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소산성 입구, 부여 박물관 뒷편에 조왕사는 자리한다. 사진 촬영을 위해 스님에게 양해를 구했더니 친절하게도 법당까지 오셔서 불을 밝혀 주었다. 부산 사투리가 깊게 묻힌 비구니 스님은 사진 잘 나오면 꼭 보내달라고 하신다. 많은 사진 작가들이 불상 촬영을 오면 늘 그렇게 어려운(?) 조건으로 허락하셨다며 미소 지으셨다.
"금성산 조왕사는 부여박물관 뒤편에 위치해 있으며, 일본인과 인연이 많은 사찰이다. 조왕사는 고려시대 이래의 사찰로 추정될 뿐, 구체적인 연혁이나 사세에 대하여 알려진 바는 없다. 이러한 조왕사가 사세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에 이르러서이다.
1913년 절 뒤편에서 비로자나불좌상을 발견하여 1919년에 법당을 짓고 이 불상을 봉안하여 중창하였다. 이후 1981년에 요사를 건립했는데, 1984년에는 일본인 불자들이 성금을 내어 종각을 세우기도 하였다. 조왕사는 절 이름이 ‘왕을 조근(朝覲)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압박과 설움을 받으면서 조선왕조를 섬기고자 사찰에서 기원한 듯 하다."
위의 자료와 달리 백제가 눈앞에 아른아른 스쳐 나만의 그림을 그려본다. 조왕을 왕을 조근한다는 의미보다 왕이 아침마다 들린 즉 아침운동을 했던 사찰이라고 보면 어떨까? 그 왕은 백제의 왕이 분명하지 않은가? 부여는 늘 그런 애잔함으로 남아있는 고도이다. 언제쯤 신라의 달밤 분위기로 백마강을 불러 보려나?
일본인들이 왜 범종 불사를 지원하였을까? 표면상 알려진 대로 단지 불교전래에 고마움의 표시일까? 백제 멸망과 관련은 없을까? 그만 나가자 일천한 지식이 탄로나는 무리수를 범하지 않을련다.
1987년의 홍수 때 드러난 탑재를 조합하였다. 2기단의 3층 탑이다, 상륜은 멸실되었다. 몸돌은 제짝이 아닌듯 보인다.
하기단 면삭에는 안상도 보이며, 상기단 갑석에는 복련이 피어 있다.
금성산 석불좌상. 오랜세월 땅속에 묻혀 있다가 1913년 홍수로 인해 이땅에 화현한 고려시대 비로자나불로. 여러번 자리를 옮겼다가 옛절집으로 돌아온 불상이다. 새로히 복원한 나발, 풍만하고 살찐 얼굴. 뚜렷한 이목구비, 완만한 턱, 엷은 미소가 보이며, 짧은 목에는 삼도가 생략되었다. 어깨는 둥글고 부드럽다. 결가부좌한 자세에 지권인의 수인을 취하고 있는데 손과 발의 세부 조각기법은 형식화하였다. 우견편단의 법의는 무릎까지 내려와 있다.
하대좌 면석에는 귀꽃이 핀 안상을 새겼고 갑석에는 복련으로 장시하였다. 방형 중대석에는 연봉(?)을 새겼고, 상대좌에는 겹앙련을 장식하였다. 유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왕사로 모셔 오기전에는 지극정성으로 기도하면 병환 치유와 아들 점지에 영험이 있다고 민간에 널리 알려져 있던 불상이었다고 한다.
2010.04.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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