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보은군

보은...속리산 수정봉 석탑부재

임병기(선과) 2019. 4. 2.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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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발간 한국의사지에 사내리사지23으로 비정한 구역으로 수정봉 정상이다.

금동미륵대불 뒤편 등산로를 따라가면 쉽게 접근 가능하다.

(예전에는 출입금지 현수막이 있었으나 이번에는 철거되고 없었다.)


 

거북바위 직전 암반에 수정봉을 비롯 각자가 확인된다.


 

관찰사 이석규 (역임:1821~?)

령중추부사 이유원(역임:1865~?)


 

수정봉


 

거북바위

수정봉 정상에서 법주사 반대편 산자락을 응시하고 있다.

바위 중앙에는 구멍이 남아 있다.


 

거북바위 목이 잘려 봉합 흔적이 남아 있다.


거북바위 전설

옛날 중국 당나라 태종이 세수를 하려는데 세숫물에 큰 거북 그림자가 비쳤다. 이상하게 여긴 태종이 유명한 도사를 불러 물어보니도사가 동국명산에 큰 거북이의 물형이 당나라를 향하고 있어 당나라의 많은 재보와 인재가 동국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사람을 보내어 동국 방방곡곡을 탐색해서 큰 거북 모습의 물형을 없애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에 당태종은 사람을 파견하여 동국명산을 샅샅이 탐색하여 속리산 수정봉의 돌거북을 발견하게 되고 그 목을 자르게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위에 10층 석탑을 쌓아 거북의 정기를 눌렀다고 한다. 그래서 거북이의 목이 잘려지고 석탑에 짓눌린 형상의 돌거북이 되었다고하는 얘기가 전해진다.


다른 하나는 임진왜란 때에 명나라 장군 이여송이 거북바위의 목을 베어 버렸다고 하는 얘기가 전해온다. 그 후 1653년 효종 때 이 얘기를 알게 된 목천군수 이두양은 각성이라는 스님을 시켜 거북의 머리를 찾아 붙이도록 하고 목 부위에 받침석으로 머리를 받치게 하여 이에거북의 머리가 제자리를 찾긴 했으나 목을 이은 흔적은 지울 수가 없어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그 뒤 1655년에 이 사실을 안 병마절도사 민진익이 충청관찰사 임의백과 상의하여 거북 등에 놓여 있던 석탑마저 허물어 버렸다고 한다.(속리산사실기비)


왜 석탑 도괴의  명분을 쌓기 위한 이야기로 들릴까?



속리산사실비각

조선 현종 7년(1666)에 건립된 석비로 성리학자 우암 송시열이 속리산에 얽힌 단편적인 이야기를 기록해 놓은 것이다. 비문은 당시 명망이 높았던 우암 송시열이 짓고, 동춘당 송준길이 글씨를 썼다. 특히 수정봉 마루에 있는 거북 바위에 대해서는, 머리를 서쪽으로 두고 있는데 중국인들이 중국 재물이 우리나라로 들어온다 하여 그 머리를 자르고 거북의 등에 10층의 탑을 세웠다고 하는데, 이것을 효종 4년(1653)옥천군수 이두양이 다시 머리를 잇게 하였다. 그후 충청병마절도사 민진익이 관찰사 임의백에게 일러 탑을 헐어버렸다는 사실이 적혀 있다. 당시 지식인들이 숭명사대의 명분으로 불교를 억압하였음을 알려주고 있다.또한 세조가 이곳에 행차한 사실 등을 적고 있다.



거북바위 중앙 홈

(석탑지?)


 

석탑재

거북바위 아래  평탄한 암반위에 초층탑신석 2매, 기단갑석 부재 1매가 흩어져 있다.


 

기단 면석(1)

2매로 결구된 부재의 하나로 옆으로 놓여있다.


 

우주

두면의 우주를 함께 모각하였다.



기단면석(2)

양우주와 탱주가 모각되어 있고 중앙에 사리공을 마련하였다.

(기단 갑석 부재에도 사리공이 있어 면석과 갑석 사이에 사리공이 안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단 갑석

뒤집혀진 상태이며, 부연이 있다.

안쪽에는 정치하게 다듬은 홈으로 추정되는 흔적이 있어, 사리공이 면석과 갑석 사이에 놓였음을 짐작 가능하다.

 

 


암반위의 석탑이 대부분 그러하듯 비보 목적의 석탑으로 생각된다.

즉, 행주행국으로 알려진 법주사 풍수 비보책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며, 조성시기는 고려전기 추정된다.

속리산사실기비에 실린 10층 탑 이야기는 의문이 들며, 유학자들의 석탑 층수 계산의 이해 부족 아닐까?

물론 근거 없는 추측이다.



현장에서 관심사항

중석 중앙부분 안쪽을 사절한 이유이었으며 결론을 도출하지 못하고 하산했다.

중석 2개부재 모두 양안쪽 부분이 사절 되어 있다.

개인적으로는 탱주를 별석으로 끼워 넣기 위한 용도로 보인다.

왜냐하면 현상태로는 두 부재를  결구하였을 때 4면에 우주는 표현되나 2면에는 탱주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근데 탱주를 그렇게 어렵게 치석할 필요가 있었을까?)

 

 

아침 9시 부터 시작된 속리산 속살 탐방

계획했던 모든 옛님을 뵙고 범종과 운판 저녁예불 독경을 들으며 6시 50분 원점회귀

함께한 곽명기님.최석훈님과 친구분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다음날

제가 일러준 동선대로 속리산 속살 2일차 답사를 무사히 마쳤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동행하지 못해 죄송하였습니다.

 

그리고

중사자암 지륜스님 너무도 고마웠습니다.

인연

속리산의 유일한 미답처인 천황봉사지에서 다시 뵙기를 기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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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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