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경주시

경주...원원사지 석탑,부도

임병기(선과) 2015. 8. 2.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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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에 발 당군지 거의 30년이 되었군요

남들이 물어 옵니다

아직 안 가본 곳이 있냐고?

이럴때

거만하게, 어깨 힘을 주고 목소리 가성을 내며 '거의 없습니다'

(여성분에게는 최대한 부드럽게 답합니다. 니글니글)

 

하지만

아킬레스건, 야꼬 죽이는 옛님이 있지요.

 

그중의 한 곳이

원원사지 부도전 입니다

 

그래서

동행인들은 여러번 다녀온 부도전을 동선에 포함시켯습니다.

 

 

 

 

원원사지 동서탑

답사의 메카 이기에 충분히 아실 겁니다.

 

그래서

폼잡고 답사기 한 편 탈고하려고 했더니

동행인중 한 분이 학술지에 논문 준비중이어서 디테일을 피해 달라고 하는군요.

 

역사에 길이 남을 원원사지 답사기는 이렇게 사라지게 됩니다.

후학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겠지요

ㅎㅎㅎ

 

불행중 다행?

다행중 불행?

 

 

 

기단면석, 탑신석

우리님들이 너무 잘 아실테고

 

 

확 눈에 띠는 특징이 보이나요?

 

여서 잠깐!!!

우리카페 달넘새님에 대하여

 

그는 디테일입니다

저는 변방이지요

 

저는 흐름이 막힌 사방댐입니다

그는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흘러 내리는 깊은 산골에서 발원한 물길이지요

 

그는 삼국사기 입니다. 즉 정사에 충실하고 작례를 중시합니다

저는 삼국유사 이지요, 즉 잡설에 충실하고 야사에 강하다는 자화자찬이지요

 

저는 술을 즐기면서 사람을 좋아합니다. 음주가무형 입니다.

그는 술은 입에도 되지 않지만 저보다 사람을 더 좋아합니다.무주가무형입니다

 

삼인행 필유아사!!!

 

 

다시 공부합시다

교과서를 펴세요!

 

저는 그렇게 들었습니다

기단의 그랭이가 보이나요?

기단저석이 높게 조성되어 있죠?

 

적자생존!

빨리 적으세요

적는 놈이 살아나는 세상 입니다!

(김정은 위원장을 수행하는 노땅들 보셨죠?)

 

'적는 놈'?이 뭐냐꼬요?

ㅎㅎ

'필기하시는 분'의 인간적인 표현 입니다.

 

 

 

그럼

이석탑의 조성시기는

참 논문도 많다고 합니다.

 

저는 분명히 답을 알고 있습니다

통일신라시대 석탑이지요!!!

 

참 잘 난 중생이다!!

그참!

 

 

 

 

 

 

 

 

 

지금까지

저의 답사 상한선은 여기까지 이었습니다.

 

 

신라의 샘입니다.

 

 

 

서부도

하대석은 2단, 화문, 범자문을 새겨다

하대석에 비해 상대석이 크고

하대석 하단석은 부등변팔각이며, 상단의 복련, 높은 상륜괴임

 

저는

그냥 조선 후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동행했던 여자샘이 탑신 하대에서 나비를 발견햇습니다.

제눈에도 그렇게 보입니다.

글쵸?

 

그런데 말입니다.

돌아와서 사진 정리하다 보니

제눈에

오른편에 벌이 보입니다.

 

나비와 벌

그리고

 

사실이라면

뭇사람들은 극락에 지지 않은 꽃을 상징한다고 착하게 설명하겠지요

 

저는

그저 웃지요

남여상열지사의 표현이라구요!!!

 

멋은

삐딱한 시각에서 출발합니다요.

 

 

 

 

 

동부도전. 3기의 부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역시 조선시대 석종형 부도 들입니다. 동행한 님의 논문내용을 미리 밝힐 수는 없겠지요.

 

사진상 맨 오른쪽, 중앙 , 좌측 순으로 조성시기를 보면 될런지요?

 

 

이 어른이 막내스님

 

 

부도전의 서열 2위.

 

 

장자 어르신이지요

 

 

 

 

 

 

 

횡설수설, 노변정담이었습니다.

 

또하나

지명도 있는 옛님중 제가 들리지 못한 곳은?

