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동창 배기순 군과 느긋하게 산길을 오른다. 친구는 심한 감기에도 나혼자 들리는 것이 못내 내키지않았는지 기어코 동행을 하겠단다. 이런 저런 유년 시절 이야기, 고향의 문화유적 보존, 활용방안, 현안 문제 등 성주를 지키며, 고향 사랑이 가득한 친구가 마냥 부럽고, 은퇴 후 수구초심의 심정으로 고향을 찾고 있는 나자신이 부끄러웠다.
태자정 정자이름을 명명한 분이 존경스러워 보인다.
벽진면 매수동 새월마을 건너편 산자락에 위치한 태자바위. 매수동은 벽진가야의 고터로 전하며 관련되는 지명도 남아 있다. 야동冶洞은 벽진 가야의 무기, 농기구를 생산한 불무에서 유래된 지명이며, 새월마을은 한나라의 서울로도 손색이 없는 명당이지만 터가 너무 비잡이 수도가 되지 못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태자와 서울? 묘한 대비가 된다.
태자바위는 3개의 바위가 3층으로 되어 있고 그 지름은 4m 정도가 되며, 가뭄 때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온다는 이야기가 조선왕조실록에도 등재되어 있다.
두번째. 대가야의 태자가 벽진가야에 인질로 와서 여기에 주로 머물며 대가야로 돌아가기를 바라다가 여기서 죽고말아 태자 바위로 불리었다고 한다.
세번째. 벽진가야碧珍伽倻의 태자가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고 즐기던 곳이라 하여 태자암이라 한다
합천 월광사지 동서탑
월광태자에 관해서는 다른 이야기도 전한다. 신라 법흥왕 8년에 대가야의 이뇌왕異腦)이 신라와 수호하기 위해 신라에 청혼하고 신라의 이식비조(異殖比助)의 누이를 아내로 삼아 월광태(月光太子)를 낳았으며, 진흥왕 12년에 신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니 월광태자는 어머니와 함께 지금의 고령 낫질[현(現) 고령 내곡(高靈 乃谷)]에서 피난하던 중 때마침 진흥왕이 전투 상황을 살피기 위하여 이곳까지 왔다가 피난 중인 태자를 축출하니, 태자는 쫓겨 합천군계 나대羅帶峴 고개에서 영면永眠하였다.
그 후 태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현재 태자암이 있는 곳에 월광사月光寺를 세웠는데 퇴폐하고 현재 남아 있는 3층 석탑이 태자암이라 한다.
태자정 앞으로 벽진들녁이 눈앞에 전개된다. 고려 건국에 중요한 역활을 담당한 벽진 장군 이총언, 왕건, 월광태자, 태자바위, 성산가야, 대가야를 아우러 흥미진진한 스토리텔링 한 편 탈고하여 역사관광자원으로 활용하면 좋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주지역에 전해오는 전설, 설화의 현장을 데이터베이스하는 과제도 시급해 보인다.
세월은 사람을 오래 기다리지 않는다. 어르신들이 귀천하신 후에는 그 많은 이야기거리, 민담은 사라질 것이 명약관화하지 않은가? 오늘의 현실과, 그시절 숨은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참외 재배 비닐하우수의 은빛 물결이 바다를 이루고 있다. 2015.02.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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