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경주시

경주...남산동 동서삼층석탑

임병기(선과) 2017. 3. 14. 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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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깊도록

많은 정담과 곡차가 어울렸지만

답사객에게는 해장술 보다 해장거리 답사가 숙취를 깨워주지 않을까?

 

양피사지 동서탑

"양피사지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염불사(念佛寺) 가까운 곳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원래 이 일대는 피리(避里) 또는 피촌(避村)으로 불리었는데 일제강점기부터 행정구역의 이름을 본따 남산리 사지(南山里寺址)라 부르고 있으며, 이 절에 있는 쌍탑도 남산리사지 쌍탑으로 불리어 지게 되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에 언급된 남산사(南山寺)로 추정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절터는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양피사 터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삼국유사』1권 「사금갑(射琴匣)」조에 보면 소지왕(炤知王)의 명령을 받은 장수가 까마귀를 따라가다가 남산 동쪽 기슭에 있는 피촌(避村) 또는 피사촌(避寺村)에 이르러 두 마리의 돼지가 싸우는 것을 한참 동안 보고 있다가 까마귀 간 곳을 놓쳐 버렸다. 당황한 장수가 못가를 헤매고 있는데 못 속에서 노인이 나타나 글을 주기에 가져다가 임금님께 바쳤다 라고 실려있다.

 

이곳 쌍탑 동쪽에는 지금도 못이 있다. 마을 사람들은 못 이름을 '양기못'이라 부르고 있는데 옛 기록에는 양피못(讓避堤)으로 적혀 있다. 피촌(避村)이란 피리와 같은 말이고 양피못은 양피사 곁에 있는 못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삼국유사』의 「사금갑」에서 노임이 글을 갖고 나왔다는 서출지(書出池)는 바로 이 양피못인데, 지금은 그 이름이 다른 못과 바뀌어져 버린 것이다. 부근에 사는 노인들 중에는 일제강점기에 못 이름을 바꾸어 놓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 이들도 있다."...출처/다음

 

서출지의 본래 이름이 양피못이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검증을 거쳐 문화재 명칭도 양피사지 동서삼층 석탑으로 고쳤으면 좋겠다,

 

 

서탑

2층기단의 3층 석탑으로  상륜부는 노반만을 남기고 결실되었다.
하기단은 저석과 중석을 같은 돌 4매로 구성하였으며, 하대 갑석 역시 4매석으로 윗면에 2단 괴임을 조출하였다.

상기단의 중석은 4매로, 탱주 1주, 양우주를 모각하였고 팔부중을 모셨다. 
갑석에는 부연을 표현하였고, 상부에는 각형 2단 받침을 조출하였다.

갑석은 2매 판석, 탑신과 옥개석은  1매 부재,, 옥개석 층급은 5단이며 절수구가 표현되었다

낙수면 물매는 깊고 처마의 반전은 부드럽다.

탑신에는 우주를  모각하였다.

 

 

상하기단부

 

 

상층기단면석의 팔부중

 

 

 

옥개석 층급받침

 

 

 

 

동탑.

통일신라시대 9세기 석탑계 모전석탑으로 석괴형 기단부는 흔치 않다.

지대석  8개의 기단석을 엇지게 조적하여 괴체형 단층기단을 형성하였다.

기단 윗면에는 별석의 각형 3단 굄을 마련하여 탑신부를 받치게 하였다.

탑신부는의 탑신과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부재로 이루어졌으며, 탑신에는 우주,탱주가 생략되었다.

옥개석의 받침은 초층에서부터 5*5*·4단, 낙수면은 초층에서부터 7*6*5단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륜에는 노반만 보인다.

 

 

 

기단

 

 

별석괴임

 

 

옥개석 층급받침

 

 

비슷한 기단부를 가진 석탑

 

 

경주. 서악리 모전석탑(2016.05.05)

 

 

경주. 남산 용장계 못골 모전석탑(2013.03.31)

 

 

부산 기장. 석탑사 석조부재(2014.12.20)

해가 지고 들렸었다.

선여사지로 전하며 사진 우측의 석탑재를 석괴형 기단부로 추정한다.

