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 도솔암 가는 길. 상사화는 가슴에 담았습니다. 단풍은 머릿속에 그렷습니다. 춘흥에 젖은 선남선녀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달구지 속도를 줄였지만 미안하기만 했습니다. 먼지가 뽀얗게 뒤를 따라오는 길은 유년의 고향마을 신작로를 떠오르게 했습니다. 호젓하고 아름다운 이 길을 노래한 시가 입가에 맴돌았으나 끝내 한 문장도 기억할 수 없어 오히려 고마웠습니다. 어느해 남해 바닷가 미조에서 만났던 장흥 출신 김영남 시인의 '선운사 도솔암 가는 길'이었지요.
선운사 도솔암 가는 길...김영남
만약 어느 여자에게 이처럼
선운사에서 도솔암을 올라가는 길가의 진흥굴 바로 앞에서 자라고 있다. 수령은 6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는 23m, 둘레는 2.95m이다. 높이 2m 정도에서 줄기가 크게 둘로 갈라져 있고, 그 위에서 다시 여러 갈래로 갈라져 부채살처럼 퍼져 있다. 고창사람들은 이 나무를 '장사송' 또는 '진흥송'이라고 하는데, 장사송은 이 지역의 옛이름이 장사현이었던 데서 유래한 것이며, 진흥송은 진흥굴 앞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많이 미안하다. 차량으로 달려 온 내가 미웁다. 넓은 주차장이 오히려 마음을 가득 채운다. ㅎㅎ참 이제 철이 들려나?
정확한 창건 연대를 알 수 없지만 선운사의 연혁을 전하는 여러 기록에 따르면 선운사와 함께 창건되었다고 한다.조선 후기까지 도솔암은 상도솔암(上兜率庵), 하도솔암(下兜率庵), 북도솔암(北兜率庵)의 세 가지로 불렸다. 상도솔암은 지금의 도솔천 내원궁을 말하며, 하도솔암은 마애불이 있는 곳, 북도솔암은 지금의 대웅전이 있는 자리를 일컫는다.이처럼 각각의 독립적인 암자였던 것이 근세에 와서 도솔암 하나로 통합되었던 것이다.
극락보전 나한전
정면 3칸 측면 1칸에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건물은 건축수법으로 보아 조선 말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나한전 내부에는 흙으로 빚은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가섭과 아난이 협시하였고, 1910년 용문암에서 옮겨온 16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조선시대 도솔암 용문굴에 이무기가 살면서 주민들을 괴롭혔는데, 이를 쫓아내기 위해 인도에서 나한상을 모셔와 이곳에 안치하자 이무기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무기가 다시 나타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이무기가 뚫고 간 바위 위에 나한전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나한전. 삼층석탑
2기단으로 추측되며 하기단은 매몰된 상태이다. 상기단 면석에는 양우주가 보이고 갑석과 초층 몸돌이 한 개 돌이다. 탑신에 양우주는 희미하고 2단의 탑신 받침을 두었다. 그 위의 부재는 훼손이 심하여 형체가 불분명하다. 고려시대 석탑으로 보여진다.
드디어 도솔천 내원궁에 들어서는 구나. 거리는 얼마나 될까? 뒤돌아 서고픈 마음이 굴뚝 같지만 금동지장보살을 뵙지 않고 선운사를 다녀왔다고 이야기 할 수 없기에 두 손 모아 합장 올리고 옷깃을 여미었다.
내원궁
험준한 바위 위에 세운 법당으로 상도솔암이라고도 한다. 조선 중종 6년(1511)에 중창하고, 숙종 20년(1694)에 3창, 순조 17년(1817)에 4창하였다. 거대한 바위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기단 없이 편편한 곳에 자리를 잡아 원형초석만 두었는데, 기단이 없어 건물이 낮아지므로 하인방의 높이만큼 되는 장초석 사용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 겹처마, 팔작지붕, 두리기둥을 사용하였고 2분합문을 달았다. 내원궁에는 금동지장보살좌상(보물 제280호)을 봉안하고 있다.
내원궁 앞에 마련된 좌석에 앉아 기다려도 기다려도 두 스님의 염불은 끝없이 이어진다. 그렇다고 금동지장보살을 보지 않고 발길을 돌릴 수도 없었다. 스님의 청아한 촉성이 둔탁하게 들릴즈음 어칸문이 열린다. 풀린 다리를 절룩이며 지장보살님을그렇게 뵈었다.
