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고창군

고창...선운사 도솔암

임병기(선과) 2012. 5. 17.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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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 도솔암 가는 길. 상사화는 가슴에 담았습니다. 단풍은 머릿속에 그렷습니다.  춘흥에 젖은 선남선녀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달구지 속도를 줄였지만 미안하기만 했습니다. 먼지가 뽀얗게 뒤를 따라오는 길은 유년의 고향마을 신작로를 떠오르게 했습니다. 호젓하고 아름다운  이 길을 노래한 시가 입가에 맴돌았으나 끝내 한 문장도 기억할 수 없어 오히려 고마웠습니다. 어느해 남해 바닷가 미조에서 만났던 장흥 출신 김영남 시인의 '선운사 도솔암 가는 길'이었지요. 

 

선운사 도솔암 가는 길...김영남

 

만약 어느 여자에게 이처럼
아름다운 숲속 길이 있다면
난 그녀와 살림을, 다시 차리겠네.

개울이 오묘한 그녀에게
소리가 나는 자갈길을 깔아주고
군데군데 돌무덤을 예쁘게 쌓겠네.
아침이면 노란 새소리로 풀꽃들을 깨우고
낮에는 이깔나무 잎으로 하늘을 경작하다가
천마봉 노을로 저녁밥을 짓겠네.

가을이 되면 물론 나는
삽살개 한 마리를 데리고 산책하며
쓸쓸한 상상을 나뭇가지 끝까지 뜨겁게 펼치겠지만

모두 떠나버린 겨울에는 그녀를 더 쓸쓸하게 하겠지?
그러나 난 그녀를 끝까지 지키는 장사송(長沙松)으로 눈을 얹고
진흥굴 앞에서 한겨울을 품위 있게 나겠네.
설혹 그녀에게 가파른 절벽이 나타난다 할지라도
나는 그 위에 저렇게 귀여운 암자를
옥동자처럼 낳고 살 것이네.

 

 

선운사에서 도솔암을 올라가는 길가의 진흥굴 바로 앞에서 자라고 있다. 수령은 6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는 23m, 둘레는 2.95m이다. 높이 2m 정도에서 줄기가 크게 둘로 갈라져 있고, 그 위에서 다시 여러 갈래로 갈라져 부채살처럼 퍼져 있다.  고창사람들은 이 나무를 '장사송' 또는 '진흥송'이라고 하는데, 장사송은 이 지역의 옛이름이 장사현이었던 데서 유래한 것이며, 진흥송은 진흥굴 앞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많이 미안하다. 차량으로 달려 온 내가 미웁다. 넓은 주차장이 오히려 마음을 가득 채운다. ㅎㅎ참 이제 철이 들려나?

 

정확한 창건 연대를 알 수 없지만 선운사의 연혁을 전하는 여러 기록에 따르면 선운사와 함께 창건되었다고 한다.조선 후기까지 도솔암은 상도솔암(上兜率庵), 하도솔암(下兜率庵), 북도솔암(北兜率庵)의 세 가지로 불렸다. 상도솔암은 지금의 도솔천 내원궁을 말하며, 하도솔암은 마애불이 있는 곳, 북도솔암은 지금의 대웅전이 있는 자리를 일컫는다.이처럼 각각의 독립적인 암자였던 것이 근세에 와서 도솔암 하나로 통합되었던 것이다.

 

극락보전

나한전

 

정면 3칸 측면 1칸에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건물은 건축수법으로 보아 조선 말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나한전 내부에는 흙으로 빚은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가섭과 아난이 협시하였고, 1910년 용문암에서 옮겨온 16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조선시대 도솔암 용문굴에 이무기가 살면서 주민들을 괴롭혔는데, 이를 쫓아내기 위해 인도에서 나한상을 모셔와 이곳에 안치하자 이무기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무기가 다시 나타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이무기가 뚫고 간 바위 위에 나한전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나한전. 삼층석탑

 

 

2기단으로 추측되며 하기단은 매몰된 상태이다. 상기단 면석에는 양우주가 보이고 갑석과 초층 몸돌이 한 개 돌이다. 탑신에 양우주는 희미하고 2단의 탑신 받침을 두었다. 그 위의 부재는 훼손이 심하여 형체가 불분명하다. 고려시대 석탑으로 보여진다.

 

드디어 도솔천 내원궁에 들어서는 구나. 거리는 얼마나 될까? 뒤돌아 서고픈 마음이 굴뚝 같지만 금동지장보살을 뵙지 않고 선운사를 다녀왔다고 이야기 할 수 없기에 두 손 모아 합장 올리고 옷깃을 여미었다.