 

 

해장거리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숙소를 나오면서 다시 찾은 석탑

이른 아침과는 전혀 다른 느낌입니다.

 

모광고 카피가 떠오른 것은 왜일까?

좋은데

참 좋은데

뭐라고 말은 못하겠고...

 

2017.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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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2004.04,27 글이다.

 

경주를 탐승할 때마다 늘 느껴지는 두려움,아니 경외감의 근원은 무엇일까?
조용한 듯 하면서 일순간 뇌리를 휘감는 회오리 바람,한가로운 수면 아래 깊은 심연의 소용돌이 라고 겁없이 자문자답하면서 자위하지만 맘의 평화는 커녕 갈등의 골만 깊어지는 것은 왜일까?

늘 답사의 출발점만 있을 뿐 피니쉬 라인은 보이지 않고 42,195km를 수 많은 관중의 환호와 갈채를 받으며 달려 왔다고 여기며 돌아보면 그 지리를 맴돌고 있는 기분은 경주만의 매력,아니 마력이지 않는가?

그랬다.
사천왕사지,망덕사지,미륵골,탑골,부처골을 답사하면서도 동남산 답사의 동선에서 늘 비켜갔던 매력덩어리의 남산리 석탑은 나에게도 첫 만남이니 첫 미팅의 설레임으로 달려가는 길에 창을 넘어오는 구수한 흙내음 똥내음이, 나를 아련히 중학교 농업실습시간으로 시계추를 돌리게 한다.

우리 농업 선생님이 그랬었다.
"자고로 농민의 자손은 똥을 좋아해야해!"
그러시면서 화장실을 푸게하는 괴로움도 있었지만,운좋게 염소 우리를 청소하는 날은 야릇한 흥분을 가지면서 염소 젓을 쪼물락 거렸던 기분 좋은 기억을 되내이며 시린 하늘과 대비대는 쌍탑 앞에 섰다.


남산리 동서탑 역시 심연을 알 수 없는 탑으로, 대본없는 연극을 관객 없는 무대 위에 올려 나홀로 연기에 몰입할 수 있는 멋진 소재를 제공해주는 탑이며,동탑은 우주와 탱주가 사라진 큼직한 8매의 방형 기단에,위층으로부터 4.5.5의 옥개석 받침,전각 반전의 생략,모전석탑의 양식인 낙수면의 층급 등 동시대의 전형과 차이를 보이나 서탑은 높이는 낮으나 기단의 장엄과,
불법수호의 상징인 팔부신상,옥개석 받침,전각의 반전등 전형을 유지하고 있어 감은사지 탑 이후 보이는 신라 전형의 동시대의 일금당 쌍탑(고구려는 삼금당 일탑,백제는 일금당 일탑)이 형식이나 크기가 같은 것과 비교하면(물론,석가탑,다보탑은 차이가 있으나 상징성이 널리 알려져 있다)그 의미를 알 수 없는 멋있는 탑이다.

왜? 석공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복고풍의 모전석탑의 형식을 취했으며,크기와 양식의 변화를 도모했을까? 이럴땐 예외없이 횡설수설이 주특기인 나의 머리는 팽팽 돌아간다. 나만의 해석,근거없는 이야기를 머릿속에 그려보는 것도 놓칠 수 없는 맛이기에...

거두절미하고 그것은 신라 석공의 멋과 끼의 발로로 여기면 어떨가? 학창시절로 돌아가보자.
공부 잘 하고 타의 모범이 되고, 품행이 단정한 학생은 멋이 없지 않은가?
모자를 수평으로,상의 단추는 두어개 열어 제치고,나팔바지에,검은 운동화에 하얀 끈을 묶은 끼있는(불량과 끼는 차이가 있다)학생을 보고 우린 멋있다고 했다.

멋이란 정형에서 벗어난,모범과는 거리가 있을 때 나타나는 것일진데,즉 남이 하지 않는 행동,외형을 취했을 때 멋이 있으니,남산리 쌍탑을 쌓은 신라의 이름모를 석공의 끼의 발로로 여기면
어떨까?

2004.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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