜 스님은 1620년 이전에 태어나 1640년을 전후하여 불상 제작의 수련기를 거친 후, 1650년대 후반에 충청 공주 마곡사 주지를 역임하였으며, 전라남도 해남, 화순, 고흥, 곡성 등의 사찰에 불상을 조성하였다.
현재까지 밝혀진 운혜 스님의 활동 시기는 1649년부터 1680년까지 약 30여 년 동안으로,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불상을 조성하였다. 운혜 스님의 조각승 계보는 태전(太顚, -1600-1615-) → 수연(守衍, -1615-1639-) → 영철(靈哲, -1623-1649-), 운혜(雲惠, -1649-1680-), 운익(雲益, -1650-1684-), 승균(勝鈞, -1672-1675-), 경림(敬琳, -1665-1680-) → 인성(印性, -1660-1747-), 삼안(三眼, -1678-1740-), 묘경(妙瓊, -1665-1672-) 등으로 이어진다.
운혜 스님이 만든 대표적인 불상은 전남 해남 화원면 사동(寺洞) 마을에 있는 서동사 대웅전에 봉안된 목조삼세불좌상이다. 불상은 높이 120㎝로, 석가불을 중심으로 아미타불과 약사불이 배치된 목조삼세불좌상이다. 머리는 뾰족한 나발과 경계가 불분명한 육계로 표현되고, 육계 밑에는 반원형의 긴 중간계주와 원통형의 낮은 정상계주가 있다. 얼굴은 전체적으로 갸름하고, 이목구비(耳目口鼻)에서 풍기는 인상은 부드럽고, 목에 자연스럽게 삼도가 새겨져 있다. 본존의 착의 방식은 대의 안쪽에 편삼(扁衫)을 입지 않고, 양 협시불은 편삼을 입어 다르게 나타난다. 본존의 오른쪽 어깨의 대의자락은 겨드랑이가 보일 정도로 짧게 늘어져 세 번 접히고, 팔꿈치와 배를 지나 왼쪽 어깨로 넘어가고, 반대쪽 대의자락은 수직으로 내려와 하반신을 덮어 조선 후기 불상의 전형적인 착의 방식을 따르고 있다. 불상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에는 1650년에 운혜 스님을 수화승으로 운익(雲益) 스님, 보인(寶印) 스님, 학헌(學軒) 스님, 민준(敏俊) 스님, 의상(義尙) 스님, 의호(義浩) 스님, 정률(淨律) 스님, 묘현(妙玄) 스님 제작으로 기록되어 있다.
운혜 스님은 1667년경에 화순 쌍봉사 명부전(冥府殿)에 불상을 조성하였다. 이 불상은 목조지장보살좌상을 중심으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배치하고, 향 좌측에 세 분의 대왕과 판관을, 향 우측에 일곱 분의 대왕과 사자 등이 봉안되어 있다.
방형의 얼굴에 이목구비는 전형적인 조선후기 불상을 따르지만, 턱이 약간 뾰족하고, 인중이 다른 불상에 비하여 넓으며, 목에 난 삼도(三道)가 거의 수평으로 처리되어 있다. 따로 제작된 오른손은 어깨 높이까지 올려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왼손은 가지런히 무릎 위에 올려놓고 엄지와 중지를 맞댄 수인(手印)을 취하고 있다. 바깥에 걸친 두꺼운 대의는 오른쪽 어깨에서 가슴까지 내려와 두 겹 접힌 후 팔꿈치와 복부를 지나 왼쪽 어깨로 넘어가고, 반대쪽의 대의는 세 겹으로 접혀 수직으로 내려와 결가부좌한 다리 위에 펼쳐져 있다. 하반신을 덮은 대의는 중앙에 두께가 일정한 주름을 중심으로 파도가 출렁이듯 펼쳐져 있고, 반대쪽 주름은 한 가닥 넓게 펼쳐져 있다. 특히, 하반신의 대의 처리에서 가장 큰 특징은 복부에서 가운데로 흘러내린 주름의 끝이 부메랑같이 표현된 점이다. 이 하반신의 대의 자락 표현은 조선후기 다른 조각승이 제작한 불상에서 볼 수 없는 요소이다.
