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광역시/부산시

부산...범어사 부도전

임병기(선과) 2019. 5. 9.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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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 부도전

부도비 1기, 조선후기, 일제강점기, 근대에 조성한 30여기 이상의 부도가 3열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오래전 인연지었지만 사진 촬영 겸 다시 참배하였습니다.

 

 

부도

대부분 종형으로, 보주와 일석이며,

채우彩祐스님,초영草英 스님 부도를 제외하고는 중대석이 없거나, 상대석 또는 하대석과 일석으로 낮게 조성하였습니다.

또한 지대석 없이 대석 위에 탑신을 올린 작례도 많습니다.

일제강점기에서 근새의 부도는 기계흠이 뚜렷하고, 연화문이 정치하지 못하며, 일부는 탑신과 대좌가 동일 부재가 아닌 듯 합니다.


부도 명칭

승탑이라는 명칭은 없고, 塔탑.부도浮屠,부도浮圖.사리舍利,방광放光,서기瑞氣 등 다양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맨뒤편 부도

 

 

대각등계남파당채우서상비 大覺登階南坡堂彩祐瑞相碑.

 

 

대각등계남파당채우서상탑 大覺登階南坡堂彩祐瑞相塔

무술(戊戌三月日) 비문으로 1898년으로 추정합니다


자연암반을 치석한 지대석 위에 대좌를 일석으로 조성하였으며, 시대 하강을 엿 볼 수 있는 양식입니다.

탑신석 상하부에 대칭으로 연잎을 새겼으며, 보주를 일석으로 조성하였습니다.


(사진출처...범어사 성보박물관)

채우彩祐

범어사 승통시대僧統時代 133대 주지를 역임한 승려

행적이 전하지 않은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해송당초영대사탑 海松堂草英大師塔

자연암반 지대석,하대석은 결실되었고, 팔각중대석 위에 상대석이 놓였습니다.

탑신과 보주는 일석입니다.

 

(사진출처...범어사 성보박물관)


초영草英

조선 후기 고승으로 행적이 확인되지 않습니다.

 

 

청암당연백대사탑 靑岩堂演白大師塔

중대석이 상대석과 일석으로 조성되었으며, 탑신석과 연화보주가 일석입니다.


(출처...범어사 성보박물관)


연백演白

행장은 전하지 않는 조선후기 고승입니다.

 

 

충허당법관대사탑 沖虛堂法寬大師塔

연백스님 부도와 거의 쌍동이 처럼 보입니다.

 

 

계우당종신탑 桂宇堂宗信塔

지대석, 대좌위에 탑신은 정치하지 못합니다.

조선후기 부도 입니다.

 

 

해안당지담대사탑 海岸堂智談大師塔

지대석, 대좌, 탑신과 보주가 일석이며 보주에는 굄이 있는 조선후기 부도 입니다.

 

 

지봉당대사심정탑 智峯堂大師心淨塔

 

 

도원선사소신공양지탑 道圓禪師燒身供養之塔

뒷면에 원적일(1976년),조성일(1983년)이 새겨져 있습니다.


스님이 간절한 기원은 무엇이었을까요?

 

 

우운당탑 友雲堂塔

상대석 상부에 복련의 연화문이 이채롭습니다.

조선후기 부도 입니다.


(출처...범어사 성보박물관)


우운당 友雲堂


행적이 전하지 않은 조선 후기 고승

연백당 진영과 흡사하여 동일 장인의 작품으로 추정됩니다.

 


당호가 확인되지 않습니다.

 

 

제월당탑 霽月堂塔

대좌는 근대에 조성된 느낌이며, 탑신석과 연화보주는 조선후기로 추정 됩니다.

즉, 동일 부재는 아닌듯 하지만 근거는 없습니다.

 


당호를 새기지 않았으며, 별석 보주는 망실되었습니다.

 

 

 

덕진당여환대선사부도 德眞堂如幻大禪師浮屠.2001년 원적


如幻스님 행장

如幻스님은 1924(甲子)年 八月(陰 七月) 27日 黃海道 재령군 재령읍 석정리 21번지 에서 光山 金氏인 父親 金昌汝와 母親 郭缶瑀의 2男 2女中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俗名은 在業이 시었습니다.

法號는 德眞이며 法名이 如幻이십니다.
스님께서는 1952年 1月 28歲때 禪宗大本刹 梵魚寺로 出家하여 星雲 智曉大禪師를 恩師로 髮 得度하시고, 東山스님으로부터 沙彌戒를 授持하셨으며, 1958年에 梵魚寺에서 東山스님 으로부터 比丘戒를 授持했습니다.

