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영암군

영암...학계리 석불입상

임병기(선과) 2009. 9. 27.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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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갑사에서부터 청매님의 폰이 계속 울렸다. 하루 일정을 포기하시고 못난 나를 기다리고 계신 듯했다. 학산리 석불 입상 답사즈음에는 목포에서 기다리지 못하고 출발하였으니 독천초교로 오라고 하셨다. 참 고마운 분이다.

 

학계리 석불은 문이 닫혀 있었지만 까치발로 바라본 모습은 보호가 잘 되었다(그 이유가 마지막에 언급된 전설과 관계 있는지 알 수는 없다). 울타리 안에는 개인집도 보였고 제법 넓은 밭도 있었다. 마을 당산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이문을 통과하면 모두 득도하여 부처가 될가? 이역시 불상에 전해오는 전설과 관련 마음의 문을 열고 경건하게 접견하라는 의미가 함축된 것 같았다. 문을 열어 두었으면 금상첨화일텐데, 사유지인지 도난을 우려한 고육지책인지 멀리서 온 답사객의 심사는 우울하다.

 

 

까치발로 바라본 불상. "이 불상은 높이가 4m나 되는 장방형(長方形) 화강암(花崗岩)에 돋을새김한 것이다. 머리는 소발(素髮)이고 육계(肉계)가 불분명하며, 몸에 바짝 붙여진 얼굴을 사각형이나 턱은 삼각형을 이루고 있어 승려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머리에 비해 다소 좁아진 어깨는 그런대로 양감(量感)이 나타나 있다. 수인(手印)은 왼손을 들어서 배에 대고, 오른손은 길게 내렸는데 신체(身體)에 비해 작고 치졸하게 표현하였다.
 
서 있는 자세의 하체(下體) 부분은 형체(形體)만을 나타내었을 뿐 조각(彫刻)의 아름다운 맛은 훨씬 줄어들었으며, 옷주름 또한 가슴 앞의 凹형 의문(衣紋)과 왼쪽팔에 걸쳐내린 네 가닥의 옷주름 자락 등으로 간략하게 처리하였다. 얼굴과 몸 아랫부분에 금이 나 있는 이 불상은 조각수법(彫刻手法)이 단순하고 친근미 있게 표현한 조선시대(朝鮮時代) 지방불상양식(地方佛像樣式)의 예로 평가된다."...출처/문화재청

 

 

학계리 석불 입상에는 달빛에 젖은 슬프지만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온다.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 조선시대 선조때 학산면 학계리에 정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자식이 없어 걱정하던 정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자식이 없어 걱정하던 정부자는 수년동안 지성을 들인 결과, 늘그막에 아들 하나를 얻게 되었습니다.

"여보,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겠소, 자식이 귀한 우리 집안에 늦게나마 아들을 얻게 되었으니..."

정부자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덩실덩실 춤을 추며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정부자님은 기쁘시겠습니다."

"그야 물론이지"

"이름을 뭘로 지으셨는지요?"

"하늘이 내린 자식이니 天子라고 내 이미 지어 놓았지"

정부자는 만나는 마을 사람들의 축하 인사를 받을때마다 자신의 나이도 잊은채 아들 자랑을 하며 기뻐했습니다. 정부자의 아들인 천자는 아버지의 소원대로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자상하신 아버지, 정부자의 정성때문인지 천자는 늘 겸손하고 착한 행동을 일삼아 마을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습니다.

"늙으막에 아들 하나 얻더니, 아들이 저리도 착하니까 정부자는 기쁘기 그지 없겠어."

"암, 그렇고 말고"

"정 부자가 천성이 착하니까 늘그막에 복받은거지 뭐"

마을 사람들은 정 부자를 은근히 부러워 하며, 정 부자와 정 부자의 아들을 칭찬하곤 했습니다.

"여보, 우리 천자를 빨리 혼인시킵시다. 그래야 죽기전에 손주라도 보지 않겠소."

정 부자는 천자가 열 살이 넘자마자 규수감을 물색하여 천자를 일찍이 혼인시켰습니다.

"이제 빨리 손주를 보야야 할텐데..."