이러한 특징은 20년 정도 늦게 활동한 색난(色難, 色蘭) 스님이 1694년 제작한 화순 쌍봉사 목조석가여래좌상의 하반신을 덮은 대의가 잔잔한 물결처럼 곡선을 그리는 것과 비교된다. 또한 대의 안쪽에 입은 승각기 표현에서도, 색난 스님이 제작한 불상은 조선후기 전형적인 불상과 마찬가지로 앙련형(仰蓮形)의 승각기 상단을 가진 것에 비하여 운혜 스님의 불상에서는 둥근 상단에 양쪽 끝이 날카롭게 접힌 도끼날 같은 부형(斧形)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외에도 목조지장보살좌상의 왼쪽 측면에 보이는 대의자락이 두 가닥 수직으로 내려오다 Y자로 접힌 표현은 특이하다.
1650년에 제작한 해남 서동사 목조여래좌상과 1667년에 화순 쌍봉사 목조지장보살좌상을 비교하면, 복부에서 수직으로 내려오던 가운데 대의자락이 옆으로 뻗어 복주머니 같고, 협시불인 목조아미타여래좌상와 목조약사여래좌상의 하반신 대의 처리도 차이가 있다. 이는 1667년에 만들어진 쌍봉사 목조지장보살좌상의 하반신을 덮은 대의처리의 변화과정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요소로, 운혜가 제작한 불상의 가장 큰 특징인 대의 끝단이 부메랑같이 표현된 주름을 중심으로 파도가 출렁이듯 접혀있는 표현의 초기 형태이다. 또한 가슴을 덮은 승각기는 상단을 한 번 말아 도톰한 앙련형으로 표현되었는데, 17년 뒤에 제작한 1667년 쌍봉사 목조지장보살좌상에서는 어깨를 덮은 대의 간격이 좁아지고, 승각기 상단의 표현이 도끼 날 같은 형태로 바뀌었다. 뿐만 아니라 불상의 왼쪽 측면에 대의자락이 두 가닥 수직으로 내려오다 Y자를 이루는 표현은 이후에도 볼 수 있다.
운혜 스님과 그 계보에 속하는 조각승들이 17세기 후반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무기년명(無紀年銘) 불상은 전남 강진 백련사 명부전 불상, 충남 예산 향천사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 전남 순천 정혜사 지장전 불상 등 호남 지역에 주로 산재하는 특징이 있다.
관음보살좌상
대세지보살좌상
불단 향우측에는 조선후기 석조나한상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유리창 때문에 사진을 찍지 않았습니다.
향천사 구층석탑 많은 자료에 백제시재 석탑이라고 표기되어 있지만, 백제계의 양식을 일부 갖춘 고려시대 석탑 입니다.
기단부 기단부가 본래 모습을 잃어 후보한 까닭에 모호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맨아래의 2단 부재는 망실된 지대석 후보물, 3번째는 하부가 사절된 하층기단 갑석이며 면석과 저석은 결실되었습니다. 4번째는 별석 탑신괴임, 상층기단 중석, 상층기단 갑석으로 추정 합니다
상층기단 중석의 우주를 2중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이러한 작례는 밀양 소태리 오층석탑(1,109년)에서도 나타나는 작례입니다. 별석 굄 상부에 홈을 내고 면석을 끼운 모습은 백제계석탑에서 나타나는 유형 입니다
갑석 물매가 거의 없고, 하부에 부연을 표현하였으며, 굄을 조출하였습니다.