1950初半 梵魚寺는 6.25의 勃發로 亂을 피해온 많은 衲子들의 修禪精進이 結制.解制없이 이루어졌습니다. 스님은 梵魚寺의 이런 家風속에서 恩師 智曉스님의 嚴한 가르침 아래 沙門 로서 갈길을 琢磨해 나갔습니다.

戰爭터를 누벼오는 힘든 旅程에서 생긴 病으로 惡夢에 시달리는 날들이 이어지자, 觀音祈禱를 誠으로 드리고 三七日만에 觀音의 現身을 親見하는 加被力을 입기도 하였습니다. 龍城스님 門下에 또 하나의 커다란 法器가 金井山 자락에서 자라게 된 것입니다. 스님은 梵魚寺  講院에서 敎學을 마치고 參禪修行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捨敎入禪의 길을 擇하신 것입니다.
이때부터 스님의 悟道를 向한 精進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梵魚寺禪院을 비롯해 鷰谷寺, 石窟庵, 七佛寺, 雲上禪院, 佛國寺禪院 等 諸方禪院에서 參禪精進하며 十餘차례의 安居를 成滿했습니다. 特히 鷰谷寺에서는 生食, 午後不食, 長座不臥를 하시며熾熱하게 精進하였습니다.

如幻스님은 講院과 禪院에서의 敎育과 修行에 그치지 않고, 그 修行의 結果를 社會에 回向하기爲한 菩薩의 길도 훌륭하게 걸어가셨습니다. 스님은 智異山 鷰谷寺 住持를 비롯해 도봉산 天竺寺 住持, 佛國寺 石窟庵 住持를 맡으면서 寺勢를 擴張해 나갔습니다. 이렇게 住持職을 充實히 完遂해 내기까지는 梵魚寺와 佛國寺에서 三職所任을 보았던 經驗도 크게 作用했습니다.

이렇듯 스님께서는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맡은 바 所任을 充實히 修行해 나가 寺勢를擴張하는데 커다란 寄與를 하셨으니 스님은 眞情 理事가 無碍한 求道人이었습니다.特히 스님께서는 1967年부터 1969年까지 도봉산 天竺寺 住持를 맡아 參禪大衆을 外護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당시 天竺寺에서는 6年 結社無門關이 進行中이었습니다.스님의 恩師 智曉스님은 勿論 結社大衆이 마음놓고 精進할 수 있도록 마음을 다해 外護에 힘썼습니다.

더 나아가 스님은 佛法을 이 땅에 널리 펴 사람들이 마음에 平和와 幸福, 그리고 悟道의  기쁨을 傳하기 爲해 여러 곳에 절을 創建하셨습니다. 蔚山 成佛寺, 釜山 南富民洞의 大法寺, 密陽 三浪津에 福泉寺를 創建하여 그 伽藍에 佛菩薩의 常寂光土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곳에서 여러 스님들이 修行과 祈禱精進에 들어가 業障을 打破해 나갔으며 法會를 열어  많은 在家者들에게 正法을 傳하였습니다.

特히 民族正氣를 새롭게 세우시려 平生을 盡力하신 三一獨立宣言 33人中 한 분이신 龍城  老스님의 뜻을 繼承하고 宣揚하는 大覺會의 任員으로 오래 奉事하시는 等 社會淨化에도  힘을 기울여 門下에 通光 無比 善容 無常 雲水 日光 善光 無脫 眞光 等 이 時代의 大講伯을  비롯해 많은 훌륭한 弟子를 길러내 韓國佛敎는 勿論 曹溪宗團의 發展에 커다란 寄與를  하였습니다.

秋夕을 一週日 앞둔 날 스님이 危篤하시다는 말씀을 듣고 찾아온 通光스님이 ′지금은 秋夕을  앞둔 날이어서 모두 不便하니 秋夕을 지나고 가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라고 말씀드리자  달력을 보시고 날짜를 確認하시면서 ′그렇게 해보자.‵라고 하시면서 추석을 훨씬 지나 2001年  陰 8月 24日 年前 6時 載藥山 石井庵에서 弟子 日光스님이 지켜보는 中에 조용히 入寂하셨습니다. 理事에 걸림이 없으신 如幻 큰스님이시여! 速還沙婆 하시어 이 땅의 平和를 밝히는 등불로  오시옵소서!

(범어사 휴휴정사에 홍선사숙님이 쓴 글)

 

 

제운당수산대화상적조탑 齊雲堂水山大和尙寂照塔.

