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창녕군

창녕...감리 마애여래 입상

임병기(선과) 2011. 7. 27.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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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암면 감리 산 64번지. 감리산림욕장으로 들어가 주차를 하고 이 철문을 통과하여야 한다. 한여름을 방불케 하는 더위에 포기하고픈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대책없이 걸었다.

 

 "감리는 감골, 감동(甘洞)이라 불리었는데 감나무가 무성하였던 골짜기라 하여 감골이라 하였다 한다. 또한 조선 선조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문국선(文菊宣)이라는 사람이 전라도 나주에서 의병을 모아 창녕으로 달려와 곽재우장군과 합류하여 왜적을 막았는데 임진왜란이 끝난후에나주로 돌아가지 않고 이 골짜기에서 머물면서 바위틈에서 나오는 물로 연명하였다 한다. 그 물이 감로수와 같이 달디단 물이라 하여 달 감(甘)자를 써서 감골, 감동(甘洞)이라 하였다 한다."

 

 

철문을 지나 15~20분 오르면 삼거리가 보인다.  우측으로 접어들면 된다.

 

 

우측에는 사방댐이 있다. 멀리 보이는 사진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잡는다.

 

 

한굽이만 돌면 안내문이 보이고, 그 아래로 내려가면 된다.

 

 

계곡에 있는 둑을 건너서 바로 산길로 들어가면 된다.

 

 

 민묘을 거쳐 대나무 숲을 지나면 우측에 배틀바위가 보이고, 바로 올라가면 민묘앞에 마애불이 있다.

 

 

배틀바위. 서글픈 전설을 간직한 바위이다. "초지동의 남쪽 골짝에 있는 바위로 이 일대의 지명도 된다. 애골 중턱에 바위가 있는데 다음과 같은 애달픈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고려중엽, 평장사(平章事) 이공(李公)이라는 사람이 서울에 살았느데 그의 딸과 약혼을한 김상서의 아들이 결혼을 석달 앞두고 불의의 병을 얻더니 그만 죽고 말았다. 예전에는 양반가문의 딸은 약혼만 하면 일평생 수절 하여야 되었으니 이고의 예쁜딸은 시집도 가보지 못하고 졸지에 슬픈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녀는 얼굴도 예쁘고 붓글씨와 그림에도 자길이 뛰어난 양가집 규수로 자랐으나 재혼의 길도 막혔으니 이를 비관 출가를 하게 되었으니 불도(佛道)에 뜻을 두고 집을 떠난 수도의 길을 나섰다. 유모와 방랑생활을 하다보니 어느듯 고암면 감리까지 흘러들어 화왕산 아래 절벽에 천연동굴을 발견하고 베틀을 차려놓고 길쌈을 하면서 한많은 세월을 보냈다 한다.


이 바위를 이공의 딸이 베틀을 차려놓고 베를 짯다하여 베틀바위라 부르며, 뒤쪽에는 불공을 드렸다는 마애여래입상이 있다.
그녀가 그렸다는 국화무늬가 베틀바위위에 남아 있으며, 석불 앞에는 암자를 세웠던 자리도 남아있다. 현재에도 공을 드리는 집이 바위사이에 있다."

 

 

감리마애여래 직전 배틀바위. 분명 선각의 석불좌상으로 보이는데 자료가 보이지 않는다.

 

 

 

 당당한 체구에 법의는 우견편단으로 U자형이다. 통일신라 시대 불상으로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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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9

***" "의 내용은 다음카페 우포에서 화왕까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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