 

내원궁

 

험준한 바위 위에 세운 법당으로 상도솔암이라고도 한다. 조선 중종 6년(1511)에 중창하고, 숙종 20년(1694)에 3창, 순조 17년(1817)에 4창하였다. 거대한 바위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기단 없이 편편한 곳에 자리를 잡아 원형초석만 두었는데, 기단이 없어 건물이 낮아지므로 하인방의 높이만큼 되는 장초석 사용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 겹처마, 팔작지붕, 두리기둥을 사용하였고 2분합문을 달았다.  내원궁에는 금동지장보살좌상(보물 제280호)을 봉안하고 있다.

 

 

내원궁 앞에 마련된 좌석에 앉아 기다려도 기다려도 두 스님의 염불은 끝없이 이어진다. 그렇다고 금동지장보살을 보지 않고 발길을 돌릴 수도 없었다. 스님의 청아한 촉성이 둔탁하게 들릴즈음 어칸문이 열린다. 풀린 다리를 절룩이며 지장보살님을그렇게 뵈었다.

 

고려 후기 지장보살 그림에서 보이는 양식이다. 보살상은 선운사 금동보살좌상(보물 제279호)과 두건을 쓴 모습, 목걸이 장식, 밋밋한 가슴 표현 등에서 서로 닮았지만, 이마에 두른 띠가 좁아지고 귀를 덮어내리고 있지 않으며 용모 등에서 수법이 다르다. 일반적으로 지장보살은 다른 불상들과 달리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으며,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둥근 얼굴은 단아한 인상이며, 목에서 어깨로 내려가는 선은 부드럽다. 상체나 하체 모두가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띠를 매고 배가 들어가는 등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두꺼운 옷은 배부분에서 띠매듭을 지었고, 다리에는 간략한 몇 가닥의 옷주름을 나타내고 있다. 앉은 자세는 오른발을 왼무릎에 올린 모양으로 발을 실감나게 표현하였다. 오른손은 가슴에 들어 엄지 손가락과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있으며, 왼손은 배에 들어 작은 수레바퀴 모양의 물건을 잡고 있다.  지장보살상은 고려 후기의 불상양식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으며 우아하고 세련된 당대 최고의 작품이다.

 

 

천마봉

 

이제야 인연 지었습니다. ()()()

 

 

도솔암의 서편 암벽 칠송대에 새겨진 높이 13m, 너비 3m에 이르는 거대한 마애불상이다. 전설에 의하면 백제 위덕왕(재위 554∼597년)이 검단선사에게 부탁하여 마애불을 조각하고 동불암이라는 공중누각을 짓게 하였는데, 조선 영조 때 무너졌다고 한다. 불상은 낮은 부조로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이며, 머리에는 뾰족한 육계가 있다.


방형에 가까운 평면적인 얼굴에 눈은 가늘고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으며, 우뚝 솟은 코에 앞으로 내민 일자형의 두툼한 입술이 소박하고 익살스러운 미소를 띤 것처럼 보인다. 귀는 어깨에 닿을 정도로 길게 늘어져 있고, 목은 표현하지 않아서 상체 위에 머리를 올려놓은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상체는 방형에 가슴이 넓고 평면적이며, 결가부좌한 넓은 하체에 손과 발 역시 체구에 비해 큼직큼직하다. 투박한 두 손은 활짝 편 채 아랫배에 가지런히 붙여져 있다.

 

 

불의는 통견으로 두꺼운 편은 아니나 옷주름선이 선각으로 형식화되어 있고, 평평한 가슴 아래로 선명하고 단정한 군의의 띠매듭이 가로질러 새겨져 있다. 대좌는 비교적 높은 2단으로 되어 있는데, 상대에는 옷자락이 늘어져 덮여 있고 하대는 간략한 연꽃무늬의 연화좌로서 전반적으로 마멸이 심한 편이다.

 

 

명치께에 있는 네모진 흔적은 부처님을 완성한 후 불경과 시주자의 이름 등을 적어 넣고 돌뚜껑을 닫은 뒤 백회로 봉한 자국이다. 여래상의 머리 위에는 누각식으로 된 지붕이 달려 있었는데 인조 20년(1648)에 무너져 내렸다고 한다. 지금 마애불의 머리 위에 뚫린 네모진 구멍들과 드문드문 끼여 있는 부러진 목재, 쇠못 등은 그 흔적이다. 위압감을 주는 얼굴 표정과 대담한 선각 등으로 미루어보아 고려 시대 초 지방 호족들이 발원하여 조성한 마애불로 여겨진다.  

 

 

선운사 마애불 비기 탈취 사건...디지털고창문화대전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의 돌출부에 비기가 들어 있는데, 이 비기를 꺼내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소문이 있었다. 곧 1820년 전라감사 이서구가 마애불의 배꼽을 열어 보기 전부터 복장 감실을 둘러싼 전설이 널리 유포되었다. 이곳에는 신기한 비결이 들어 있어서 그것이 세상에 나오는 날에는 한양이 망하는데, 비결과 함께 벼락살도 들어 있으므로 거기에 손을 대는 사람은 벼락을 맞아 죽는다는 것이다.

