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만에 아주아주 오랫만에 뵈러 왔더니 어제 내린 비로 인해 뚜렷히 나투시어 계신다.
막 목욕탕에서 나온 풋풋한 아가씨의 향이 날 듯하다. 불경일까?
그런데 점빵문을 열고 보니 역마살방에 달넘새님이 백화점을 오픈하여 눈물을 머금고 사진만 올린다. ㅋㅋ
설명문은 달넘새님 글을 뚱쳐왔다.
이 마애불의 특징은 아래와 같다.
1.본존불 머리에 중간계주가 표현되어 있다. 이 마애불의 가장 큰 특징이다
머리중앙에 작은 구슬모양의 중간계주가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중간계주는 중국에서의 최초의 작례는 병령사 석굴 제5호감실 (713~765)에서 보인다. 국내에서의 작례는 9세기 후반경에 나타나는 듯 하다.
그 이유는 곡성 대안사 적인선사조륜청정탑비에서 ‘부도(浮’屠)라는 명칭이 최초로 보이는 것과 같이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비문에도 ‘계주(戒’珠)’라는 표현이 최초로 보여 그 사례가 된다.
불상에서는 먼저 철불에서 보이는데 그 작례는 서산 전보원사지 철불 (10세기 극초반 : 추정 )에서 보이고 하남하사창동 철조여래좌상( 10세기 초반 : 추정 )에서 보인다.
석불에서는 진주 고산암 석조비로나자불좌상(10세기 초 : 추정 )에서 보이고
마애불에서는 광주 운천사 마애여래좌상(10세기 초중반 : 추정)에서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중간계주의 표현은 동천동 마애불에서 중간계주를 찾을 때까지만 해도 경주지역을 벗어난 위와같은 사례의 지방화적인 특징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5년 전 어느 날, 비가 온 다음날 우연히 이 동천동 마애불을 답사하다가 뜻밖에도 평소에 보이지 않던 중간계주를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잘못봤나 싶어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틀림없는 중간계주였다.
그것은 분명한 발견이었다. 이 발견으로 인해 이러한 중간계주의 표현도 경주지역에서 시작하여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간 것으로 개인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렇게 비가 온 다음날은 중간계주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지만 그 외의 날들은 잘 안보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러한 중간계주를 언급하는 자료는 그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보니 조성시기도 막연한 통일신라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중간계주의 존재를 등한시 했던 것이다.
2. 본존불의 머리는 소발이며 머리와 육계가 불분명하다. 이러한 머리의 표현은 머리와 육계가 일체형의 표현이며 머리 위에는 반구형의 넓고 높은 육계가 표현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한다.
3.본존불 얼굴 양쪽에 마치 귀를 덮고 있는 모자를 쓴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표현은 아주 큰 귀가 조식되어 있는걸로 보는 것이 좋을듯하다.
4.본존불의 수인은 왼손은 가슴 아래에 있으며 수인은 박리가 진행되어 알 수가 없고 오른손은 위로 들어 올려 엄지와 검지를 맞닿았다.
해서 아미타구품인 중 하품상생을 하고 있는 아미타여래 좌상이다.
5.좌협시보살은 박리가 심하게 진행되어 보관모습만 보일뿐 나머지 부분은 불분명하다. 보관에는 화려한 화문에 새겨져 있으며 보관 중앙에는 화불 형상이 희미하게 보인다. 해서 존상은 관음보살상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6.우협시보살은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으며 보관 중앙에는 정병이 표현되어 있다. 목 아래에는 3개의 구슬로 이루어진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으며 천의자락은 매우 화려하게 치장하고 있으며 허리에서 원형의 고리형으로 매듭이 져 있다. 보관의 정병의 표현으로보아 대세지보살이 분명하다.
7.대좌는 오른쪽 하단에 희미하게 앙련이 보이는걸로 보아 전체적으로 앙련이 조식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8.양쪽 협시보살 머리위에는 방형 홈이 2개가 뚫려있다. 이러한 방형홈은 그 시기 목조건물 전실의 흔적이 아니다. 후대에 누군가가 방형 홈에 작은 불상을 안치해서 치성을 드리던 목적으로 새긴 인위적인 구멍으로 추정된다.그 이유는 저렇게 협시보살과 가깝게 목조 전실의 기둥을 올린다면 협시불이 가려지게 되는 구조가 됨으로 전실의 흔적으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 마애불의 조성시기를 추정하기 위해서는 아래와 같은 3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1.상호에 미소가 없고 근엄하거나 엄숙하지 않으며 침울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표현은 통일신라시대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상호이며 암울했던 9세기 말의 혼란한 시대상을 반영하는 모습이 아닐까한다.
2.조각수법이 특이한데 불두는 돋을새김, 신체 선각으로 표현하여 불두를 강조했다. 이렇한 표현은 경주 남산 선각육존불과 함안 방어산 마애불보다도 좀 더 후대에 조성되었음을 나타내는 특징이다. 이러한 조각수법은 고려시대로 넘어가 고려시대 특유의 마애불 특징이 된다.해서 개인적으로는 이 마애불에서 이러한 조각수법의 최초가 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3. 양쪽 협시보살이 측면상을 하고 있는 점 이렇게 측면상을 하고 있는 마애불의 시작은 8세기 말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경주 남산 선각육존불 중 서쪽 삼존불에서 보이며 801년에 조성된 함안 방어산 마애삼존불로 이어진다. 그리고 9세기 초반경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경주 남산 탑곡마애조상군의 삼존상을 거쳐 이곳 동천동 마애불로 이어진다.
위의 내용을 토대로 동천동 마애삼존불의 조성시기를 추정해보면 아래와 같다.
양쪽 협시보살의 측면상으로 보아 경주 남산 선각육존불 중 서쪽 삼존불(8세기 후반 : 추정 )을 모본으로 방어산 마애불(801년)과 경주 남산 탑곡마애불상군(9세기 초반 : 추정 ) 그리고 경주 동천동 마애불로 이어지는 계보로 이해하고 있다. 또한 고려시대에 유행하는 조각수법인 불두는 돋을새김, 신체는 선각으로 표현된 조각수법이 처음으로 나타나는 작례로 보아 9세기 후반경에 조성된 마애불이 아닐까 한다.
해서 개인적으로는 이 동천동 마애불은 불상에서 최초로 중간계주가 표현된 마애불이며 불두는 돋을새김으로 신체는 선각으로 표현한 최초의 마애불로써 9세기 후반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015.07.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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