탑신부 초층 탑신석의 우주에는 보조기둥을 세웠습니다. 모르긴 해도 상층에 남아 있는 탑신석 형태로 보아 낮은 탑신석 때문에 초래되는 안정감 결여를 보완하기 위한 시각적 장치로 추정됩니다.
탑신부와 옥개석에는 백제계석탑의 유형이 일부 남아 있습니다. 초층 탑신을 상층기단 갑석에 끼운 유형 옥개석의 높고 두터운 내림마루 옥개석을 관통한 풍탁공 옥개석 상부와 하부의 희미한 동시 반전
두터운 옥개석 내림마루
옥개석을 관통한 풍탁공 전각 상하부의 동시 반전
옥개석 하부 절수구 표현 음각 추녀선 4단 층급 받침
층급 받침 8~9층 층급은 2단 3~7층 층급은 3단 1~2층 층급은 4단 처럼 보입니다.
상륜부 노반,복발, 보주가 유존 합니다. 노반과 복발은 일석이며 노반에는 귀꽃(앙화?)이 있습니다.
살펴 볼 수록 재미진 석탑입니다. 동호회원들과 함께하여 다양한 해석은 금상첨화이었습니다.
향천사 香泉寺 세존응화 2952 을축단양 世尊應化 二九五二 乙丑 端陽 1928년, 단오 00월면(00月面). 만공스님의 글씨 같습니다. (00은 만공滿空?) (만공 진영..서산 천장사) 만공滿空(1871~1946) "본관은 여산(礪山), 속명은 도암(道巖), 법명은 월면(月面), 법호는 만공(滿空)이다. 1871년(고종 8) 태인 군내면 상일리(현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에서 출생하였으며, 13세에 출가하였다. 동선당 맞은편 향천사香泉寺.서선당 西禪堂 현판은 원담圓潭스님 글씨 입니다.
동선당 東禪堂 탄허 呑虛스님 글씨
탄허呑虛(1913~1983) 속명은 김금택(金金宅)이다. 탄허는 법호이며 법명은 택성(宅成)이다. 1913년 전라북도 김제군 만경읍 대동리에서 태어났다.기호학파 최익현 계통의 이극종으로부터 한학을 배웠고 도학에도 상당히 밝았다. 15세부터 도(道)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고승 한암과 서신문답을 주고받은 뒤 1934년 22세의 나이로 오대산 상원사에서 출가하였다. 이후 한암의 밑에서 15년 동안 수행하였다.
조왕도
조왕도 조왕과 담시역사(부목하늬),조식취모(공양주모살)을 함께 모셨습니다.
"조왕신은 동아시아에 주로 등장하는 집안을 관장하는 신 중 하나인데 부엌을 관장하는 신이자 부녀자들의 신이다. 조왕각시, 부뚜막신, 삼덕할망(제주)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집안의 재액을 막아주고 가업이 번창하게 해주는 일을 하며, 부엌에는 늘 불씨가 있으므로 불에 대한 부분도 맡고 있다. 음력 12월 23일에 승천하고, 설날 새벽에 지상에 내려와 제자리로 돌아간다고 한다. 부엌에서 조왕신이 지켜보고 있으므로, 주부들은 불을 때며 악담을 하면 안 되고, 부뚜막에 걸터앉거나 발을 디뎌도 안 되며, 부엌을 깨끗이 관리해야 했다고 한다."