근대 부도 입니다.

 

 

소천대선사 韶天大禪師(1897~1978)

후면에 금강원각탑이 새겨져 있습니다


행장


나라 찾는 일 ‘염원’

 정화불사에도 ‘동참’

1897년 서울 종로구 적선동 131번지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신봉운(申奉雲) 선생, 모친은 김성녀(金性女) 여사.

 본관은 평산이며, 속명은 신세순(申世淳).

조선이 망국의 비운을 겪고 있을 무렵 소년 시절을 보낸 스님은

나라 찾는 일을 일생일대의 염원으로 삼았다.

 

1910년 14세가 되던 해 서울 정동교회에 나가 국권회복을 간절히 기원했지만,

같은 해 8월 한일강제병합을 목도하고 실망한다.

이 무렵 “저는 주님 곁을 떠납니다. 나라 찾는 길을 찾지 못했을 때 다시 돌아오겠습니다”라는

 마지막 기도를 하고 교회를 떠난다.

 

이후 여러 종교와 학문을 폭넓게 섭렵하면서 구국의 길을 모색하다, 1911년 서울 종로의 한남서림(翰南書林) 주인에게 <금강경>을 받은 후 불법(佛法)과 인연을 맺는다. 3.1 독립운동에 참가한 후 북간도로 가서 김좌진 장군 휘하의 북로군정서에 입대해 무장구국투쟁에 나섰다.

 

사관훈육부와 사관학교를 수료한 뒤 중국 베이징으로 거처를 옮겨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전국빈 의사와 상의하여 국내에서 사관생도 후보생을 모집하기로 하고 극비리에 귀국했다. 이때 일경(日警)의 추적을 받아 산중에 피신했다 불교와 더욱 깊은 인연을 맺었다. 이때 소천스님은 <금강경>을 다시 읽고 깨달음을 맛보았다.

 

1935년(39세)에 <금강경강의(金剛經講義)>를 간행하고 각지를 순회하며 설법을 했다.

 이때부터 ‘신법사(申法師)’라 별명으로 불렸다.


일제의 폭압이 더욱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1941년 경기도 파주에 토굴을 짓고 은둔에 들었다.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민중의 각성을 촉구하는 운동과 함께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해방 후 좌.우익의 극심한 대립을 목격한 스님은 자칫하면 민족이 위기에 처할 수 있음을 간파하고 이를 막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바른 정신> <독립의 넋> <인류업행개조운동> 등의 저술을 지었지만, 출판은 하지 못했다. 1950년 8월 한국전쟁 발발후 <진리도(眞理刀)>라는 책을 펴냈다.

 

1952년 부산 범어사에서 용성(龍城)스님을 은사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출가했다.

56세라는 늦은 나이에 출가를 한 것이다. 범어사 선원에서 정진하던 스님은 1953년 부터 국민계몽운동에 나섰다. <금강경>을 번역 출판한 뒤 130여회의 강연과 법회로 중생들을 깨달음의 길로 인도했다. ‘금강경독송구국원력대(金剛經讀訟救國願力隊)’를 조직한 것도 이 무렵이다.

 

스님은 정화불사 당시 적극 동참하여 ‘불교정화.국민자각.정법호지’ 운동을 펼쳤으며, 1955년에는 총무원 초대 교무부장에 취임했고, 서울 대각사.경주 불국사.구례 화엄사 주지를 역임했다.

1965년부터 인천 보각사에 주석하며 참선과 전법 운동에 전념한 스님은 1978년 4월15일 부산 범어사에서 원적에 들었다. 법납 27세, 세수 83세. 부도는 범어사에 모셨다.

 

<활공원론(活功原論)>.<근본진리에서 본 구세방략(救世方略)>.<금강경과 각운동(覺運動)>.<반야심경강의(講義)>.<원각경강의> 등의 저서를 다수 남겼다. 법명 소천(韶天)을 노년에는 소천(昭天)이라고 썼다.

출가 이전의 호는 소천(素天)을 사용했고, 출가 후에는 소소(簫韶)와 의탁(宜倬)을 사용했다.

소천스님 제자로는 창봉(蒼鳳) 법종(法宗) 일파(一波) 일천(一泉) 정영(靜影) 정우(靜宇). 지철(智徹) 고봉(古峯) 고담(古潭) 고원(古園)스님이 있다.


[불교신문 2544호/ 7월25일자

 

 

낙안당낭백대사탑 樂安堂郎白大師塔.