 

2015.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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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동쪽 서라벌을 배경으로 건국한 신라는 지증, 법흥,진흥,진평.선덕여왕을 거치면서 강한 왕국을 건설했다. 불교를 통치철학으로 삼고, 화랑제도를 도입 강병을 배출하고, 김춘추, 김인문 등 걸출한 외교 전문가의 활약으로 지리적 여건의 불리함을 극복하고 최초 통일 왕국을 이루었다.

 

660년 백제 멸망, 668년 고구려 함락으로 쉽게 평정될 것 같은 정세는 당나라의 한반도 수탈 야욕으로 신라와 당나라의 전쟁이 시작된다. 당나라 군대와 직접적인 전투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이 국론 통일, 민심의 결집, 종교에 귀의었을 것이다 그 일환으로 신라 위정자들은 선덕여왕 예지 3기의 하나로 창건한 사천왕사에서 당군에 대비한 구국기도회를 개최하였다.

 

왕조와 종교 지도자들은 이른바 지극 정성으로 염불하면 적군을 물리칠 수 있다는 이른바 신인종의 문두루비법으로 당나라 수군을 수장시키게 된다. 원원사도 그런 염원이 어린  신인종 사찰로 김유신과, 신인종 종조 명랑법사의 법손들이 개창하게 되었다.

 

원원사지의 창건은 김유신 생존시기를 감안하면 673년 이전이다. 즉 신라가 완전한 삼국통일을 이루기 전으로 통일과 통일왕국의 영원한 번성을 염원하여 '원원사'로 하였을 것이다. 동해를 통한 적군의 침입 루트에 호국사찰을 세워 민심 안정을 도모하게 된다.

 

 

소나무 숲 속 흩어지기를 반복한 쌍탑. 갑갑하지는 않을까? 대인기피증은 없을까? 찾아온 이를 피할까 두렵다. 신라왕조의 멸망 이후 온갖 수모, 굴욕으로 점철된 1400년 역사가 아니던가? 사천왕상도, 하기단 면석의 십이지신상도 제역활을 못한 자책감에 수심이 가득하다. 

 

 

이 기단, 두개의 탱주 다섯개 옥개 받침,두개의 탑신받침. 통일신라의 전형을 골고루 간직한 석탑은 생채기가 심하다. 장엄보다 장식성이 강한 사천왕상, 12지신상의 탑 양식으로 미루어 원원사 창건후 한세기 경이 지난 8세기 중엽이후 조성된 탑이다.

 

 

이렇게 복원된 것도 최근의 일이다. 이전의 사적도 없지만 1800년 초 조상의 묘를 조성하려던 사대부가의 욕심으로 철저하게 파괴되어 방치되었다. 호국사찰로 산문을 연 원원사가 왜국의 후손 일본인들에 의해 부재가 수습되고 복원의 단초가 마련되었으니...

 

 

약사여래불의 권속인 십이지신상(신라석탑에서 처음으로 표현했다)은 상층기단 면석에 3구씩 새겨져 있다. 평복차림. 동물 머리 사람 몸을 한 신상은 연화대 위에 계신다. 1층 몸돌에는 사천왕상이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자세이다.

 


기생과 무덤자리는 뒤에 차지한 사람이 주인이라지만 조선시대를 통하여 철처히 파괴된 절터 모습이다.여강 이씨 정부인... 집안의 내력. 후대 발복. 누구 아는 사람 없습니까?

 팔각원당형 석등일까?  무덤앞 장명등일까?

장흥 보림사지 쌍탑 사이에도 석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무덤과 대비되어 어느절집에서 탈취해온 석등을 장명등으로 조성했다. 

 


창건 당시 조성했다고 생각되는 샘. 아직 물이 펑펑 솟는다. 혹 용이 드나들었던 감은사지 금당아래 수구와 같은 상징성은 없을까?  이런 가을날은 더구나 폐사지에서는 소설 한 편 탈고할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리라.


 

후원 숲에 숨겨진 원원사지는 머~~어~~언 옛날 이야기. 

만추로 향하는 길목에 서성이는 절집은 먼 옛날이야기를 잊어버린 듯 무색 무취의 표정이다.

 

*** 답사기에 언급된 내용은 역사적 객관성에 준한 글이 아닙니다.

2006.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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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이 지나갔으면서도 늘 지나고 나서야 아차! 하면서 놓쳤던 원원사지를 들렸다.
통일후 신라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 했겠지만 완전한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당나라의 눈치와 바다건너 왜의 약탈을 늘 걱정했던 김유신 등이 적들의 침입 루트가 되는 이곳 모화에 건립한 신인종 중심도량이 원원사지로 알려져 있다.

