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청주시

[스크랩] 청주...중앙 공원

임병기(선과) 2008. 10. 8. 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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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사지 철당간에서 지척에 위치해 있었다. 전국의 공원처럼 이른 아침 운동하는 어르신들로 분주했지만, 한쪽에서 아침 까지 술에 취한 젊은이들의 애정행각은 눈을 찌푸리게 했다.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방문시 동선에 포함시키길 바라며 자료는 문화재청에서 옮겨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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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선루

 

이 건물은 고려시대(高麗時代) 청주관아(淸州官衙)의 하나로 객관(客館) 동쪽에 있던 취경루(聚景樓)에서 유래(由來)한 것이다. 고려 공민왕(恭愍王) 10년(1361) 홍건적(紅巾敵)의 침입을 물리치고 환경(還京)하다가 청주에서 기념으로 과거(科擧)시험을 치르고 방(榜)을 이곳에 써붙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후 퇴락했던 건물을 조선(朝鮮) 세조(世祖) 7년(1461)에 목사(牧使) 이백상(李伯常)이 중수(重修)하고, 한명회(韓明澮)가 편액(扁額)을 망선루(望仙樓)라 하였다.

 

그후 목사 이섬(李暹)이 또 중수하는 등 근세(近世)에 이르도록 유지되다가 1923년에 제일교회로 이건되었으며, 2000년 12월 중앙공원으로 옮겨 세웠다. 정면 5칸·측면 3칸의 2층 목조(木造) 팔작 누각(樓閣)형식인데 현재는 1층 부분이 원 모습을 알 수 없게 되었으나, 이 지방에서는 가장 오래된 유서깊은 건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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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비

 

척화비는 고종(高宗) 8년(1871)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신미양요(辛未洋擾)를 치른 후 백성들에게 서양에 대한 항전의식(抗戰意識)을 심어주기 위하여 서울 및 전국의 요충지에 세웠던 비이다. 척화비의 내용은 "양이침범(洋夷侵犯) 비전즉화(非戰則和) 주화매국(主和賣國)"인데 이 척화비는 윗부분이 깨어져 '洋'자와 '則'자가 없어졌다. 1976년 2월 29일 석교동(石橋洞) 노상 하수구 뚜껑으로 있던 것을 발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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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각수

 

압각수는 나이가 900년 정도로 추정되는 은행나무로 높이가 30m, 둘레가 8m이다. 압각수란 이름은 잎의 모양이 오리의 발가락을 닮았다고 해서 생겼다는 주장과 나무 뿌리가 물오리발처럼 발가락 사이가 붙어있어 생겼다는 주장이 있다.
 
이 나무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1351∼1374, 재위) 때 목은(牧隱) 이색(李穡)을 비롯한 여러 어진 신하들이 아무 죄도 없이 청주옥(淸州獄)에 갇혔다가 큰 홍수(洪水)를 만났을 때 이 나무에서 홍수를 피할 수 있었다 하며, 왕이 이 사실을 전해 듣고, 이들이 죄가 없음을 하늘이 증명하는 것이라 하여 이들을 석방하게 되었다고 하는 일화(逸話)를 간직하고 있는 유서 깊은 나무이다. 압각수(鴨脚樹)라는 이름은 은행(銀杏)나무의 한 별칭(別稱)으로서 은행나무 잎의 모양이 오리류(類)의 발가락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때 권근이 지은 시가 압각수 앞에 새겨져 있는데, 중국 주나라의 주공이 모함으로 물러날때 큰 사람이 일어 벼를 쓰러뜨렸다는 고사를 빗대고 있다.

 

流言不辛及周公  유언비어로 주공에게 불행이 미치니
忽有嘉禾偃大風  홀연히 큰 바람이 일어 벼를 쓰러트렸네
聞道西原洪水漲  서원에 큰 물이 넘쳤다는 말을 듣고
是知天意古今同  하늘의 뜻이 예나 지금이나 같음을 알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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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병마절도사영문

 

이 건물은 청주읍성(淸州邑城) 안에 있었던 충청도병마절도사영(忠淸道兵馬節度使營)의 출입문이다. 충청도병마절도사영은 당초 충남 해미현(海美縣)에 있었다가 효종 2년(1651)에 이곳으로 옮기었다. 병마절도사는 충청도 관찰사가 겸직하고, 따로 전임의 종2품 절도사를 두었는데, 이곳에 전임의 절도사가 있고 충청도의 육군인 기병·보병을 총괄하였다.

건물의 양식은 조선시대 후기 병영(兵營)이나 수영(水營)의 출입문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데, 네모진 높은 주춧돌 위에 세운 2층의 누문(樓門)으로 아래층의 중앙에 문을 달아 출입하고 위층은 우물마루로 하고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둘리었다. 기둥 위에는 이익공 형식의 공포를 만든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집이다.

이 건물은 1988년까지 청녕각(淸寧閣)으로 오인되어 서원현감 이병정이 창건한 것으로 여러 책자에 기록되어 있다.

 

2008.08.09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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