설화의 주인공으로 1719년 원적에 드신 스님으로 추정한 듯 하며, 탑신에 새겨진 신축 辛丑(1781, 1841, 1901)년은 대좌로 보면 오히려1901년에 조성된 부도로 보입니다.


설화 내용은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조엄의 전생으로 전하는군요.


"선시대 후기 범어사낙안 낭백(樂安郎白) 스님이 있었다. 1719년 무렵에 사중에서 활동했던 일이 기록되어 있으니, 역사적으로 실제 활동했던 분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당시는 이른바 숭유억불로 인해 불교가 여러 가지로 제약 받던 시절이었다. 범어사가 있는 동래를 다스리는 부사(府使)는 특히나 불교를 싫어하여 관권을 이용하여 무려 270여 종이나 되는 엄청난 잡역을 부과함으로써 범어사의 스님들을 괴롭혔다. 출가자의 본분인 수행뿐만 아니라 사찰 운영에 필요한 여러 가지 행사며 일이 있는데 이처럼 과중한 잡역까지 해야 하니 많은 스님들이 절을 떠나버려 자칫 빈 절이 될 지경까지 이르렀다.

낭백 스님 역시 잦은 노동에 시달려 새벽예불도 잘 올리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일단 절을 떠나 동구 밖 산비탈을 개간하여 오이와 감자를 심어 주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 밤이면 늦도록 촛불을 켜고 짚신을 삼아서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보시하였다. 스님은 여러 켤레의 짚신을 길가 나뭇가지에 걸어 놓아 아무나 가져가 신도록 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인근에 낭백 스님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고, 지나가다가 밭일하고 있는 스님을 보면 걸음을 멈추고 합장하곤 하였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관가의 부당한 처사는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출가자의 신분으로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다만 매일같이 부처님 앞에 나아가 “하루라도 속히 이 생을 마치고 내생에는 벼슬에 올라 스님들로 하여금 수행에 전념할 수 있도록 나쁜 제도들을 없애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빌 따름이었다.

이렇게 몇 년이 지났다. 스님은 이제 때가 온 것을 직감하였다. 갖고 있던 모든 것을 주위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준 다음 범어사로 올라갔다. 법당에서 온 종일 참선에 든 다음 날, 한 행자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제 갈 때가 되었네. 내 몸은 굶주린 범에게 보시하고 갈 테니, 앞으로 25년 뒤 절의 잡역을 없애고 불사를 하는 관리가 있거든 그 사람이 바로 나라고 알아라.”
스님은 그 길로 산속으로 들어가 범에게 몸을 던졌다. 며칠 뒤 남은 주검을 사람들이 발견하고 절에서 다비했더니 사리가 나와 부도에 모셨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동래 부사로 약관 24세의 젊은 관리가 내려왔는데 그의 이름은 조엄(趙曮, 1719~1777)이다. 조엄은 훗날 대사헌, 대사간, 이조판서 등 고관이 되었으며 영조 임금을 도와 재정의 건전화와 여러 시책을 이루어내는 업적을 쌓은 인물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그가 지금까지 기억되는 것은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올 때 그곳에서 보았던 고구마를 들여와 보급하여 구황(救荒) 작물로 재배시켰다는 점일 것이다. 이후 고구마는 흉년이 들거나 보릿고개 때 사람들의 허기를 달래주는 요긴한 작물이 되었다.

그런데 그가 스무 살의 젊은 나이에 과거에 합격한 뒤 얼마 후 동래부사가 되어 부임한 것이다. 관내를 두루 순시하던 조엄은 하루는 범어사에 가게 되었다. 동구 밖에 도착 해서 오이밭과 감자밭을 지나게 되었는데 이상하게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향수 같은 것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처음 와본 것인데도 마치 자신의 땀이 배어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더욱 놀라운 일은 범어사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분명 범어사에는 처음 왔는데도 여기가 자기의 집이라도 되는 양 그렇게 마음이 편해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더니 가장 먼저 금강계단(金剛戒壇)에 올라가 절을 드리는데 그 모습이 수십 년 간 불공을 드린 스님 못잖게 자연스러웠다.
금강계단에서 내려온 조엄은 절의 주지를 비롯하여 여러 스님들과 자리를 같이 해서 절의 사정을 들었다. 과중한 잡역으로 스님들의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라는 얘기를 듣고 그 즉시 면제해 주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사찰에 필요한 여러 가지 불사를 돕겠다는 약속도 하였다. 그런데 범어사 스님들 가운데 노장 스님이 있어서 조엄의 얘기를 들어보니 24년 전 낭백 스님이 입적하며 남긴 서원과 흡사한 것을 깨달았다.
기이하게 여긴 그 스님은 조엄에게 나이를 물어보니 스물네 살이라 하지 않는가! 스님은 놀라며 조엄을 향해 절을 드렸다. 조엄이 놀라 까닭을 물어보았더니 예전 낭백 스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제서야 조엄은 자신의 전생이 바로 낭백 스님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범어사 입구의 오이밭이며 감자밭이 다 자기가 손수 가꾸던 것도 그제야 기억이 나 무한한 감회에 젖어 들었다. 그 뒤 조엄범어사의 불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커다란 보탬이 되었다고 전한다.