일전에 올렸던 나의 사천왕사지,망덕사지 답사기에서 신인종과 문두루 비법을 옮겨와 울님들의 이해를 돕도록 하겠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였지만 당나라는 신라를 삼키기 위해 마각을 드러내고 1차 공격 실패 후 2차 공격을 위해 사신으로 가있던 김인문을 옥에 가두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게 된다.

그 사실을 간파한 당나라에서 유학중이던 의상대사가 귀국 문무왕(?)에게 고하여 지극 정성 염불을 하면 소원이 성취된다는 밀교(신인종)의 문두루비법 의식을 통하여 당을 물리치기 위해 선덕여왕의 능 앞에 사천왕사를 창건하였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당나라 군사는 서해에서 수장되고 2차 공격에 실패하게 된다.

2차 신라 공격에 실패한 당나라는 신라의 호국, 비보사찰 사천왕사를 확인 및 절을 폐쇄하기 위하여 사신을 파견하였고 신라에서는 망덕사지를 창건하여 사천왕사라고 하여(물론 뇌물과 미인계를 겸했겠지만) 당의 사신을 무사히 돌려보냈던 것이다."

원원사지를 들리면서 호국사찰을 떠올리지 않는 것도 문제이겠지만 원원사지 쌍탑을 보고싶다는 욕심이 더 발길을 재촉하게 한다. 어느 누구는 탑을 보러가면 계절마다,하루에도 아침,저녁이 다르며 눈오는 날, 비오는 날,분위기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고 하지만 나에게는 심미안은 언감생심이나, 개인적으로는 노을지는 무렵의 탑이 그것도 폐사지의 탑이 가장 마음을 사로잡는다.

가을이 익어가는 산길을 한참이나 올라 가니 하늘만 바라보며 농사를 짓는 산골 좁은 천수답에 스님들이 추수에 분주하는 모습은 익숙한 모습이지만 트랙터를 비롯 기계로 추수를 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전경이라 한동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산지가람이 다 그러하듯 높은 축대를 올라가면 그리 넓지 않은 소나무가 애워싼 가람터에는 화사석이 사라진 팔각 원당형의 신라전형의 석등과 동서탑이 일자로 나란히 자리하고 있으며 금당터가 뒤쪽에 있다. 이는 일반적인 탑과,석등의 배치와는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통은 앞뒤 배열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삼층석탑은 기단,옥개석 받침,우주,탱주등 통일신라시대 이형석탑의 전형양식을 따르고 있는 탑으로, 마모,멸실이 심한편이며, 상륜부도 노반과 앙화만 보인다. 기단 면석에는 각면에 3개씩 12지신상이 사람의 머리, 평상복의 천의,동물의 머리를 하고 연화대좌위에 조각되어 있어(신라탑에 12지신상이 최초로 보이는 것이 원원사지 탑으로 알려져 있다.),


 김유신 묘에서 보았던 12지신상이 떠올라 같은 장인의 작품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지만 비교할 만한 지식도,안목도 내게 없음이 즐겁다?또한 탑의 1층 몸돌에는 동방 지국천왕,남방 증장천왕,서방 광목천왕,북방 다문천왕이 지물을 들고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자세로 두드러지게   표현되어 있어 눈길을 잡았다.   

내게 허락된 시간이 많지 않아 주위의 부도를 돌아볼 생각도 크게 없었지만 탑과 금당터 사이에 보이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석조부재에  의문이 생겨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즉,그 위에 전각이 있었다면 탑과의 간격으로 인해 지붕을 세울 수 있는 공간이 없으며 회랑의 흔적이라 여기기엔 금당 정면에 회랑을 세운 사례를 내 얄팍한 지식으로는 알지 못하며,굳이 금당을 가리우며 회랑을 세울리도 만무하지 않는가?

그때 내눈에 들어오는 무덤 한 기...   
석조부재가 둘러 쌓인 장방형 터 한가운데, 즉 금당 정면에 자리잡은 "정부인 여주 이씨 지묘"에서 터무니 없는 실마리를 잡아보면, 불교가 배척을 받던 조선조 이지방의 어느 대가집 마나님의 묘를 명당인 원원사지 터에 자리잡으며 장대석을 깔고 쌓았던 것이 아니겠는가?

과연 당대에, 아님 후대에 발복을 이뤘는지는 알 수 없지만...

2004.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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