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경주시

경주...이요당 석조부재

임병기(선과) 2017. 3. 15.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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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출지와 이요당 書出池와二樂堂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삼국유사에 실린 글 입니다.

신라 21대 소지왕이 남산 기슭의 천천정에 거동하였을 때 까마귀와 쥐가 나타나 까마귀 가는 곳을 살피라고 하였다. 왕은 신하로 하여금 그 뒤를 쫓게 했으나 신하는 연못 가에 이르러 두 마리의 돼지가 싸우고 있는 것을 보다 까마귀가 간 곳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 때 연못에서 노인이 나와 편지가 들어 있는 봉투를 건네주었다.

 

신하는 이를 임금께 올렸는데 겉봉에는 "이를 뜯어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고 뜯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라고 씌여져 있었다. 두 사람이 죽는다는 말에 왕은 봉투를 개봉하려 하지 않았으나 "두 사람이란 백성이요, 한 사람은 임금을 말하는 것입니다."라는 신하의 진언에 의해 봉투를 개봉하게 되었다.

 

봉투에는 사금갑射琴匣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에 왕은 궁으로 돌아와 금갑을 향해 화살을 당겼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곳에는 내전에서 분향 수도하던 중과 궁녀가 몰래 간통하고 있었고 이들은 왕을 살해할 흉계를 꾸미고 있었다. 두 사람은 곧 사형에 처해졌으며, 연못에서 편지가 나왔다 하여 이후 못의 이름을 서출지(편지가 나온 연못)라 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 정월 보름에는 까마귀에게 제사밥을 주는 오기일烏忌日의 풍속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 풍습은 50년대 초 까지만 해도 경주의 각 가정에서 있었다(어머니께서 직접 행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다-짚단을 윗쪽과 아랫쪽을 묶고 가운데를 벌려서 오곡밥을 넣어서 담 위나 울타리에 올려 놓아 가마귀나 까치가 먹게 하였다


위의 설화는

소지왕 재위시에는 불교가 공인되기 이전이어서 불교와 전통민속신앙의 흡습과정을 보여주는 일면으로 추측된다.

또한, 서출지의 본래 이름이 양피못이었다는 것은 본 글에서는 논외로 한다.

 

 

이요당二樂堂

임적선생이 1663년에 가뭄이 심하게 들자 연못을 파서 농사를 살렸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듬해인 헌종 5년(1664년)에 지은 ㄱ자형의 누마루 건물로 정자가 아니라  당호을 걸었다.


二樂는 논어의 " 樂, 樂. , . 樂,  "에서 즉 요산요수樂樂水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방형 지대석 위에  석등하대석과 상대석 같다.

 


지대속에는 안상을 새겼다.

 


간주석과 화사석, 옥개석과 상륜은 결실되었다.

 


본래부터 주초석?

사찰건물의 부재이었다면 용도가 궁금해진다.

 


뒤집힌 모습으로 훼손이 심하지만 복련이 보인다. 



고맥이돌

 


석등부재?

석불대좌?



팔각 석등 간주석

누하주로 사용되고 있다.

 


위사진 팔각석등 간주석의 하부재이다.

간주석 하부의 촉이 상부에 있다. 즉 뒤집힌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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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올린 후에 찾아보았더니 이요당 답사기는 2004년과 2007년에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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