巡相國趙公嚴革祛寺弊永世不忘壇 (순상국조공엄혁거사폐영세불망단)

역사상 실존했던 인물인 조엄(1719~1777)이 경상도 관찰사를 지내며 범어사를 둘러싼 폐단을 혁파했다고 전한다. 범어사에서는 이를 기리며 단을 세우고 비문을 짓는데 위의 글은 이를 탁본한 것이다."

출처...현대불교 미디어센터 ⓒ 2005>

 


당호를 새기지 않았습니다.

 

 

○○당○○대사탑 ○○堂○○大師塔

명문(康熙五十四年甲午)에 1714년 으로 추정 된다고 합니다.

 


당호를 새기지 않았습니다.

 

 

나운당치홍방광탑 蘿雲堂致弘放光塔.

1905년, 범어사 괘불도 화기에 등장하는 스님으로, 조성시기는 일제강점기로 생각됩니다.

 

 

회현당석전대선사방광탑 晦玄堂錫佺大禪師放光塔.

 

1905년 조성된 범어사 괘불도 화기에 본사산중시주대덕 本寺山中施主大德 명단 중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1900년대 범어사 금어선원 소개 글

"회현석전(晦玄錫佺) 스님이 중심 된 23인의 선객이 모여 원효암에 원효선사(元曉禪社) 개설"이라는 글이 보여, 20세기 초반 범어사에 주석하였으며, 부도는 일제강점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금계당성율대화상서기탑 錦溪堂性律大和尙瑞氣塔.

1882년에 조성된 범어사대웅전석가영산회상도 梵魚寺大雄殿釋迦靈山會上圖 화기에 산중대덕질山中大德秩에 성율性律스님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조성시기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초로 추정됩니다.

 

 

혼해당찬윤대사방광탑 混海堂瓚允大師放光塔

 

1905년 조성된 범어사괘불도 화기에 도화주 비구혼해 찬윤都化主 比丘混海瓚允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또한

1900년 범어사 금어선원 소개 글

"내원선사의 발기인은 혼해찬윤 스님"글로 판단컨데 1900년대에 범어사에 주석하였으며

계축癸丑 명문으로 1913년에 조성된 부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화당성규대사방광탑 雨華堂晟奎大師放光塔.

1882년 범어사대웅전석가영산회상도 梵魚寺大雄殿釋迦靈山會上圖 화기에 등장(化主比丘晟奎)하는 스님입니다.
따라서

정유 8월 丁酉 八月 명문은  1897년으로 추정됩니다.

 

 

보영당재총탑 普暎堂再摠塔.조선후기

 

 

선계당수화탑 仙溪堂守和塔

1817년에 조성된 범어사제석신중도 梵魚寺帝釋神衆圖화기에 등장하는 스님입니다.
따라서, 19세기에 조성된 부도로 추정됩니다.

 

 

송호당전흡대선사탑 松虎堂典洽大禪師塔.

1905년 조성된 범어사 괘불도 화기에 별화주질 송호전흡 別化主秩 松虎典洽 기록이 있습니다.

따라서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부도로 추정됩니다.

 

 

화양당섭문대사탑 華陽堂攝文大師塔.조선후기

 

 

금하당광덕대선사사리부도金河堂光德大禪師舍利浮圖(1927~1999)

 

반야의 지혜로 세상을 밝히다

 

1927년 (음)3월 3일 출생

1950년 부산 범어사 입산 , 동산선사를 은사로 득도

1956년 9월 16일 대각회 창립, 초대회장

1965년 9월 봉은사 주지           대학생불교연합회 창립. 초대 지도법사

                                          봉은사에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수도원 설립

1971년 11월 25일 조계종 총무원장 직무대행

1974년 3월 25일 재단법인 대각회 이사장

          9월 1일  종로구 봉익동 대각사에서 불광회 창립

          11월 1일 순수불교포교지 월간 '불광' 창간. 발행인

1975년 10월 16일 불광법회 창립

   86년 10월 18일  불광 유치원 설립

   92년 5월   12일  재단법인 대각회 이사장

   94년  11월 27일  불광원 개원

   99년  2월  27일  열반

 

군복무시절 나의 법명 선과善果를 주신 스님 입니다.