한국의 조왕신은 고대 한반도의 부뚜막신이 결합되어서 나타난 신격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시골 할머님들이 부뚜막 뒤쪽에 토대를 만들어 놓고 그 위에 조왕보시기 조왕중발 조왕단지를 두어 거기에 매일 아침 깨끗한 물을 길어다 채워놓고 치성을 드리는 데 그게 바로 조왕신을 모시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본래 여성신으로 묘사되었으나 후대에는 남성신으로 표현되었다. 집안의 최고신 자리를 놓고 성주신과 싸웠으나 지는 바람에 성주신과 사이가 나쁘다는 전승도 있는데, 이것이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의 전환을 의미한다는 학설도 존재한다. 한국 불교에서는 좌우에 땔감의 신 담시력사와 요리의 신 조식취모를 거느린 부부신으로도 등장한다. 우리나라에서 조왕신과 관련된 자료로 가장 오래된 것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으로, 변진조에 "귀신에게 제사 지내는 방법은 다르나, 문의 서쪽에 모두들 조신(竈神, 조왕신)을 모신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렇듯 불과 불을 다루는 부엌을 신성시하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 공통적으로 보이는 신앙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의 헤스티아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후 불교와 더불어 중국의 조왕신 신앙이 들어오면서 한국의 전통 부뚜막신과 중국 조왕신은 동일시되어 둘이 섞이게 되었고, 자연히 그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도 조왕신이 조왕할아버지, 조왕할머니 부부로 나타나거나, 소수지만 중국 조왕신처럼 조왕대감이라는 남성신으로 나타나기도 한다."(유현님 글)
천불전
천불전 석조천불좌상.조선후기 경기를 관람하는 관중의 모습입니다.
크기,표정이 서로 다르며 얼굴이 중첩되지 않도록 봉안하였습니다.
부도전 (전)의각대사 부도. 멸운대사비.멸운대사 부도 옛사진에는 우측 부도는 없었습니다.
(2010년 4월)
멸운당대사혜희지탑 滅雲堂大師惠希之塔
멸운당대사혜희지탑비 滅雲堂大師惠希之塔碑에 강희 사십칠년 무자 월 립(康熙四十七年 戊子) 명문이 있어 1708년에 세운비 입니다. 그런데 멸운대사가 의병으로 참여했다는 임진왜란과는 100여년 시차가 있어 여러 생각이 듭니다.
기단부
옥개석 하부 겹처마
옥개석 내리마루의 인물상 멸운대사 이겠지요? 너그러우며 고승의 풍모가 느껴집니다.
연화보주
옥개석
전 의각대사 傳義覺大師 부도 달빛에 젖은 이야기를 햇볕에 드러내려는 우를 범하지는 않겠습니다. 지대석 위에 팔각 하대석, 중대석,상대석을 갖춘 원구형 부도이며,. 옥개석, 복발, 보개를 올렸으며, 상부 화염보주는 후보물로 추정됩니다. 조선후기의 부도입니다.
하대석 하단 연주형 기둥으로 구획하고 중앙 액속에는 조선 시대에 등장하는 안상을 새겼습니다. 하대석 상단에는 복련을 두고 상부에는 홈을 두어 중대석을 안치시켰습니다.
중대석에는 팔부신상을 저부조로 봉안하였으며 모습이 익살스럽고 자유분방 합니다.
상대석 앙련 예전 혼자 답사에서는 스쳐 지났는데, 여러 사람이 함께한 답사에는 시각이 다양한 까닭에 눈에 들어 옵니다. 복련의 모습이 일정하지 않고 큰 두 장의 잎 좌우로 3단 복련을 새겼습니다.
상대석 상단 화문
상대석 상단 화문
원형의 탑신석 사방을 깍아 내어 완전한 원형은 아닙니다.
옥개석 내림마루 끝 멸운대사 부도 처럼 인물상을 새겼습니다.
인물상
복발 옥개석 상부 복련을 새긴 받침위에 복발을 올렸습니다.
보개 겹처마 평고대에도 화문을 새겼습니다.
화염보주
단판 복판으로 표현된 하대석 복련,중대석 신장상, 상대석 앙련, 상대석 상단 문양을 새긴 장인은 멋을 아는 센스쟁이 임에 분명 합니다. 모범생은 멋이 없으며, 멋을 아는 사람은 품행이 방정 맞고 인간적이며 정형을 싫어 합니다.
오늘도 절실히 느꼈습니다.. 삼인행 필유아사 三人行必有我師!!!
2019.11.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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