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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무등산 약사사

임병기(선과) 2019. 3. 23.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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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이 한 비퀴 돌았지만 옛모습 그대로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불사가 이어지는 요즈음의 사찰환경 이건만 증심사는 비켜간 듯하다.

 

2009년 글로 대신한다.

 

 

석조약사여래좌상

약함은 없지만 약사여래로 알려진 것은 1856년의 약사전 중수기록에 약사여래로 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발,육계가 낮고, 부드러운 상호

잘룩한 허리, 당당한 가슴

우견편단.길상좌

 

 

 

불신에 비해 손이 크다

 

상대석 상부에 옷주름을 표현하였다.

복련속에 화심을 새기고.

 

 

팔각중대석

 

하대석

복련과 4단 굄을 조출한 예는 흔치 않다.

 

 

 

 

 

 

운림당雲林堂

양양 미불 襄陽 米芾

아쉽게도 우측 가로 글씨를 판독하지 못했다.

 

미불米芾(1051~1107)

북송의 서가(書家)․화가로, 자는 원장(元章), 호는 녹문거사(鹿門居士)․양양만사(襄陽漫士)․해악외사(海岳外史)이다. 어머니가 선인황후(宣仁皇后)를 섬겼으므로, 과거를 보지 않고 관도(官途)에 올라 만년에 서화학박사(書畵學博士)가 되었다. 그의 그림은 미법 산수(米法山水)라는 새로운 화법을 낳았다. 미불은 또 신랄한 회화비평가이기도 했다. 글씨는 왕희지(王羲之를 배웠고, 북송4대가가(北宋四大家)의 일원이기도 했다. 대표작으로는〈촉소첩(蜀素帖)〉〈진적삼첩(眞跡三帖)〉등이 있고, 저서에『보진영광집(寶晉榮光集)』『해악명언(海岳明言)』등이 있다.

 

 

 

삼층석탑

왜색풍의 2개 석등은 여전히 그 자리에.

 

 

삼층석탑

기단석은 후보물

 

 

기단갑석과 괴임은 일석

 

 

 

2단 부연

 

 

탑신석에는 양우주를 조출하였고

2~3층 탑신석은 후보물

 

 

노반석위의 상륜부는 훼손이 심하다.

 

 

 

 

자꾸만

2기 석등이 눈에 거슬린다.

 

2019.03.17

 

아래는

2009년 글

 

 

 

증심사를 돌아나와 달구지는 약사사로 향했다. 산속 이른 아침임에도 강한 햇볕이 오늘 하루 쉽지 않을 여정을 예상케 한다.  한국 전통사찰정보에서 가져왔다. "약사암은 본래는 인왕사(人王寺)라고 하여 철감국사(澈鑑國師) 도윤(道允, 798~ 868)이 증심사를 창건하기 위해 지은 절이라 한다. 법당에는 신라시대 말기에 조성된 석조여래좌상이 안치되어 있고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3층석탑이 있어 신라 말에 창건되었다는 설을 뒷받침 한다.

 

그 뒤 1105년(예종대) 혜조국사(慧照國師)가 중창하면서 절 이름을 약사암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건물이 낡고 허물어지자, 1856년(철종 7)에 성암스님이 약사전을 중수하였고, 1905년에 선주스님이 관찰사 주석면(朱錫冕) 등 관청의 도움과 김기창, 김은수, 박태환 등의 시주로 중건하였다."

 

 

근자에 조성된 대웅전.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 고식의 기단부가 약사암의 사적을 암시하는듯 하다.

 

 

약사사 석조여래좌상. 팔각의 연화대좌 위에 봉안되었다. 광배는 없고 나발의 머리칼, 육계는 낮다. 부드러운 어깨, 잘록한 허리등 통일신라 불상 특징이 남아 있다. 삼도가 분명하고, 우견편단의 법의는 유려하게 흘려 내렸다. 수인은 항마촉지인 이다. 연화대좌는 3단으로 구성되었다. 중대석에는 안상을 새겼고, 상대석에는 앙련 속에 다른 꽃을 다시 새겼다.

 

 

대웅전 안에 봉안된 불상으로 보물 제600호로 약함이 보이지 않았지만 약사여래로 알려진 것은 1856년의 약사전 중수기록에 약사여래로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3층탑. 복원한 탑으로  기단 갑석 , 1~ 3층의 옥개석, 1층의 몸돌, 노반과 앙화는 제부재로 보인다. 뭔가 균형을 잃었다는 느낌이 드는 까닭으로 기단도 2층 기단 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갑석에는 부연이 보이고 경사가 있다. 몸돌에는 우주가 보이며 2.3층 몸돌은 복원했다. 잔존하는 부재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 탑으로 보여 대웅전에 봉안중인 석불과 동시대에 조성된것으로 보여진다.

 

 

석등을 조성하려면 기왕지사 탑과 석불의 편년을 고려하여 팔각원당형으로 하였으면 좋았겠다. 멋지게 복원한 석탑(충분한 고증을 거쳐 2기단으로 복원 문제도 남은 숙제다)의 감흥을 어지럽히는, 일본식 석등 두 기는 천년고찰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성이어서 사찰측의 결단이 요구된다.

 

2009.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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