 

 

동주당벽파대선사사리탑東州堂碧坡大禪師舍利塔(1929~2001)


행장

벽파스님은 불기 2483년(서기 1939년) 음력 9월6일 충남 아산군 비방면 세교리에서 태어났다. 부친 서회록, 모친 여산 송씨 사이에서 7남매 중 장남이다. 어릴 때 이름은 경수. 20살이 되기 전, 그는 불교에 깊은 생각을 갖게 됐다. ‘부모님의 길러준 은혜는 장차 힘써 갚아야하겠으나 불교의 미묘한 진리를 구해야하지 않겠는가. 어찌 장년의 나이가 되어서도 표주박처럼 매어서 티끌 세상에 막혀 있으리오’ 하고는 마침내 1959년 세속을 떠났다.

 

청담스님, 경봉스님을 찾아 뵙고 불교의 깊은 이치를 묻고 불국사에 가서 제운(齊雲)스님에게 득도하고 사미계를 받고 벽파라 이름했다. 1963년 범어사 전문강원에서 대교과를 이수했으며 그 해 구족계를 받고 동산스님에게 입실(入室)하여 동주(東洲)라는 법호를 받았다. 1964년 김해 은하사 주지, 1971년 학교법인 원효학원 이사를 역임했다. 1973년부터 1991년 사이 세 차례 범어사 주지를 맡았다(73년 9월~75년 6월, 1977년 5월~78년 5월, 90년 4월~91년 11월). 1974년 학교법인 금정학원 이사장을 역임했다. 이후 스님은 범어사, 수덕사, 태안사 등 전국의 선원에서 안거 정진하면서 선지(禪旨)를 깊게 했다.

1988년 학교법인 원효학원 이사장 및 동국대 이사(2001년까지), 1990~92년 부산불교연합회 회장, 1995년 조계종 법규위원장을 역임하고 보현장학회를 설립, 이사장을 맡았다. 1999년 사회복지법인 보현도량을 설립하고 이사장에 피임(被任)했으며, 부산불교교육대학 이사장을 맡았다.

2001년 9월26일(음력 8월10일), 범어사 금강암에서 열반에 들었다. 세수 63세, 법랍 42세.

(출처/불교신문)

 

 

 

관조당觀照堂


"1943년 경북 청도에서 태어난 스님은 14세에 범어사로 출가해, 17세인 60년 성국이란 법명으로 사미계와 보살계를 받고 66년 해인사에서 관조라는 법호를 받았다 66년 해인사 승가대학 대교과를 졸업하고 73년과 74년 승가대학 제7대 강주를 지내며 법화경과 서장, 방거사 어록을 번역했다. 78년부터 산사와 자연을 통한 불교적 이미지를 전달하는 '영상포교'에 진력했다.

2003년 발간한 '한국의 꽃살문'은 2005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한국의 가장 아름다운 책 100선정되기도 했다

(출처...중앙일보)

 

 

명진당 덕산 대선사 明眞堂德山大禪師.1986년

 

나이 90세(1986년)이르러 늙어 병들어 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지 않으려고 천화(遷化)하신 스님입니다.

천화는 열반의 이칭 입니다.

 

덕산스님은 금정산 깊은 산속에 열반 장소를 선택하고 자신을 감추고, 천화하였으며,
3개월 후 등산객이  발견하였다고 합니다.


 

 

무진당대종사無盡藏大宗師

 

1932년  제주에서 출생
1956년 부산 범어사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사미계
1960년 부산 범어사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하였다.
1987년 국민훈장 동백장

1980년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제2대 포교원장 취임
1989년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제4대 포교원장 취임


2007년 조계사 원로의원으로 추대
2008년 대종사 품계
2010년 조계사 회주로 추대
2013년 9월9일 원적

 

 

부도 주인공의 행장을 모두 찾지 못하여 아쉬움이 남으며

또한 담해당덕기(1860~1933)대선사방광탑(湛海堂德基大禪師放光塔)’ 사진을 놓쳐 다음에 다시 들려야 하겠습니다.

 

2019.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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