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김해시

김해... 부사 박동상 철비

임병기(선과) 2019. 11. 14. 0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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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문화원 비림

 

 

이건비문

경종景宗 2년은 1733년이 아니라 1722년 입니다.

맨아래 2008년 이곳 문화원에 옮겨 세웠다고 기록하였으나 글은 1991년에 기록하였다는 내용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부사 통정대부 박 공 청덕선정비 府使 通政大夫 朴 公 淸德善政碑

공 휘 동상 公 諱 東相

옹정 갑진 삼월 일雍正甲辰 三月 日.1724년

 

"공은 밀성박씨 충헌공파 후 판서공 후 직장공 후 의제공 휘 주(注)의 증손이오 방어사 희민(希閔)의 손자로 깊은 학문과 덕망이 높아 士林들이 추종을 받았고 맑고 굳세며 청렴한 기백이 동료들의 두려움에 대상이 되자 조선초 초기에는 조정에서는 서로 반목(反目)함이 심하여 공(公)이 조정에 중신(重臣)으로 근무할 때 집권층의 미움과 두려움의 대상이 되자 공모하여 김해부사로 좌천되게 하였다.

 

종질인 통훈대부(通訓大夫) 창진(昌震)공과 동행 김해 신 부임지에 오게 되었는데 때는 경종(景宗2년) (1722 壬午)이오 이듬해 계묘년(鷄卯)흉년이 심하게 들어 부민(府民)들은 기아에 목숨을 잃게 되자 공은 생각건데 나는 고을 목민관으로 죽어가는 부민들을 그냥 복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임금의 승인 없이 관곡을 임의 방출하여 기민들에게 배급하여 목숨을 소생케 하고 그 뒤 상소를 올려 벌주기를 청했는데 임금께서는 문책하지 않고 죽어가는 백성의 구휼(救恤)한 공을 인정하고 승진시켜 전라우도수군절도사로 발령하니 신 부임지로 떠나는 길을 막고 부민들은 부복하여 생명을 구해주신 부사님이지만 임금님의 영을 받아 영전해 가는 길을 막을 수 없으나 종질 통훈대부 창진공께서라도 김해에 머물 게 해 달라고 눈물로 애원하니 종질 장진공을 김해에 머물며 살 게 하였다.


그 후 박부사의 은의(恩誼)에 감동하여 부민들은 집집마다 놋숫가락 1개씩을 모아 녹여서 서기 1724년 3월에 김해부사 박동상 청덕선정동(銅)비를 진영읍 신용리 대로변에 세우고 면(面)마다 석비를 세워 7자나 세웠다는 기록을 볼 수 있으나 현재 3자만 보존되고 있는데 동비(銅碑)는 1991년 6월에 도난과 영구 보존을 위하여 당시 김해군수와 김해향교 신헌도 등  본손들이 재정을 협찬하여 군청내 이전개수 하였으나 그후 김해시 군이 합병되고 군청이 세무서가 되자 2008년 11월에 김해 문화원에 이건 보존되고 있으며 이 동비는 공무원에 귀감이 되고 시민들에게는 보은이 깊은 정을 느낄 수 있는 유서 깊은 碑다."(다음 웹문서,김해부사박동상 행록에서 발췌)

 

 

 

 

 

 

뒷면

 

 

동치이년 계해 사월 일 구비파상고 同治 二年 癸亥 四月 日 舊碑破傷故

종손 영우 宗孫 永祐

유사 중우 有司 衆祐

 

1724년에 세웠던 비석이 파손되어 1863년 중우가 책임자가 되어 종손과 함께 보수하였다는 내용입니다.

 

 

 

 

 

 

 

2019.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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