고려 후기 지장보살 그림에서 보이는 양식이다. 보살상은 선운사 금동보살좌상(보물 제279호)과 두건을 쓴 모습, 목걸이 장식, 밋밋한 가슴 표현 등에서 서로 닮았지만, 이마에 두른 띠가 좁아지고 귀를 덮어내리고 있지 않으며 용모 등에서 수법이 다르다. 일반적으로 지장보살은 다른 불상들과 달리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으며,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둥근 얼굴은 단아한 인상이며, 목에서 어깨로 내려가는 선은 부드럽다. 상체나 하체 모두가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띠를 매고 배가 들어가는 등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두꺼운 옷은 배부분에서 띠매듭을 지었고, 다리에는 간략한 몇 가닥의 옷주름을 나타내고 있다. 앉은 자세는 오른발을 왼무릎에 올린 모양으로 발을 실감나게 표현하였다. 오른손은 가슴에 들어 엄지 손가락과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있으며, 왼손은 배에 들어 작은 수레바퀴 모양의 물건을 잡고 있다. 지장보살상은 고려 후기의 불상양식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으며 우아하고 세련된 당대 최고의 작품이다.
천마봉
이제야 인연 지었습니다. ()()()
도솔암의 서편 암벽 칠송대에 새겨진 높이 13m, 너비 3m에 이르는 거대한 마애불상이다. 전설에 의하면 백제 위덕왕(재위 554∼597년)이 검단선사에게 부탁하여 마애불을 조각하고 동불암이라는 공중누각을 짓게 하였는데, 조선 영조 때 무너졌다고 한다. 불상은 낮은 부조로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이며, 머리에는 뾰족한 육계가 있다.
불의는 통견으로 두꺼운 편은 아니나 옷주름선이 선각으로 형식화되어 있고, 평평한 가슴 아래로 선명하고 단정한 군의의 띠매듭이 가로질러 새겨져 있다. 대좌는 비교적 높은 2단으로 되어 있는데, 상대에는 옷자락이 늘어져 덮여 있고 하대는 간략한 연꽃무늬의 연화좌로서 전반적으로 마멸이 심한 편이다.
명치께에 있는 네모진 흔적은 부처님을 완성한 후 불경과 시주자의 이름 등을 적어 넣고 돌뚜껑을 닫은 뒤 백회로 봉한 자국이다. 여래상의 머리 위에는 누각식으로 된 지붕이 달려 있었는데 인조 20년(1648)에 무너져 내렸다고 한다. 지금 마애불의 머리 위에 뚫린 네모진 구멍들과 드문드문 끼여 있는 부러진 목재, 쇠못 등은 그 흔적이다. 위압감을 주는 얼굴 표정과 대담한 선각 등으로 미루어보아 고려 시대 초 지방 호족들이 발원하여 조성한 마애불로 여겨진다.
선운사 마애불 비기 탈취 사건...디지털고창문화대전
이서구가 마애불 배꼽에서 서기가 뻗치는 것을 보고 뚜껑을 열어보니 책이 들어 있었는데 갑자기 벼락이 치는 바람에'이서구'가 열어 본다’는 대목만 얼핏 보고 다시 넣었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해진다. 그 뒤로도 여러 사람들이 열어 보고자 하였으나 벽력이 무서워서 열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무장 지역에서 최대 동학 조직을 가지고 있는 손화중은 동학교도들과 함께 이 비기를 꺼냈다고 전해진다.
미당의 스승인 근대의 큰스님 박한영스님의 '선운사 도솔암에 올라가다'로 마무리 한다. 선운사 관련 글은 김화영님이 엮은 '꽃이 지고 있으니 조용히 좀 해주세요'(시와시학사. 2008년)를 추천한다.
바다 산이 꺽어진 깊은 곳에 맑은 냇믈 너댓번 건너메라 꾀꼬리 울음 숲을 뚫고 풀 향기 길에 가득하여라
하늘을 찌를 듯 탑은 높은데 그 위에 도솔궁이 자리 잡았네 피리 소리 문득 들릴 때 드문드문 꽃조각 흩나리는 구나 산은 높아 태화 같은데 은하수는 삼태성에 가까워지네 뾰죽뾰죽 봉우리 올라기기 어렵고 종소리 경쇄소리 쟁쟁하여라
하늘 음악 반공에 올려 옛동굴의 용을 불러 일으키는구나 늙은 스님 선을 파하고 발 밖 난간 앞을 서성이네 누가 열 길 마애불을 새겼는가 마치 이마에 흰 광명 높은 것 같아서 솔은 스스로 굽어 구름에 뻩혀 푸르른데
걸어서 용문에 올라가니 바위 아름답고 더욱 장해라 신이 웃는 것 같고 신중의 변상과도 같네
찬 샘에서는 푸른 구슬을 뽑고 굴마다 메아리 울려 퍼져라 옷잡고 꼭대기 올라서니 붉은 햇살 물결 굽이치네 2012.03.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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