"영감도 성미 하나 급하시기는... 어련히 때가 되면 손주가 생길텐데 그러시오."

정부자는 자신이 뒤늦게 자식을 보게 된 것이 늘 마음에 걸려서인지 손주가 빨리생겨 나길 몹시 기다렸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자는 여전히 천진스럽게 행동했습니다.

"아무래도 천자가 음양의 이치를 모르는 것 같으니 당신이 며느리를 불러 음양의 이치를 깨닫도록 일러 주시구려. 내 천자가 음양의 이치를 깨닫도록 힘쓸터이니까"

정 부자는 아내에게 넌지시 며느리 교육을 부탁하였습니다.

"영감, 아직 우리 천자가 어리니까 조금 지나면 깨닫지 않겠어요."

"그래도 그렇재, 천자 나이가 열 다섯 살이 되었는데도 저렇게 어린애 같으니 원."

정 부자는 아들을 혼인시킨지 다섯해가 되도도 아무런 변화가 없자 아들에게 음양의 이치를 깨닫도록 노력했습니다.

"천자야, 너 날 따라 오너라."

"네"

정 부자는 외양간으로 가더니, 하인을 불렀습니다.

"준비되었느냐?"

"네"

이미 하인들이 외양간에서 대기하고 있더니, 정 부자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황소 한 마리와 암소 한 마리를 끌고 나왔습니다.

"저 뒤뜰로 끌고 가자"

정 부자는 아들을 데리고 뒤뜰로 갔습니다.황소가 발광하며 암소를 올라 타려고 몸부림을 하는 장면을 아들에게 보여주면서 정 부자는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저 소들이 왜 저러는지를 아느냐?"

"싸우는 것이겠지요?"

정부자는 자세히 아들에게 음양의 이치를 깨닫도록 설명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각종 서적을 통해 음양의 이치를 깨닫도록 힘썼습니다. 그 뒤부터 항상 천진스럽고 밝은 얼굴인 천자가 갑자기 우울해졌습니다.

'난 안된단 말이야. 아버지 뵐 면목은 물론 아내의 얼굴 보기가 민망스러우니 어쩌면 좋지.'

항상 수심이 찬 얼굴로 천자는 자신의 처지를 비탄해 했습니다. 천자의 나이 스물이 되었을 무렵 정 부자는 손주를 보지 못한채 눈을 감았습니다.

'불효자식. 용서하십시오. 아버님!'

천자는 마음속으로 한없이 흐느껴 울었습니다. 천자는 자신이 아들을 낳지 못하는 고자임을 알고난 뒤부터 늘 자신을 한탄했습니다.

그런중에 또 아버지의 소원을 풀어드리지 못하고 눈을 감게했으니, 더욱 가슴이 찢어질 듯 했습니다.
'다 하늘의 뜻이니 어쩔수 없는 일. 대가 끊겨 조상을 뵐 면목이 없으니 원통하구나.'

천자는 자신을 한탄했습니다. 그런 때문인지 천자는 마을 사람들의 어려운 일이 있으면, 자기 집의 일처럼 남을 돕기에 앞장섰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그를 가라켜 [구민(救民)고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자신의 혈통을 남기지 못한 것을 항상 한탄해 하며, 학계 뒷산에다 높이 15척의 미륵비를 조각해서 세웠습니다.

그리고는 아침 저녁으로 미륵비에 제사를 지내며, 자식하나 점지해 주시길 지성으로 빌었습니다. 그러나 끝내 그에게 자식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제 논 두마지기를 미륵비 제수비로 봉할터이니, 매년 3월 15일이면 미륵비 제사를 지내 주시면 고맙겠소."

마을 사람들은 눈시울을 적시며 그의 유언을 지키기로 굳게 다짐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곳 학계리 사람들은 그의 유언대로 제사 유사를 정하여 제삿날 일주일 전부터 목욕을 깨끗이 하고, 부정을 범하지 않도록 노력하며 3월 15일이면 잊지 않고 제사를 지내오고 있습니다.


내용출처 : http://tour.yeongam.go.kr

2009.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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