 

이서구가 마애불 배꼽에서 서기가 뻗치는 것을 보고 뚜껑을 열어보니 책이 들어 있었는데 갑자기 벼락이 치는 바람에'이서구'가 열어 본다’는 대목만 얼핏 보고 다시 넣었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해진다. 그 뒤로도 여러 사람들이 열어 보고자 하였으나 벽력이 무서워서 열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무장 지역에서 최대 동학 조직을 가지고 있는 손화중은 동학교도들과 함께 이 비기를 꺼냈다고 전해진다.

황현 "오하기문"과,김재홍의 "영상일기"에 의하면 1892년 8월 전라도 무장현에 큰 지목(指目)이 일어났는데 도내의 유수한 두목은 물론 동학당이라면 개인까지도 잡아들여 무장 감옥에 때려서 가두었다고 한다. 선운사 마애불에 있는 비결을 훔쳐 갔다 하여 강도 행위이며 역적 모의였기 때문이다. 관헌들은 이 사건을 빌미로 동학당 영수 가겨중.오지영.고여숙 세 사람을 주모자로 몰아 사형을 선고하고 옥에 가두었는데 각지의 수천 명의 동학교도들이 이들을 구하기 위해 무장을 에워싸고 관아를 습격할 것이라며 위협하였다. 이러한 사태에 무장수령은 도망가고 죄수는 탈옥하였다. 이 일로 전라도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은 점차 심해지는데도 오히려 동학교도는 수가 점차 늘어갔다. 무장 고창 영광 흥덕 고부 부안 정읍 태인 전주 금구 등 각지에서는 이민(吏民)은 물론이고 동학에 들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동학 농민 혁명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892년 이 비결을 당시 고창에서 동학을 포교하던 손화중이 꺼냈다는 소문이 퍼지자 손화중의 접(接)에만 수만 명의 새로운 교도가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사건은 고창 지방에서 손화중이 차지하고 있던 영향력과 관련하여 그에 대한 민중들의 신뢰를 말해 주는 것이며, 손화중포에서 비결을 이용하려고 하였던 점은 추측해 볼 수는 있으나 동학 농민 혁명과 직접적인 관련 사실에 대한 근거는 없다. 그러나 당시 이 일이 얼마나 민중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다.

동학 농민 혁명 당시 손화중포가 동학 교단의 최대 세력으로 자리 잡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이다. 곧 손화중포는 고부봉기 후 동학 농민 혁명의 봉화를 올리는 데 주도적인 일을 한 부대로 선운사 마애불 비기 탈취사건은 손화중포의 조직과 이상에 힘을 실어 준 것이다. 곧 고창 지방에서 손화중이 차지하고 있었던 영향력과 관련하여 그에 대한 민중들의 신뢰를 잘 보여 준다. 선운사의 마애불 비결 설화는 당시 혼란한 시대적 정황이 마애불 안에 있는 비결로 민심들의 기원을 해결하고자 한 일단의 사건이었다.

 

 

미당의 스승인 근대의 큰스님 박한영스님의 '선운사 도솔암에 올라가다'로 마무리 한다. 선운사 관련 글은 김화영님이 엮은 '꽃이 지고 있으니 조용히 좀 해주세요'(시와시학사. 2008년)를 추천한다.

 

바다 산이 꺽어진 깊은 곳에

맑은 냇믈 너댓번 건너메라

꾀꼬리 울음 숲을 뚫고

풀 향기 길에 가득하여라

 

하늘을 찌를 듯 탑은 높은데

그 위에 도솔궁이 자리 잡았네

피리 소리 문득 들릴 때

드문드문 꽃조각 흩나리는 구나

산은 높아 태화 같은데

은하수는 삼태성에 가까워지네

뾰죽뾰죽 봉우리 올라기기 어렵고

종소리 경쇄소리 쟁쟁하여라

 

하늘 음악 반공에 올려

옛동굴의 용을 불러 일으키는구나

늙은 스님 선을 파하고

발 밖 난간 앞을 서성이네

누가 열 길 마애불을 새겼는가

마치 이마에 흰 광명 높은 것 같아서

솔은 스스로 굽어

구름에  뻩혀 푸르른데

 

걸어서 용문에 올라가니

바위 아름답고  더욱 장해라

신이 웃는 것 같고

신중의 변상과도 같네

 

찬 샘에서는 푸른 구슬을 뽑고

굴마다 메아리 울려 퍼져라

옷잡고 꼭대기 올라서니

붉은 햇살 물결 굽이치네

 

2012.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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